특경가법·형법상의 같은 죄도 집행유예 선고 비율 현격한 차이항소심 거치면 형량 차 더 커져 정상참작 사유도 일반인과 크게 달라

우리사회에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사법불신의 화두를 던진 지강헌 사건.

수많은 취재진과 시민들이 몰려든 현장에서 지강헌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그 사건이 터진(1988년 10월8~10월16일) 지 이제 20년째로 접어든다. 그 동안 법조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범죄 및 당사자에 대한 사법부의 법적용을 중심으로 ‘유전무죄’의 현주소를 들여다봤다.

‘유전무죄’와 관련, 일반인들은 대체로 사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한국투명성기구가 지난 5월 실시한 설문조사 중 ‘유전무죄 무전유죄 주장에 동의하는가’란 질문에 71.9%가 ‘동의한다’고 답해, 죽은 지강헌의 메아리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기구가 앞서 2006년 8월 조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법과 정의가 제대로 집행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의 63.2%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국민의 ‘심증’을 뒷받침할만한 ‘물증’도 있다.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교수)가 지난 8월 발표한 화이트칼라범죄와 일반범죄의 양형을 분석한 보고서다.

2000년 1월~2007년 6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특경가법)상 배임과 횡령죄(화이트칼라범죄) 137건, 2000~2005년 사법연감통계 중 강·절도 범죄, 형법상 횡령·배임죄를 비교, 분석한 결과를 보자.

우선, 특경가법상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149명의 지배 주주나 임원 가운데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이는 71.1%인 106명에 달했다. 반면 강·절도 사범의 경우 집행유예 선고율은 47.6%에 불과했다. 형법상 횡령·배임죄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비율은 41.9%다.

형법상 횡령·배임죄는 주가조작과 같은 대형 경제사범과 달리 소액의 회사 돈을 빼 쓰는 등 경미한 범죄를 말한다. 일례로 음식대금 77만원을 생활비로 쓴 한 배달원은 형법상 횡령죄로 실형 10개월을 살았다. 2000~2005년 사법연감통계에 실린 사기죄 등 특경가법 전체 위반 사범의 집행유예 선고율은 47.5%다.

항소심을 거치면 화이트칼라범죄에 대한 형량은 훨씬 더 ‘경미’해 진다. 1심과 2심의 종합적 집행유예 선고 비율은 83.9%, 125명이다. 화이트칼라 범죄의 경우 항소심을 거치며 집행유예가 유지되거나 실형에서 집행유예로 바뀐다는 말이다.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106명의 피고인 중 항소심에서도 유죄판결을 받은 피고인은 총 60명. 이중 항소심에서도 집행유예가 유지된 피고인은 59명으로 98.3%를 차지했다.

반대로 1심에서 실형(43명)을 선고 받고 항소심 판결까지 나온 41명 가운데 집행유예로 변경된 피고인은 24명으로 58.5%를 차지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예컨대 삼성에버랜드 허태학 전 사장은 삼성에버랜드가 전환사채(CB)를 헐값에 발행하여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가 이를 인수하도록 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행위로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가, 2심에서 징역 3년, 벌금 30억, 집행유예 5년을 받아 오히려 형이 늘어난 경우다.

지난 해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도 비슷한 결과를 발표했다. 2002년 1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서울중앙지법의 횡령사건 판결문 461건을 조사한 결과, 이 기간 소규모 자영업체 종업원 34명의 평균 횡령액은 636만원이고, 실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44.1%(15명)이다.

반면 최고경영자 83명의 평균 횡령액은 46억원이고, 실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33.7%(28명)이었다. 징역형을 선고 받더라도 최고경영자의 경우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비율이 59.4%로 자영업체 종업원들의 집행유예 비율 37.5%와 차이를 보였다.

2000년부터 2006년 8월까지 화이트칼라 범죄를 저지른 고위층 131명을 대상으로 양형을 분석한 결과, 131명 중 특별대우 없이 제대로 죄 값을 치른 사람은 19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허태학 에버랜드 전 사장, 박용성 두산 전 회장

노 의원은 “2005년 전체 형사사건 구속률이 87%에 이르는 반면, 131명의 고위층 화이트칼라 범죄자 구속률은 3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구속된 45명 중 15명은 보석으로 풀려났고, 11명은 특별사면·복권, 형ㆍ구속집행정지, 가석방 등으로 풀려났으며, 죄값을 치른 사람은 단 19명뿐”이라고 밝혔다.

화이트칼라 범죄 처벌에 관한 판결 사유도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 경제개혁연대의 <화이트칼라범죄 양형 사유분석>결과를 보면 ‘(횡령·배임으로 인한)개인적 이득이 없기 때문’이 집행유예 선고 이유로 가장 많은 61.3%(65명)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범죄전력 없음(52.8%, 56명)’, ‘피해액 변제(51.9%, 55명), ‘전문경영인이기 때문(51.9%, 55명)’ 등이 이유로 제시됐다. 최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재판과정에 제시된 ‘사회공헌·경제발전 기여’는 7.5%(8명)를 차지해 의외 결과를 보여주었다. 동아그룹 최원석 전 회장의 경우도 국위선양과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정상참작 사유로 제시했다.

조사를 담당한 최한수 연구팀장은 “법관 스스로가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법원의 판결에 있어 주요한 경제학 혹은 경영학 이론들이 판단근거로 사용되는데 반해, 한국의 경우 법원은 아직도 70년대 관주도의 재벌위주의 경제발전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고 견해를 밝혔다.

● 미국 기업 범죄는 형사범보다 중형
엔론 전 CEO에게 24년 4개월 선고

미국의 기업범죄 처벌은 한국과는 확연한 차이가 날 정도로 엄격하다. 강도나 강간범에 대한 처벌이상의 중형을 선고한다. 시장경제를 훼손하는 행위는 형사범보다 더 중대한 범죄행위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분식회계, 자금세탁을 통해 주가를 조작한 엔론의 전 최고경영자 제프리 스킬링은 징역 24년 4개월에 피해자들에게 4500만 달러를 변제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월드컴의 전 최고경영자 버나드 에버스 역시 4년 동안 110억 달러를 횡령, 징역 25년을 선고 받은 바 있다. 아델피아커뮤니케이션의 창업자 존 리가스는 부채 23억 달러를 숨겨 징역 15년에 재산 25억 달러가 몰수되는 수모를 겪었다.

임클론시스템스의 전 CEO 사무엘 왁살은 주가하락 예상 뒤 회사 주식을 매도한 혐의로 징역 7년 3개월에 벌금 4백만 달러, 공개회사 운영 평생 금지를 선고 받았다.

마틴그라스의 전 CEO 라이트에이드는 회사 순수익을 16억 달러 부풀린 죄로 징역 10년, 벌금 50만 달러에 상장회사의 임원 또는 이사 피선이 금지됐다.

미국에서 내부 고발자에게 주는 ‘특혜’도 우리와 대조를 이룬다. 사내 비리를 고발한 제보자에게 환수금의 최고 30%를 보상해 준다. 미 연방정부는 지난해 비리기업에서 회수한 79억 달러 중 13억 달러를 제보자에게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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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