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독립운동사 다시보기]한때 인간답게 살기 위해 '황국신민' 꿈꾸다 식민지 모순 깨달아자유분방하고 호탕한 '모던보이', 백범 만나 민족영웅으로 거듭나

1932년 1월8일 오전 11시45분께 일본 도쿄. 경시청에서 가까운 궁성 남문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을 일본 천황 히로히토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히로히토는 도쿄 교외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된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보고 궁성으로 되돌아가는 참이었다. 길거리는 천황 행차를 구경하러 나온 군중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때였다. 갑작스런 폭발음이 울렸다. 혼비백산한 천황 행렬과 호위 경찰, 시민들이 일순 뒤엉키며 거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잠시의 소요가 지난 뒤 한 젊은 남자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방금 전 천황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범인, 그는 이봉창 의사(1900~1932)였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인 천황을 직접 겨냥하는 전무후무한 의거를 일으킨 독립투사다. 비록 당초 뜻한 대로 천황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기개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방점을 찍은 쾌거로 남아 있다.

그가 도쿄 의거를 일으키기 전 독립운동의 총본산인 상하이 임시정부는 심각한 침체에 빠져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자 독립운동의 불씨도 풍전등화처럼 흔들리고 있었던 것. 이때 이봉창 의사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의거를 감행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단숨에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우리 국민들도 대충 아는 내용이다. 아니, 이것이 이봉창 의사의 삶과 업적에 대해 우리가 아는 ‘스테레오타입’일지도 모른다. 이 의사의 의거를 서술하고 평가한 대부분의 책, 논문, 전기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사료와 기록은 많지 않다. 특히 성장과정이나 독립운동 투신 이전의 청년시절에 대한 자료는 매우 드물다. 독립운동가 중에 이봉창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한인애국단 수장이었던 백범은 상하이로 건너온 이봉창의 기백과 용기를 알아보고 의거를 기획한 장본인이다.

백범은 도쿄 의거의 전말을 밝힌 성명서 <동경작안의 진상>에서 이봉창 의사의 삶과 행적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인 설명을 해놓았다. 1년 동안 의거를 준비하면서 이 의사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백범은 꼼꼼하게 메모를 해뒀다가 애국 동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 헌사를 바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봉창 의사에 대한 그의 평가 역시 후세 역사가들의 결론과 다르지 않다. 이봉창에 대한 자료가 대부분 백범의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이 영광의 죽음! 억만인이 흠모하고 우러러보지 아니할 리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단두대상의 한 점 이슬이 될지라도 그의 위대한 정신은 해와 달과 더불어 천추에 뚜렷이 살아 있을 것이니…(중략)”

사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선열들에 대한 평가는 어슷비슷하다. 대부분 나라를 되찾는 데 개인의 삶을 초개처럼 던진 헌신과 공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인생’도 모두 비슷했을까. 집안 배경, 가치관, 생활방식 등은 또 어땠을까.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봉창 의사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대목에 천착한 역사문제연구소 배경식 연구원의 최근 저서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너머북스)는 ‘인간 이봉창’의 숨겨진 휴먼스토리를 재발견해 주목받고 있다.

기노시타 쇼조는 이봉창의 일본식 이름이다. 이봉창 의사는 창씨개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에 돈을 벌러 가서 생활할 때 일본식 이름을 썼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 일본인이 많이 살던 서울 용산에서 자란 이봉창은 자연스레 유창한 일본어 구사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그가 일본식 이름을 썼던 것은 단지 취직상의 편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책에 따르면 이봉창은 청년 시절 ‘황국신민’이 되려고 갖은 애를 썼다. 용산역에서 전철수로 근무할 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승진이나 보수에서 일본인 동료에 비해 차별적 대우를 받았던 그는 ‘진짜 일본인’이 되면 인생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꿈을 갖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도쿄 등지를 떠돌며 수년간 돈벌이를 했던 이봉창은 자신의 생각이 순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곳에서도 식민지의 ‘이류 백성’ 딱지를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땀 흘려 번 돈을 털어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을 구경하러 교토에 갔을 때는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유치장에 9일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경험을 거치며 이봉창은 식민지 백성의 한계를 직시하게 되고 서서히 조국독립의 꿈을 마음 속에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마침내 1930년 백범과의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상하이로 떠나기에 이른다.

당시 그의 심경 변화는 도쿄 의거 이후 감옥에서 예심판사에게 제출한 옥중수기 성격의 ‘상신서’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일본인으로 변신하여 살아보면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나의 본명인 이봉창으로 살기로 하고 차별이나 압박을 받아도 관계가 없는 조선인으로서 생활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때이기도 해 곧 결심하고 상해로 갔다.”

이봉창의 또 다른 면모는 근대 자본주의 향락문화를 양껏 즐긴 ‘모던보이’로서의 모습이다. 그는 도쿄 의거 바로 전날, 그 초조한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의외로 이봉창은 이날 하루 종일 골프장, 마작구락부 등에서 한가로이 놀다가 저녁에는 도쿄 외곽의 한 유곽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시즈에라는 여성과 밤을 보낸다.

이봉창은 용산역에서 근무할 때부터 술과 여자를 가까이 했다. 시절을 탓하며 울분을 풀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천성적으로 호탕한 기질 탓이 더 컸던 듯하다.

<동경작안의 진상>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의사의 성행은 춘풍같이 화애하지만 그 기개는 화염같이 강하다. 그러므로 대인담론에 극히 인자하고 호쾌하되 한번 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는 다반사였다. 술은 한량이 없고, 여색은 제한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 가곡은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봉창 스스로가 자신을 ‘쾌락주의자’로 묘사한 적도 있다. 백범에게 독립운동 투신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드러낼 때 한 말이다. “제 나이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

백범은 서른 한 살 젊은이의 말에서 가슴이 벅차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영원한 쾌락’은 자신의 목숨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이봉창의 당찬 결의, 그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노시타 쇼조, 모던보이, 독립운동의 영웅. 전혀 조화될 것 같지 않은 이 세 가지 단어는 한 인간 이봉창 안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저자는 “이봉창은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개성이 있다.(중략) 그래서일까, 이봉창의 이야기는 독립운동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유독 아프다”고 고백한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모순이 얽히고 설켰던 그 암울했던 시절, 이봉창은 마치 바람처럼 살다간 자유인이 아니었을까.

■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저자 배경식씨 인터뷰
"판에 박은 독립운동가 연구 그만둬야"
항일투쟁 성과 집착보다'인간'을 중심에 놓는 접근법 필요


배경식(위)
기노시타쇼조 표지(아래)

"이봉창 의사는 독립운동사(史)에 대한 '새로 쓰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입니다. 독립운동가 이봉창에게 덧씌워진 천편일률적인 신화와 허상을 벗겨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이봉창 의사의 삶을 재해석한 책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를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요약했다.

그가 생각하는 '독립운동사 새로 쓰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자리잡고 있다. 고결한 정신을 소유한 완전한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계는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성과와 공적에만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흥미진진하고 격동적이었던 그들의 삶을 진부하고 뻔한 스토리로 전락시킨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대부분 독립운동사 연구가 정부나 기념사업회 지원을 받아 이뤄지다 보니 결론이 거의 똑같습니다. '국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교훈과 공훈만을 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결과로 '살아 있는 인간의 역사'가 배제된다는 게 아쉬운 점이지요."

그의 책에서 묘사되는 이 의사의 삶은 너무나 뜻밖이다.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전형적인 독립투사의 이미지와 좀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식민지 청년으로 살아가며 '진짜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던 점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술과 여색 등 향락을 꽤나 즐겼던 점은 특히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런 행적으로 미뤄 이봉창 의사의 삶과 업적을 깎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전체적 맥락을 읽지 않고 일부 텍스트만을 애써 주목해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는 저자의 진정한 의도를 놓치는 오류다.

"이봉창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조금은 방탕하게 살았지만 어느 순간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을 진정으로 깨우치게 됩니다. 상하이로 가서 백범을 만나 나눈 수 차례의 대화에서도 '나,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지만 뭔가 하나 남겨 놓고 가고 싶다'라는 진심어린 열망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번 책을 집필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봉창의 삶에서 인간적 매력이 뭉클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죠."

배경식 연구원은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뻔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일은 이제 피하자고 제언한다. 판에 박은 듯한 영웅신화는 더 이상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감흥과 교훈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곱씹어봐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기에 '역사를 소비하는 고객'인 현대인에게 뭔가 새로운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는 인간을 연구하는 독립운동사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일반 민중의 현실과 유리된 측면이 많았어요. 앞으로는 그들의 일상생활과 고민을 드러내면서 독립운동사의 스펙트럼을 다양화하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