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시험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토플대란'까지 발생사교육시장 과도한 확대·영어점수 거품 등 폐단 많아2009년부터 실시되는 국가주도 시험 성공 여부가 관건

‘토플, 토익으로부터의 독립!’

‘우리나라가 언제 토플, 토익의 식민지였나?’하고 의아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수많은 한국인들이 토플과 토익에 목을 매고 그 점수가 영어실력의 절대 잣대, 나아가 취직과 승진 등 출세의 열쇠처럼 군림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토플, 토익 전성시대가 머지않아 막을 내릴 조짐이다. 정부가 2009년부터 국가 주도의 영어능력인증시험을 도입하기로 하는 등 토익ㆍ 토플 지상주의에 대한 국가적 반성과 제동이 크게 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간 차원에서 토종 영어시험을 개발하는 등 토플, 토익에 대항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역부족인 상황에서 정부가 본격적으로 대안 마련에 나섬으로써 토익 토플시험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더 나아가 국내 영어능력시험 시장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됐다.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일단 사회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토플, 토익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가 빚어낸 토플 대란, 주최기관의 고압적이고 불친절한 자세, 영어실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시험방식 등 부작용과 폐해가 여간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플, 토익의 ‘이상 과열 현상’이 극성을 부리면서 ‘왜 영어 공부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토플, 토익 점수는 몇 점인가?’라는 물음이 그 자리를 파고 들어갔다. ‘영어성적이 곧 권력인 대한민국’, 그 중심에 토플과 토익이 있다. 입학과 졸업 취업과 승진이 모두 영어성적, 거의 대부분이 토플 토익 점수에 따라 좌우된다.

외고, 국제고 등 각종 특목고와 대학은 입학전형에 토플 점수를 비중있게 반영하고, 임용시험이나 자격시험, 입사시험 등에서도 토플점수가 중요시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응시자들은 점수를 올리기 위해 머리를 싸맬 수 밖에 없고 학원, 교재 등 관련시장은 과도하게 팽창하고 있다. 시중에 토플 토익 학원이나 관련 교재들은 소비자가 선택하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우후죽순으로 뻗어나가면서 과당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토플 토익 공화국’에서는 초중등생까지 시험응시에 가세해 광풍의 폐해가 사교육비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학교 교육 과정에 비해 훨씬 난이도가 높은 토플 시험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골칫거리다. 특목고에 보내기 위해 고액 과외도 마다하지 않고, 어른들이 가득한 토플 학원에 중학생 반이 따로 만들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심지어 초등 학생들까지 토플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부 한 관계자는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 사이의 학생들이 토플 점수를 높이기 위해 ‘토플 관리형 유학’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 영어 공교육 과정과 맞지 않는 토플 시험은 고스란히 가계의 사교육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토플 토익 시험에 응시한 사람이 지난해 전체 영어시험 응시자 중 76.4%인 206만 명을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2000년 1만 명에 불과했던 초,중등학생 응시자 숫자가 2006년에는 56만 명으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토플, 토익 광풍은 결국 사회적인 소란을 야기한다. 지난 4월 엄청난 규모의 응시자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토플시험 인터넷 접수 창구가 일시에 마비돼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한국의 토플 대란’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화제거리다.

미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토플 토익 대란과 관련, “한국 사람들은 보다 쉽게 영어시험을 보기 위해 홍콩이나 도쿄 방콕 등으로 시험원정까지 떠나고 있다”고 비꼬았다.

토플 토익은 시험내용을 차치하더라도 운영상에 많은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국내 대행기관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이 발생하면 미국 본사(ETS) 핑계를 대며 늦장 대응하기 일쑤다.

국내 영어시험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 그런지 응시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고 불친절하기까지 하다. 응시자 수가 늘어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해 9월 시험방식을 인터넷을 통한 IBT(Internet Based Teat)로 바꿔 응시 기회를 줄인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 결과 ‘토플 접수 대란’이 일어났고, 들쭉날쭉한 시험일정 변경으로 밤새 컴퓨터 앞을 지키며 응시신청에 매달려야 하는 ‘토플 폐인’까지 생겨났다.

유학을 준비하는 신모(28. 여)씨가 겪은 악몽 같은 체험담. 올 초 신 씨는 서울 신촌 집 근처에 바로 토플 고사장이 있는데도 치열한 경쟁으로 응시신청 자체가 어려워 경기 이천에 있는 고사장까지 가서 토플 시험을 봐야 했다 오후 5시 시험을 위해 4시간 전에 집을 나왔지만 초행길에다 교통체증까지 겹쳐 6시가 훨씬 넘어서야 고사장에 도착했다.

이미 시험은 시작했고 신씨는 시험을 못 봤지만 환불도 안 되는 상황이라 응시료 170달러를 고스란히 버리게 됐다 신씨는 그날 시험 응시자들이 다들 늦는 바람에 ETS측에서 시험 시작을 1시간 늦췄고 결국 6시에 시험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학원에서 토익수강을 받고 있는 학생들.

또 다른 토플 응시자 김모(31. 남)씨는 지난 10월3일 토플 시험을 보다가 리딩 영역에서 오류가 발생해 ETS측에 항의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답변은 한 달이 넘게 깜깜 무소식이었다. 전화도 해봤지만 통화는 어려웠고 결국 또 다시 토플 시험을 치러야 했다.

응시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까지 발생하고 있다. 지난 10월 토익성적 공식 발표일을 앞두고 인터넷 토익시험정보교환 사이트에 시험성적이 송두리째 공개됐다.

수험번호만 알면 다른 사람의 정보 조회가 가능해 더 큰 문제였다. 점수는 물론이고 응시자의 사진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가 무방비 상태에서 노출됐다. 시험을 주관하는 한국토익위원회는 10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치에 나섰고, 그 사이 68건의 성적표가 출력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달에는 토익 점수 발표일에 서버가 다운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점수 확인 홈페이지 오류로 응시생들은 유료 ARS 전화 확인에 몰렸지만 이마저도 통화량이 폭주해 접속하기 어려웠다. 이력서 제출이 급한 취업 준비생이나 고시생은 성적표 제출이 늦어졌고, 끝내 점수 확인이 안돼 이력서 마감을 못한 피해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한국토익위원회는 사과는커녕 해명에 급급한 태도를 보였다.

토익, 토플 시험으로 인한 국부의 낭비와 유출은 현재로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당장 가격책정이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응시자들은 특히 성적표 재발급 비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다른 시험증명서나 졸업증명서는 장 당 1,000원 안팎인데 비해 토익시험성적표 재발급 비용은 3,000원이라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응시자들은 재발급 수수료 인하운동까지 제안하고 있다

토플 토익 시험성적의 실효성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벌어져 왔다. 토익, 토플 점수가 실제 영어실력과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푸념이 당장 기업실무 현장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많은 기업과 기관 등이 입사자의 영어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자체 보완책을 내놓고 있다. 토플 토익 성적은 입사지원의 최소 조건으로만 보고, 실제 업무에 필요한 회화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따로 마련한 시험이나 인터뷰, 토론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9월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국내외 기업 695개를 대상으로 ‘영어면접 실시여부’를 조사한 결과 외국기업의 62.2%, 대기업의 60.7%가 영어면접을 치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각급 학교의 입시전형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현재 중학교 2학년생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2009학년도부터는 외국어고 등 특목고 입시에서 토플 성적으로 입학하는 특별전형이 사라진다.

이같이 토플 토익의 아성에 균열이 가고 있는 가운데 교육부는 지난 7월 2009년부터 국가가 공인하고 주도하는 영어인증능력시험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해 결정타를 먹였다. 이 시험의 도입과 관리를 위해 전담기관인 한국영어능력평가재단이 내년에 설립될 예정이다.

영어능력인증시험의 대 변화가 예고되면서 영어교육시스템과 관련산업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특히 영어학원 등 관련시장이 새로운 국면에 대비하는 상황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관건은 국가인증시험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느냐에 있다. 국가가 도입하는 인증시험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 경우 대한민국은 영원히 토플 토익의 노예로 남게될 공산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중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토플, 토익 같은 외래종 영어시험을 도입하기 전에 먼저 국가 주도로 영어능력인증시험을 도입한 덕분에 외풍을 막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앞뒤가 뒤바뀌어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영어교육정책연구센터장 진경애 선임연구원은 “다른 아시아 주요 국가들은 처음부터 국가 주도의 영어시험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놓고 영어시험을 실시했지만 한국은 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계속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공신력과 전문성을 갖춘 국가인증 시험을 통해 학생과 성인들의 혼란을 덜고 정확한 영어공부 방향을 제시한다면 토플 토익 의존도는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 TOEIC (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
vs
TOEFL (Test of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미국 ETS(Educational Testing Service, 미국 교육평가원)에 의해 개발된 토익과 토플 시험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어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1979년 개발된 토익 시험은 82년 국내에 도입된 이후 입사나 고시, 각 대학 졸업인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반면 1964년 개발된 토플 시험은 유학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치러야 하는 시험으로 84년 국내에 도입됐다. 현재 해외의 4,500여 개 학교에서 외국인 입학 전형 시 토플 성적을 요구하고 있다. 국내 토익 시험은 한국토익위원회에서 토플 시험은 한미교육위원단이 대행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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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