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대한 헌신에서 벗어나 자기 투자와 정체성 찾기정신세계 추구하는 지식 정보형과 재력 과시형으로 분류배우자 외도도 많아… '황혼이혼' 이어 '대입이혼'도 늘어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상반기 현재 40~59세 여성 중 순수비경제활동인구 여성은 약 2백66만1,000 명이다.

이중 상당수가 전업주부층이다. 출생아수는 10년 전인 1995년에 비해 2005년 현재 2백79만 명이 감소, 핵가족화가 심화됨에 따라 자녀의 육아, 교육 문제로부터의 주부의 독립 시기 또한 함께 앞당겨 지고 있다.

이들 중장년 상류층 주부들이 차지하는 사회적 영향력 또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2004년 제일기획에서는 ‘WINE(Well Integrated New Elder)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발표하며 차세대형 중장년기 부부의 성향에 대한 성찰결과를 보고한 바 있다.

● 신(新) 유한부인이란

상류층 전업주부로서, 자기자신을 위한 물질적ㆍ 시간적 여유를 스스로 찾아내 즐기려 하는 계층이다. 가정경제권을 남편과 공유하는 등 부부 평등을 추구하고 더러 가사 분담까지 남편에게 요구한다. 사회참여 욕구가 강하고, 지적 욕구와 정보 활용도가 높다. 자의식이 강하고, 자기계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1960~80년대 '유한부인'은 남는 시간과 돈을 충동적 향락에 받쳐 가정파탄을 일으키는 상류층 탈선 주부들을 일컫는 데 쓰였다.

국내 45~64세의 기성세대를 대상으로 한 이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남편 중심의 가정 내 권력이 점차 아내인 주부에게로 이동, 부부 중심의 새로운 생활상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적으로 주부층의 변화로 요약된다. 헌신, 순종적인 기존 주부의 역할 강요와는 달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투자가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일기획 조사결과에 의하면 실질적으로 이들의 인터넷 이용비율이 전체 주부의 75.1%까지 육박했고 재테크에 대한 관심도도 94.3%에 이른다.

비상금 또한 남자들만의 해당사항이 아니다. WINE세대의 자기 여윳돈 비축과 사용율이 68.3%에 이른다. 사회상의 변모와 함께 적극적으로 변모해가는 주부들의 생활상과 특성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혼자 집을 지키지 않는다. 주부로서 기본적인 가사 역할 외에도 봉사활동 등을 통한 적극적인 사회참여, 나름의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과 자아계발에 여느 직장인 못지않은 노력과 투자를 보이고 있다.

동일한 주제의 2000년 조사결과와도 큰 차이를 보인다. 개인관심사가 중요하게 부각되었으며, 어버이, 남편, 자녀를 중시하던 삼종지도에서 가족, 사회, 자아의식을 강조하는 새로운 삼종지도의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 신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고, 과거 주부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던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인식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유진형 브랜드마케팅연구소 차장의 2005년 전국소비자 조사보고서 또한 비슷한 결론을 맺고 있다. 신 유한부인들은 ‘현재의 행복이 최선이다’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다.

가족이 우선이었던 전통적인 주부상과는 달리 현대의 전업주부들은 자신에 대한 외형적, 내면적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경제적 여유가 탄탄한 중산층 이상, 특히 상류층 주부들의 경우는 자기 투자 비용과 고민, 행동 영역이 더욱더 높고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명망 높은 사회적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편을 둔 40대 초반 주부B씨는 아침 시간대의 생활 리듬은 여느 주부들이나 별다를 바 없다. 아이들에게 도시락 겸 간식거리를 챙겨 싸 보내고 남편 출근 채비를 도운 뒤, 모두가 나가고 나면 아침 청소를 해치운다.

그러나 그 후부터 어린 막내 아이가 귀가할 때까지 거의 한번도 혼자 점심을 먹는 일이 없다. 매일 친구들과의 약속이 잡혀져 있다. 학부형으로 만나 친구가 된 이들로부터 동창, 남편의 부부 동반 모임에서 만나 교분을 쌓게 된 친구 등 여러 부류의 친구들과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요즘 주부 B씨와 친구들간에 오가는 최고의 화제는 역시 대통령 선거 후보 얘기다. 기본적으로 시사문제에 관심이 있기도 하지만, 이들간의 ‘대선용 토론’은 그 궁극적인 목적이 따로 있다.

대선 당선자에 따라 자신들의 재테크에 어떤 영향이 올까를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해서다. 굳이 대선 문제가 아니라도 중학생인 큰 아이의 진로 문제에 신경 써야 하는 등 관심 있고, 해야 하며, 하고 싶은 일들이 매일 기다리고 있다. 단지 환경적인 풍요의 덕이 아니다.

“ 아직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시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굳이 가족 뒷바라지 문제가 아니라도 저희는 전혀 따분하거나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가정 안팎으로 매일 새로운 사건이 터지지요. ”

상대적으로 지식정보형 세대에 가까운 40대 상류층 주부들과는 또 달리, 자녀들의 독립과 분가, 여성 개인으로서의 폐경기가 맞물리는 50대에 이르면 다소 양상이 달라진다. 사실상 상류층 주부사회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대 격변기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과도기를 치르는 상황이다.

재력가 남편을 둔 50후반 주부 C씨는 자녀들을 결혼시킨 후 뒤늦게 붓을 들었다. 그는 미술학과 출신도 아닌 문외한이다. 친구들의 강력한 충고에 따라 큰 손주의 양육도 거절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서운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이때 흔들리면 평생 자식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C씨의 손을 잡아 끌었다.

집안에 난생 처음 자신의 그림 작업실을 꾸미고, 혼자 있는 시간 대부분은 캔버스 앞에서 보낸다. 알음알음으로 비슷한 부류, 비슷한 취미를 가진 동년배 주부들과 동호회를 만들어 수시로 스케치 여행도 떠난다.

다들 강남권 고급 아파트에 거주, 언제 어디로 떠나든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는 친구들이다. 이외에도 요리나 전문가급 꽃꽂이 과정, 컴퓨터, 디지털 카메라 촬영 동호회, 요가 명상 등 다양한 문화센터를 드나드는 동년배 부인들을 만난다. C씨에게는 인생 제2막이나 다름없는 무대가 열렸다.

신 유한부인들은 크게 지식추구형과 재력가형으로 나눠진다. 지식추구형은 주로 외형적인 투자보다는 정신적 내실에 관심이 높다. 명문대 교수 남편을 둔 52세 주부 D씨의 말.

“학부모로 만나 자연스레 친해진 E씨의 신상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는데, 국내 굴지의 기업인의 부인이었다. 우리는 백화점에 가서 2백만원짜리 옷 하나 사는데도 몇 번을 고민한 뒤 어쩌다 사는 것이 고작인데, 재력가의 부인들은 몇 백만원짜리 옷도 그 자리에서 탁탁 사는 걸 보고 속으로 놀란 적이 있다. 남편의 직업상 남들은 우리를 상류층 부인들로 보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사실 여느 서민과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주부일 뿐이다.”

재력가형 장년 주부층의 경우, 이들의 경제력과 특권의식을 이용하려는 기업들로부터 가장 중요한 마케팅 타깃이 되기도 한다. 젊어지고 싶어하는 심리를 공략한 국내외 최고급 브랜드의 고가 화장품과 성형 붐을 비롯해 VIP용 특별투신상품, 수십만원짜리 고가 공연 티켓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소비권력의 주체세력으로 사실상 인정받고 있다.

■ 고급 소비 심리로 기업 마케팅 타깃

하지만 한 켠에선 이같은 부나 명예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또한 찾아 든다.

나이가 가져다 주는 어쩔 수 없는 세대간의 단절감과 상실감, 공허감, 부모나 아내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게다가 폐경기와 함께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우울과 절망감까지 겹쳐 든다.

마치 함께 있던 가족들이 다 어디론가 사라진 뒤 홀로 빈 둥지를 지키고 있는 듯한 ‘빈둥지 증후군’이 나타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외형상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이유로 ‘배부른 고민’으로 무시되거나 방치되기 일쑤다. 본인에게는 극단적인 경우 생존의 문제로까지 이를 수 있을 만큼 파괴력이 내재된 갱년기의 전형적인 증세이지만, 심지어 가족들조차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업가 남편과 사업가 아들을 둔 50대 주부 E씨는 남편에게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 “ 대체 뭐가 부족해서 울고짜고 그 난리냐 ”는 이야기다. 아무리 “나는 위로가 필요하다”고 울며 호소해도 남편은 오히려 더 짜증을 내며 자리를 옮겨버린다.

한국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이들 주부가 가장 억울하고 속상할 때가 ‘갖고 싶어하는 것 다 사 주고, 하고 싶다는 것 다 하게 해주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냐’고 할 때다. 기본적으로 중년기 여성의 심리적 상황에 대한 가족의 이해와 다독임이 필요하다.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한 주부에 비하면 배부른 고민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각자의 환경에 따라 상류층 주부 역시 그들 입장에서 치르는 정신적 공허감과 고통 또한 그 강도는 경중을 가를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부부의 중년기는 이후 노년기와 직결되는 시기이므로 행복한 중년기를 만들어가려는 노력만이 행복한 노년기를 보장해 줄 수 있다. ”

■ 20년 이상 부부 이혼, 10년 만에 6배 증가

자칫 일탈의 문제가 빚어지는 것도 이같은 정신적 취약기에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6년에는 결혼 20년 이상의 부부의 이혼 건수가 31%를 차지, 지난 10년 사이 6배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 연령 단위로는 2005년 통계 기준, 40~44세 (여성인구 1천명당 11.2%)의 이혼건수가 가장 높다. 황혼이혼의 등장에 이어, 요즘엔 자녀를 대학에 입학시킨 뒤 이혼하는 '대입 후 이혼'도 늘고 있다.

배우자의 외도를 비롯해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발화점은 주부 자신의 정체성과 사실상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2001년 제기된 이혼 관련 소송 중 배우자의 외도로 인한 건수는 조사 전체 건수의 과반수인 59.2%에 달했다. 지난해 경우 그 비율은 22.5%로 오히려 줄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부당한 대우'의 이유로 제기된 이혼 소송은 전체의 35.8%를 차지했다. 배우자의 언어폭력뿐만 아니라 단순한 '무시당함'의 이유가 포함된 수치다.

2003년에는 '배우자로부터의 부당한 대우'라는 이유로 이혼소송이 제기된 경구가 전체의 60%를 차지했다. 한마디로, 한 인간, 한 여성이자 가족의 소중한 한 구성원으로서의 존재로 존중 받지 못한 데 대한 불만과 고통이 가정불화와 이혼 순으로 진행된 셈이다.

남편이 건설업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해 대단한 재력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57세 주부 L씨는 "가족과 함께 있다보면 내 자신이 가족 안에서 유령의 존재같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고 토로했다.

'너무나 편안하다보니 겉으로 무덤덤해 보이는 것 뿐'이라는 남편의 대답은 오히려 L씨의 공허감과 화를 더 부추길 뿐이다.

연세유앤김 신경정신과 유상우 원장은 특히 이맘때를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조량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10월말부터 12월 무렵 중장년기 주부들의 우울증이 악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폐경기를 맞은 경우 여성 호르몬의 분비량 변화로 인한 생물학적인 작용도 이들의 정신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특히 평소 조용하고 인내심이 많으며 순종적인 타입의 주부들의 경우가 가장 위험하죠. 그동안엔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무조건 참고 내색 않던 갈등과 불만이 누적된 채 중,장년기를 맞게 되면 누군가 조금만 건드려도 바로 폭발해버리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극단적인 경우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는데, 그제서야 가족들이 '그렇게 힘들어 했을 줄이야…'하고 각성하곤 합니다. "

유 원장은 또한 " 메신저나 핸드폰 문자메시지 등 1대1의 개인적인 통신 수단이나 웹사이트, 채팅 사이트 등의 발달로 이 시기의 주부들 누구든 손쉽게 외도로 돌파구를 삼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며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류층 주부들의 경우 더욱더 쉽게 유혹에 노출돼 있다"고 말한다.

"남편의 외도시 약 70, 80%의 경우 용서와 화해로 수습되지만 주부 측의 외도가 문제시 된 경우에는 거의 이혼이라는 파국을 맞는다"고 유 원장은 전한다.

강학중 소장은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끊임없이 한 가정의 아내 또는 엄마로서 그 존재가 여전히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든 전화로든 쪽지로든 끊임없이 표현해주며 그 존재감을 계속 일깨워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반적인 사회의 시선 그대로, 물질과 명예를 모두 가진 신 유한부인들. 중장년기의 미로 속에서 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물질적인 포만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 2004년 제일기획이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장년 세대의 행복지수는 58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방에 사는 중상층 가정의 주부'들로 나타났다. 경제력이나 학벌, 직업이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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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