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뉴욕 등 세계적인 디자인 중심지 경쟁력 '원스톱' 관람 기회창조적 영감 불어넣는 도시의 문화적 자산이 디자인 발전 최대 동력

한국 스포츠의 성지(聖地) 잠실종합운동장이 디자인의 메카로 깜짝 변신했다.

지난 10월10일부터 30일까지 잠실종합운동장에서는 지구촌 최초의 종합디자인문화축제 ‘서울디자인올림픽 2008’이 열렸다. 서울디자인올림픽은 2010년 세계디자인수도(World Design CapitalㆍWDC) 선정을 계기로 서울시가 디자인의 도시임을 대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행사다.

디자인 컨퍼런스, 공모전, 전시회, 페스티벌 등 크게 4개 카테고리에 걸쳐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한 서울디자인올림픽은 시공간적 제약 등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세계 디자인의 흐름과 이슈를 한 눈에 조망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특히 세계 유수 도시들의 디자인 산업과 정책 및 성과들을 선보인 ‘세계 디자인 도시전’은 디자인을 통해 문화도시로 탈바꿈하려는 서울시의 청사진과 맞물려 적지 않은 시선을 끌었다. 이 도시들의 과거 궤적과 현재 좌표, 미래 지향점은 곧 서울시에게도 훌륭한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미래 디자인 리더들 관람 줄이어

22일 오후 잠실종합운동장은 가을비가 제법 흩뿌리는 굳은 날씨에도 관람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세계 디자인 도시전’도 마찬가지였는데, 유독 반짝이는 눈망울의 젊은이들이 많이 찾았다. 틈틈이 메모하고 카메라 셔터도 눌러대는 그들은 한국 디자인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들로 보였다.

기자 역시 눈을 크게 뜨고 각 도시별 전시장이 마련된 주경기장 2층을 누볐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

패션과 향수를 전시 테마로 삼은 파리 전시장은 뜻밖에도 다소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회색 빛깔의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배경으로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수십 개의 팔등신 마네킹들이 저마다 묘한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여느 패션쇼처럼 화려한 무대와 빛나는 조명은 없었지만 전시장은 충분히 생동하고 있었다. 디자이너들의 창작열과 영혼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부터 공수된 작품들 모두는 세계적인 디자인 교육기관인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ENSADㆍ앙사드) 학생들의 출품작이다.

전시장 한쪽에 전위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장르를 알 수 없는 실험적 디자인의 옷을 걸친 한 무리의 남자 마네킹이 눈에 띄었다. 작품을 내놓은 셜리 오뚜(24)는 자신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본능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번 컬렉션은 ‘도시’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도시 환경과 다민족 주민들의 서로 다른 전통이 만든 퓨전은 새롭게 댄디한 남성을 가능케 했다. 그는 ‘멋진 의상’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변신하는 사람이다.”

이 젊은 디자이너의 말은 파리 패션산업의 경쟁력과 잠재력이 어떤 원천에서 나오는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디자이너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끄집어내는 도시, 바로 파리의 ‘문화적 자산’인 것이다.

■ 도시ㆍ건축 디자인의 금과옥조는 '조화'

네덜란드 전시장에서는 건축 및 도시계획 분야의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는 디자인을 주로 볼 수 있었다.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전문가 그룹과 업체를 대거 보유한 네덜란드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자신들이 디자인해 세웠거나 세우게 될 건축물, 조형물 등의 사진을 전시해 은근히 실력을 과시했다.

인구가 집중된 대도시가 팽창하는 현상은 네덜란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수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등 양대 도시가 인구과밀 해소를 위해 도시 경계를 점차 밖으로 확대해 왔다. 그렇다면 네덜란드는 어떤 철학과 방식으로 도시개발을 해나갈까. 답은 ‘환경과의 조화’다.

암스테르담 외곽의 신도시 알메르시가 그런 사례를 잘 보여준다. 알메르 신도시 조성사업은 1967년 첫 삽을 뜬 뒤 지난해에야 마무리됐다. 하나의 신도시를 건설하는 데 무려 40년이 걸린 것이다. ‘대충, 그리고 빨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호숫가에 만들어진 알메르시는 ‘열린 공간, 푸른 숲, 물과의 결합’을 도시개발의 테마로 삼았다. 주택 등 건축물도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워졌다. 즉 자연환경과 인간의 조화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바로 그런 철학과 도시 디자인 덕분에 알메르는 유럽에서 가장 대표적인 생태ㆍ환경도시로 손꼽히게 됐다.

건축 디자인 하면 미국 뉴욕을 빼놓을 수 없다. 슈퍼파워 미국의 심장부이자 상업, 금융, 무역의 중심지 뉴욕은 사실 세계 건축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하는 도시다. 뉴욕 전시장은 올해 건축 디자인 분야 최고 권위의 상인 ENYA(Emerging New York Architects) 상을 받은 작품들을 내걸어 시선을 모았다.

도시계획, 건축, 인테리어 분야 트렌드를 선도하는 디자이너와 디자인 기업의 창조적인 작품을 다수 선보인 뉴욕 전시장은 매우 모던하면서도 사용자 편의를 최대한 배려한 초고층건물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했다. 다만 모든 디자인이 사진 또는 도안 등의 평면적 전시에 그친 데다 상세한 설명자료가 없었던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 밀라노와 토리노가 주는 가르침

멋과 낭만의 나라 이탈리아는 밀라노와 토리노, 두 도시의 전시장을 마련했다. 밀라노는 파리와 함께 세계 패션의 중심지로 이름나 있고, 토리노 역시 2008년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될 만큼 이탈리아 디자인의 본고장으로 통하는 곳이다.

밀라노 전시장은 실물 디자인을 따로 출품하지 않았다. 대신 14개의 대형 평판 TV를 통해 밀라노의 디자인 변천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였다. 그 시공(時空)의 물결 속에는 밀라노의 일상적 디자인 세계가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이미지적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반면 토리노 전시장은 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전시된 모든 디자인이 마치 그림이나 사진처럼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를 내뿜고 있었던 것. 이곳에서는 가구, 장식품, 생활소품, 패션, 보석 등이 얼마든지 ‘예술적 경지’로 승화될 수 있다는 점을 웅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디자인 강국 이탈리아의 경쟁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정작 엉뚱한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밀라노 전시장 입구에 적혀 있는 인사말이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밀라노가 디자인의 수도가 된 것은 ‘운’이 아니라 ‘레이스’에서 이긴 결과다. 그 뿌리는 가구, 섬유, 패션, 보석 산업 등은 물론 회사, 학교, 디자이너, 디자인 잡지 등 모든 참여자들의 헌신적 노력이다.” 세계적인 디자인 도시의 명성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님을 강조한 셈이다.

■ 디자인 통해 환골탈태하는 서울

서울시는 이번 디자인올림픽에서 ‘서울시 디자인 비전’이라는 특별전시를 마련했다. 말 그대로 디자인을 통해 달라지게 될 미래 서울의 청사진을 미리 선보이는 전시다.

서울시는 현재 ‘디자인’을 시정(市政)의 핵심 슬로건으로 삼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06년 취임 당시 “도시 디자인으로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높이고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키울 것”이라고 포부를 밝힌 이래 디자인 정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왔다.

그런 노력 끝에 가시화된 결실들이 ‘서울시 디자인 비전’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됐다. 서울을 나타내는 상징물, 서체, 색채는 물론 서울디자인 가이드라인, 대형 도시개발 프로젝트까지 그 내용도 다채롭다. 첨단 디지털 기술이 어우러진 전시장 내부는 ‘천지개벽’과 같은 서울의 황홀한 미래를 앞당겨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 이번 서울디자인올림픽의 주제는 ‘Design Is Air(디자인은 공기다)’이다. 쉽게 말해 디자인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생활 속에 자연스레 스며 있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라는 의미다. 서울이 진정한 세계 속의 디자인 도시로 우뚝 서기 위해 나아가야 할 지향점도 바로 이것일 게다.

■ 권은숙 서울디자인올림픽 총감독
"디자인의 바탕은 창의적이고 유연한 마인드"


서울디자인올림픽 2008 행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기획하고 조율하며 치러낸 막후 지휘자는 권은숙 총감독이다. 권 감독은 미국 휴스턴대 산업디자인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국제적 디자인 저널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는 카이스트에서 13년간 교수로 근무했다. 권 감독은 서울시 공모를 통해 중책을 맡았다.

“대규모 국제행사를 처음 조직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지만 보람도 크네요. 준비 기간이 짧아 부족한 점도 없지 않지만 내년부터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권 감독은 서울디자인올림픽 개막 이후 모든 행사를 일일이 챙기느라 노심초사했을 텐데도 피곤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담한 용모에서 어떻게 그런 에너지가 솟을 수 있을까 했더니, 역시 열정과 사명감이 비결인 듯했다.

‘세계 디자인 도시전’을 연 것도 그의 아이디어와 국제적 네트워크가 바탕이 됐다. “세계 각 도시들이 디자인을 어떻게 활용해서 도시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지를 비교 전시하자는 게 행사 취지였지요. 당초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도시들에게는 대부분 초청 공문을 보냈는데, 많은 도시가 예산이나 시간 등 문제 때문에 안타깝게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엔 10곳 정도만 왔지만 다음에는 보다 많은 도시가 참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계 디자인 도시전’에서는 각 도시별로 특히 경쟁력을 가진 분야를 중점 소개했다. 가령 프랑스 파리는 패션ㆍ향수, 미국 뉴욕은 건축, 체코 프라하는 유리공예만을 주로 전시한 것.

그렇다면 서울은 세계적 디자인 도시들에게서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할까. “물론 각 도시에서 취할 점은 너무나 많지요. 명심해야 할 것은 디자인은 단순히 겉모습만 꾸미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디자인의 바탕이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서울시가 ‘창의시정’을 내건 것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디자인 경쟁력은 결국 마인드에서 나온다는 말인 셈이다. 권 감독은 한 가지 바람을 덧붙였다. “디자인은 특정 산업의 전유물이 아니라 창의적인 생각이 시각물로 구현되는 과정이에요. 이번 행사를 통해 시민들도 그런 점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