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프로젝트' 세워 불모지 개척… 김연아를 세계정상으로 이끈 일등공신국내·국제대회 참가 경험 늘려 한국빙상 수준 업그레이드이건희 삼성회장의 동계스포츠 철학과 헌신적 투자도 큰몫

박성인 빙상연맹 회장.
‘김연아 피겨 요정에서 피겨 여왕으로 등극, 그리고 2008 베이징 올림픽까지…!’

한국인 최초로 빙상 피겨 부문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며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를 새로 쓴 김연아,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왔을까?

부상과 고통을 이겨가면서 연습과 훈련에 매진한 그녀의 노력과 자질, 타고난 체격과 빼어난 미모 등등…. 당연히 그녀가 거둔 훌륭한 성적과 성과의 가장 큰 밑바탕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꼽는다면?

화려한 성공의 뒷켠에는 그녀를 뒷받침한 빙상연맹과 그리고 빙상연맹의 최대 후원자인 삼성의 노력이 숨겨져 있다. 더 나아가 실상 김연아의 탄생과 성장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박성인 빙상연맹 회장의 합작품이 적잖은 부분을 장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7년의 어느 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박성인 당시 대한레슬링협회 부회장에게 의미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하계 스포츠 종목의 기본은 육상입니다. 동계 스포츠 종목의 기본은 빙상이죠. 우리 나라가 8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으니 앞으로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려면 빙상 종목을 반드시 육성시켜야 합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 빙상은 쇼트트랙에서만 빛을 발하던 시기. 스피드 스케이팅은 물론, 피겨에서도 올림픽이나 세계 대회 메달권 입상은 상상도 못하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빙상연맹은 내홍과 잡음으로 바람 잘날 없던 상태.

이 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동계 올림픽 유치를 앞서 생각했다. 한국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해야 하는데 국제 사회에서 소위 ‘명함’을 내밀려면 적잖은 ‘명분’이 필요했던 것. 즉 한마디로 동계 스포츠의 기본인 빙상 3개 종목에서 ‘기본적인’ 성적을 내야 대회 개최를 주장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일찌감치 이를 내다본 이건희 회장은 빙상 발전을 위해 이때부터 빙상연맹을 맡아 지원하고 나섰다. 그리고 당시 레슬링연맹 부회장이던 박성인 현 빙상연맹 회장을 긴급히 불러들였다.

“명심하세요. 국내 빙상 스포츠의 발전 없이는 동계 스포츠의 발전은 없습니다. 그리고 동계 올림픽도 개최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이 박성인 빙상연맹 회장에게 당부한 이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빙상연맹 직원들에게 모든 업무의 기본 초석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박성인 회장은 처음에는 아찔하기만 했다. “정말 열악했습니다. 와 보니 예산은 몇 푼 안됐고 직원 봉급도 못 주는 등…” 우선 연맹의 사업계획부터 새로 짜야겠다고 생각한 박 회장은 획기적 마스터 플랜 수립 수립에 착수했다.

이후 탄생한 것이 ‘밴쿠버 프로젝트’. 단기간에는 안되지만 적어도 2010년 열리는 동계 올림픽부터는 빙상의 피겨와 스피드 종목에서도 우리나라 선수가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된다는 ‘소박한’ 꿈에서 세운 계획이다.

이 꿈을 위해 구체적으로 빙상연맹이 착수한 1차 과제는 국내 빙상 대회의 활성화와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의 참가. 지금도 한 해에 국내 빙상 경기만 25회나 열리고 있으며 빙상 선수들은 한 해 최고 30개 대회까지 국제 대회에 출전하며 국제 경험과 실전 감각을 익히고 있다.

그리고 시도된 것이 빙상 스포츠 저변 확대를 위한 꿈나무 발굴ㆍ 육성이다. 박성인 회장 부임 후 상금과 장학금을 내걸고 꿈나무 대회를 신설, 체계적인 유망주 키우기에 돌입한 것이다.

이 대회 입상자 중 한 명이 바로 김연아. 피겨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낸 그녀는 꿈나무 대회를 3연패한 뒤 2003년 국제 주니어대회에서 우승하며 비로소 빙상연맹 관계자들에게 기대를 심어주기에 이른다.

재원과 지원에서 한계가 있는 빙상연맹은 이 때부터 ‘선택과 집중’ 전략에 들어갔다. 가능성이 높은 자원(김연아)에 최대한의 노력을 투입,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마스터 플랜인 셈. 지금까지 현금으로만 2억7,000만원 이상의 보조와 해외 상주 훈련을 위한 지원에 아낌없는 투자를 해오고 있다.

김연아 역시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성적으로 화답했다. 시니어 대회에서 ‘피겨 여왕’으로 정상에 오른 이후 피겨 최고수들만의 대회인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2연패를 해낸 것. 나아가 내년 밴쿠버 올림픽에서까지 국내 빙상 사상 최초의 피겨 금메달까지 기대케 하고 있다.

4년 전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끝난 직후 벌어진 일화 하나.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6개를 휩쓴 한국 빙상의 비상을 지켜본 일본 취재진들이 느닷없이 빙상연맹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니혼게이자이 신문, NHK, 도쿄TV 등 여러 취재기자들이 한국 빙상 발전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아 보기 위해서였던 것. 당시 일본은 빙상에서 싱글 피겨 부문 단 1개의 메달에 그쳤다.

“여기가 진짜 빙상연맹 사무실 맞스므니까?” 일본 취재진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온 첫 마디다. 좁은 공간에 낡은 집기들, 초라한 사무실 모습에 몇 안되는 직원들까지….

올림픽 빙상 종목에서 금메달을 6개나 딴 나라의 빙상협회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들. 성적에 걸맞게 제법 규모 있고 근사한 사무실을 기대한 것과는 딴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 기자들은 한 번 더 놀랐다. 다름 아닌 ‘밴쿠버 프로젝트’ 안을 협회측이 보여준 것. 수십페이지에 적힌 이 보고서에는 대한민국 빙상 발전의 계획과 추진방안들이 고스란히 수록돼 있다.

그리고 수년 전부터 작성된 이 계획은 놀랍게도 김연아, 이강석 등 성적에서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대한민국 빙상의 힘은 외형상 규모가 아니라 이런 마스터 플랜에 있다”며 이들은 감탄사를 연발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이 얘기는 국제 스포츠계에서 ‘전설’로 통한다.

선수육성과 대회 개최, 국제 대회 참가 등 실전 위주의 빙상연맹 운영에는 희생도 뒤따른다. 다름 아닌 협회 운영비 등 경비를 최소화한 것. 대신 1년 예산의 85% 이상을 경기력 향상에만 투자했다. 직원 숫자도 겨우 6명에 불과해 이들은 야근과 휴일에도 일하기 일쑤다.

조직운용의 효율을 극대화한 빙상연맹의 이 같은 운영시스템과 노력은 체육계 내부에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빙상은 기업이 지원을 해도 선수 유니폼 하나에도 광고 로고 하나 붙이지 않습니다.(한 해 30억원 가까운 빙상연맹 경비 중 8억~9억원을 제외한 모든 금액은 전액 삼성 지원금을 포함해 회장단으로부터 후원받고 있다.) 그러니 모를 수 밖에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국 빙상 스포츠의 발전은 선수 개개인의 피나는 노력과 코치진의 지도력, 학부모의 정성, 그리고 빙상연맹의 열정에다 박성인 빙상연맹 회장의 노하우, 이건희 회장의 동계스포츠에 대한 철학이 어우러진 결정체라고 봅니다.” 한 스포츠 관계자는 “국내에서도 외국에서처럼 스포츠 스타의 탄생과 배경에 공헌한 기업이나 후원자를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잡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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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