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역사에도 놀라운 대약진… 위성불패 신화까지 세워

무궁화 1호 발사장면.
우리나라의 인공위성 개발 역사는 선진 우주개발 국가들보다 30~40년이 늦다. 첫 한국 위성인 우리별1호 발사를 기준으로 치면 불과 15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처럼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빠른 발전을 보이며 이제껏 개발한 위성들이 모두 발사에 성공, 한국의 위성불패 신화를 세워왔다.

인공위성 ‘우리별’ 시리즈의 제1호는 1992년 8월 11일. 프랑스령인 남아메리카 기아나 크루기지에서 발사됐다. 이는 인공위성연구센터가 영국 서리(Surrey) 대학에 11명의 한국 연구진을 보내 3년간 공동으로 개발한 끝에 거둔 결실이다. 가로, 세로 35cm, 높이 60cm의 소형위성으로, 총 38억2천여만 원의 개발비가 들었다.

이같은 성공을 지켜본 말레이시아, 태국 등이 이후 앞다투어 같은 방식으로 서리대학에 몰려들어 개발에 참여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남으로써 한국의 사례와 대비를 이루었다.

한때 국내 일각에서는 ‘우리별’ 1호가 아닌 ‘남의 별’ 시비가 일기도 했다. 외국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순수 우리 기술이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논란은 이후 2,3호의 등장과 성공으로 말끔히 종식됐다.

특히 1999년 발사된 우리별 3호는 영국식 모델을 본 딴 종전의 1,2호와 달리 설계부터 제작까지 국내 개발진이 직접 고안하고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우리별 3호부터 순수 국산위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종전의 2배가 넘는 약 80억 원이 개발비로 쓰였다.

위성체 개발의 기술력이 안정화되면서 보다 난이도를 높인 순수과학탐사용 위성개발 작업이 이어졌다. 원자외선 분광기를 탑재한 과학기술위성 1호가 2003년 9월 러시아 플레세츠크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다.

첫 교신 성공까지 다소의 난관이 있었지만, 결국 성공적으로 제 임무를 수행, 이에서 얻은 데이터를 활용한 연구 논문이 최근 학계에 발표되는 등 또 한번의 성공 기록을 더했다. 올해 나로우주센터에서 자력발사될 인공위성도 이를 뒤이은 과학기술위성 2호다.

이외에도 1995년 8월 성공적으로 발사된 통신위성 무궁화위성 1호를 비롯, 3기에 이르는 무궁화 시리즈가 있다. 다목적실용위성인 아리랑 위성도 한국항공우주연구소와 미국 TRW사의 공동개발 하에 1호가 제작되어 성공적으로 발사되는 등 총 2기가 우주에 나가있다.

무게 470kg의 중형급 위성인 아리랑1호는 발사 후 한동안 실종 소동을 빚기도 했다. 발사 후 지상국과의 첫 교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지만 이후 위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

국내에서는 이미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현지에서는 갑작스런 이 ‘행방불명’ 사건으로 당시 발사현장을 방문 중이던 과기부 차관을 비롯해 담당 개발팀을 초비상 사태로 몰아넣었다. 다행히 약 13시간 반 동안 이들을 숨 막히게 있던 해프닝은 당시 미국 TRW사에 재직 중이던 이재민 박사의 긴급구조로 극적인 해결을 맞았다.

확인 결과, 문제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누군가 아리랑 1호의 위치데이터를 실수로 잘못 입력한 것. 최근 통신두절 사태로 또 한번 국내 우주과학계를 긴장케 한 아리랑 1호는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 관계자들의 속을 태운 주인공이다.

로켓의 개발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600년 전 ‘달리는 불’이라는 뜻의 화약무기 ‘‘주화(走火)’로부터 역사를 세는 경우도 있다. 현대식 로켓으로는 국방과학기술연구소와 인하대, 공군사관학교 연구진 등의 초기 연구를 거쳐 1993년 본격적인 과학관측로켓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과학로켓 1호(KSR-Ⅰ)는 서해안 안흥시험장에서 발사됐다.

길이 6.7m, 직경 42cm, 무게가 약 1.2t인 1단형 고체추진 로켓으로 지구상공의 오존 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관측장비를 탑재부에 실었다. 1998년 6월, 2단형 과학로켓 2호(KSR-Ⅱ)가 발사되었고, 그로부터 4년 뒤인 2002년 11월에는 국내 최초로 액체추진제를 사용한 과학로켓 3호(KSR-Ⅲ)가 독자기술로 개발돼 성공리에 발사를 마쳤다.

특히 과학로켓 3호 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던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1호로 인공위성을 발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의 인공위성 자력 발사 시점도 대폭 앞당겨지는 등, 국내 로켓 개발계획에 상당한 변화와 국민적 관심이 쏟아졌다.

■ 세계의 우주개발 메이저리그
양강서 다극체제로… 첨단기술 무한경쟁
미러 주도권 잡기 2파전에 유럽·아시아도 가세

1969년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

세계의 우주경쟁전을 촉발시킨 첫 주자는 러시아다. 1957년 10월 4일, 러시아는 전 지구촌을 뒤흔드는 초강도의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우주로 발사한 것이다.

지름 58cm, 무게 83.6kg의 스푸트니크 1호였다. 현대 로켓의 아버지 치올코프스키의 연구에 힘입은 우주강국 러시아의 완벽한 기습 독주였다. 인공위성 발사란 당시만해도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과학기술의 결정체였다.

한달 뒤에는 제2탄까지 쏘아 올려졌다. 앞선 1호보다 무게가 6배나 늘어난 스푸트니크2호가 개 한 마리를 태운 채 우주로 발사됐다. 역시 러시아에 의해서였다. 인간보다도 앞질러 우주여행을 체험한 이 견공의 이름은 ‘라이카’였다.

러시아의 콧대를 한껏 높여 놓은 이 스푸트니크 발사 소식은 누구보다 미국에 가장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때부터 국가대 국가의 자존심을 건 불꽃튀는 일대 추격전이 미국과 러시아간에 펼쳐진다. 몇 차례의 실패 뒤 마침내 1958년 1월 미국도 직경 15.22cm, 무게 4.82kg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늦으나마 미국의 체면을 살려 준 이 위성에 대해 러시아는 ‘바짝 마른 소시지’라 부르며 놀렸다. 그러나 미국 역시 연이은 후속타로 직경 16.3cm, 무게 1.5kg의 소형위성을 발사, 성공함으로써 러시아와 선두 다툼을 벌였다. 이때에도 러시아측에서는 이 위성을 ‘자몽’이라 부르며 애써 평가절하했다.

사실상 러시아는 당시 미국에게 감당키 어려운 우주 라이벌이었다. 얼마 뒤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라는 이름을 세계인의 뇌리 속에 각인시킨 보스토크 우주선의 세계 최초 유인비행, 우주 공간에서의 우주선 도킹 성공,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의 우주비행,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 등 ‘우주개발=러시아’라는 등식을 각인시키는 획기적인 기록들이 러시아에서 잇따라 터져 나왔다.

1959년에는 달을, 이듬해에는 금성을, 1971년에는 화성에까지 우주선을 보내 무인 착륙 또는 근접 거리에서 이들 천체를 관측하는데 성공한 것도 러시아였다.

그러나 이같은 일방적인 독주는 1969년 7월 미국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성공하면서 대반전을 맞게 된다.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딛던 순간, 비로소 미국은 ‘러시아 콤플렉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미국의 우주 패권 시대가 본격 개막됐다. 1973년 세계 최초의 유인우주실험실 스카이랩(Skylab)을 우주에 내보냈고, 1974년에는 마리너 10호(수성 관측), 1976년에는 바이킹 1,2호(화성 지질 조사)를 쏘았다.

1977년에는 보이저 1,2호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 태양계 행성들을 탐사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1981년 유인우주왕복선 스페이스 셔틀의 비행은 특히 절정기를 꽃피웠다. 적어도 5년 뒤인 1986년 챌린저호의 폭발이라는 참사를 맞기 전까지 미국은 인류 대표의 우주강국으로서 황금기를 누렸다.

호사다마일까. 챌린저호의 폭발 이후부터 미국은 오랫동안 불운에 시달렸다. 실용발사체인 타이탄 34D, 델타, 아틀라스호 등이 낱낱이 발사에 실패, 미국의 우주발사능력이 거의 마비 상태에 들어간다.

1988년 디스커버리호의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그나마 가까스로 실추된 명예회복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미 그 사이 우주개발시장의 판도가 많이 바뀌어 버렸다.

러시아는 세계 유일의 유인우주정거장 ‘미르’를 적극 활용해 우주과학분야에서 미국을 앞질렀고, 급속도로 발전한 유럽의 아리안과 중국의 장정 로켓 발사체가 인공위성의 발사 주문을 상당량 빼앗은 상태였다.

더불어 프랑스, 일본, 중국, 영국, 인도, 이스라엘 등이 잇따라 독자적인 발사체로 인공위성을 발사하면서 당초의 미-러 2자대결 양상에서 세계 우주개발전쟁의 경쟁구도는 한층 복잡해졌다.

프랑스에서는 국립우주연구소(CNES)가 주축이 되어 인공위성을 개발했고, 유럽우주국(ESA)의 아리안 로켓은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쳤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통제와 견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독자적인 인공위성 개발 및 발사를 추진, 우주개발사업단(NASDA)를 중심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이 우주개발에 뛰어든 것은 사실상 국방의 목적 때문이었다. 여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호된 시련을 겪은 중국은 초강대국들의 위협에 맞대응한다는 목적으로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과 핵폭탄 개발을 결정, 어려운 국가재정과 정치사의 격랑 속에서도 로켓 개발에 아낌없이 투자, 세계 우주개발국 대열의 상위권을 점하게 되었다. 2005년 선저우 6호 발사 성공에 이어 최근에도 창어 1호 발사 등 과거의 미-러 2자 우주대결을 방불케 하는 아시아권 우주개발 각축전을 이끌어낸 주요국이 되고 있다.

이외에도 1971년 프로스페로 X-3 위성 발사에 성공한 영국과 자국의 스리하리코타 우주센터를 갖추고 1979년 ‘로히니’ 위성 발사에 성공해 세계 7번째 인공위성 발사능력 보유국이 된 인도를 비롯해 탈리아, 캐나다,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이 속속 대열에 진입, 우주를 향한 행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북한의 인공위성 개발
'광명성' 발사성공 호들갑 떨었지만…

북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 장면.

1998년 어느 날 북한 ‘로동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화학공업성의 한택성 동무는 3일 새벽 당창건기념탑 앞마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광명성1호’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환성을 터뜨렸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머지않아 저 하늘의 별들처럼 수많은 ‘광명성’이 우주를 덮으리라는 확신이 굳어지고....>

1998년 8월 31일 낮 12시 12분. 북한이 길이 26cm, 무게 25톤짜리 3단계 로켓을 쏘아 올린 일이 밝혀지면서 동북아에서는 일대 파문이 일었다. 북한에서는 인공위성(광명성1호)이라 주장했지만, 세계에서는 이를 미사일로 해석하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일본 국회는 곧바로 대북 식량지원 중단을 결의했고, 미국은 스텔스 전폭기 편대를 괌에 파견하는 등 일대에 거센 회오리가 몰아쳤다. 당시 서울에서도 ‘우리도 북한에 필적할 미사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결국 미국 우주사령부의 정밀 추적 결과 ‘북한이 아주 작은 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리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공식 발표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맨 눈으로 광명성1호를 보고 환호했다’는 위의 ‘육안’ 목격담 역시 북한판 ‘허풍’으로 판명났다.

그러나 실제로 미사일 개발에 대한 북한의 숨은 작업이 계속 추적되면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북한의 무기 및 군사체제 연구 전문가 조셉 버뮤디즈의 2000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1960년에 지대공 미사일(SAM)을 받은 후 1965년부터 미사일 체제 연구를 본격화한 것으로 알려진다.

독특한 것은 이들의 초기 개발 비법이다. 기술이전이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군수물자 명분으로 미사일을 수입, 완제품 상태에서 부품을 하나하나씩 분해하고 다시 재조립하는 원시적인 방식으로 구조를 분석해 자체 생산품을 만들며 기술을 쌓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초기에 개발한 북한의 인공위성이나 미사일 형태가 러시아산 모델과 흡사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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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