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해부학·수학·화학적 지식통해 예술적 편안함을 실현

오랜 전통과 뛰어난 기술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온 명품 브랜드는 고유한 철학과 깊은 정신을 담고 있다. <명품의 정신> 코너는 오늘날 ‘고가의 상품’을 대체하는 말이 되어버린 ‘명품’의 참뜻을 되새기고, ‘자본’이 아닌 ‘사람을 향한 존중’을 우선하는 명품 기업의 정신을 높이 평가, 명품이 지닌 문화적 의미를 폭넓게 전하고자 한다. 소개되는 명품은 단순히 이름이 많이 알려지거나 고가 위주의 브랜드가 아닌,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한 물건에 대하여 특정한 의미를 갖고 있는 제품이 될 것이다.

① 루이비통-여행트렁크 ② 몽블랑-만년필 ③ 페레가모-구두 ④볼보-자동차 ⑤샤넬-여성복

◇ 페라가모(Salvatore Ferragomo)
발의, 발에 의한, 발을 위한 구두


패션을 완성시켜주는 구두. 세련되거나 혹은 촌티가 나거나 하는 한 사람의 이미지는 발끝에서 결정된다. 그러나 이 ‘스타일’ 때문에 골라 신은 구두가 오늘의 외출을 무지하게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여성이라면 한번쯤 욕심내보는 하이힐은 어지간한 인내심을 요하는 거라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날 때가 있다.

아무리 브랜드 제품이라 해도 내 발에 ‘맞는’ 구두가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하기 때문. 그렇다면 굽이 낮은 구두는 좀 편안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뒤꿈치가 까지는 것은 기본, 어여쁜 뒷모습에 꼬깃꼬깃 말리고 엉겨 붙은 반창고는 ‘옥의 티’다.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벌게진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욱신거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러한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야만 비로소 나에게 잘 맞는 구두가 된다. 이에 대해 ‘발 모양이 특이해서’라고 하자니 왠지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힘들게 구두를 신어야 한다면 정말이지 신경질이 나지만 정말로 발이 편한 구두가 있으니 이런 걱정은 깨끗이 접어도 좋다.

‘구두의 명품’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탈리아 수제품, 그 중에서도 바로 ‘발의, 발에 의한, 발을 위한’ 페라가모다. 동그라니 귀여운 앞코에 금장이 들어간 리본 장식과 고리 모양의 금속 장식물로 유명한 구두. 이 구두가 유명해진 것은 ‘발의 편안함’ 때문이다.

어떻게 만들었길래 ‘발을 위한 구두’라 불리는 걸까. 그 비법이 여기 있으니 한번 꼼꼼히 따져보는 것도 좋을 듯. 페레가모가 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이다.

구두를 신었을 때 발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바로 뻐근함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심해지는 이 뻐근함은 하이힐을 신었을 때 최절정에 달한다. 발바닥도 아니고 발등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전해지는 쩌릿쩌릿함은 아무리 스타일을 위한 것이라 해도 반갑지 않다. 또 다른 대표급 통증은 바로 발바닥.

딱딱한 구두의 바닥은 반듯한 라인을 살려주지만 욱신거리는 이 느낌은 걸음걸이를 어정쩡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아픔’들로부터 발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페라가모 구두의 특징이다.

그 비밀은 바로 과학. 편안한 신발을 만들기 위해 UCLA에서 인체해부학을 전공한 페라가모는 똑바로 서있을 때 4cm 정도의 발 중심 면적에 체중이 쏠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발의 축 위에 직각으로 떨어지는 부분에서 핵심을 발견하고 축을 지지하면서 진자와 같이 발이 앞뒤로 움직일 수 있는 혁명적인 구둣골을 제작, 구두와 발의 실질적인 역학관계를 연구했다.

페라가모가 편한 구두를 만들게 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영화 스튜디오 옆 작은 구둣가게를 운영하며 주로 배우들이 신을 구두를 만드는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오랜 시간 카메라 앞에서 고생하는 배우들을 보고 무엇이 그렇게 발을 힘들게 하는지 배우들의 발을 연구했고, 편한 구두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세례식에서 신을 여동생의 구두를 사주지 못한 부모님을 대신해 구두를 만들어 준 것이 최초의 계기였다.

페라가모 구두만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성은 바로 트라메자(Tramezza)라는 제작방식이다.

편안하면서도 내구성이 뛰어난 구두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이 방법은 구두의 밑창과 깔창 사이에 늙은 소가죽(cucio)를 넣는 것으로 cucio는 방수기능을 지니는 동시에 유연함을 보장한다. 유연한 소재가 습한 날씨에도 발을 뽀송뽀송하게 유지시켜 주고 특수 접착제 처리된 실(pace)로 이루어지는 스티칭 작업은 내구성을 강화시켜준다.

이 작업은 강력한 접착제가 미세한 오차에 의해 구두 바깥쪽에 닿는 경우 얼룩의 제거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경쟁사에서는 쓰지 않는 방식이라고.

여기다 더해진 5mm의 밑창, 3mm의 첨가제, 4mm의 깔창의 쿠션효과가 좁은 공간 속에서도 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결국 인체해부학에 더해진, 수학적, 화학적 지식이 ‘구두 과학’을 실현시킨 셈이다.

이탈리아에서만 생산되고 134가지의 공정을 거치는 페라가모의 제작과정 중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오븐에서의 7일’이다. 구두의 변형을 막기 위한 특수처리과정으로 오븐에서 7일간 구두를 숙성시키는 것. 견고함은 이렇게 나오는 거다. 이래서 나온 말이 “디자인은 모방해도 편안함은 모방할 수 없다.”

페라가모는 세기를 리드하는 디자인으로도 유명하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편안함을 위해 사용된 코르크는 그야말로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을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나무, 낚시줄 등과 같은 재료와 함께 ‘신발의 재료는 가죽과 철’이라는 관념을 전환시킨 혁명적 아이디어였다.

편안하고 안락한 착용감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은 코트 웨지힐 샌들은 1936년 시판되면서 전 세계 구두제작자들로부터의 모방세례를 받는 기록을 남겼다. 발을 드러내는 것이 흔치않던 보수적인 시대에 과감한 노출로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미래파, 다다이즘과 같은 예술사상을 접목시키는 문화적 감각을 발휘, 시대를 이끄는 디자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페레가모의 디자인이 늘 과감했던 것은 아니다. ‘페라가모’의 대표주자,

동그란 앞코의 리본 장식 구두는 1978년 발표 당시의 디자인을 고수한 것이다. ‘더 경제적이면서, 스포티하면서도 엘레강스한 것’을 위해 만들어졌던 ‘바라(VARA)’라는 모델은 시즌별로 다양한 소재와 컬러, 굽 높이의 변화 등을 통해 모던함과 섹시함까지 갖췄다.

페라가모는 편안한 구두다. 연령층을 불문한 애정공세, 고객들의 평가가 이에 대한 증거이다. 이는 페라가모가 애초에 의도하고 추구했던 ‘목적’이자 ‘의지’였다. 어쩌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편안함’은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세기의 패션을 리드하는 페라가모 구두는 차가운 느낌이 들 정도로 최상으로 꼽히는 명품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 발을 어루만지는 이 구두를 보고 어찌 차갑다 하겠는가. 페레가모는 ‘구두는 원래 아픈 것’이라는 체념과 함께 희생되어온 발의 과거까지 보상해줄 것만 같다. 그러나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자칫 귀중한 본뜻을 간과할 수도 있다. 구두보다 중요한 발, 그것에 대한 존중 말이다.

좋은 구두를 신는 것은 발에 대한 예의다. 이제라도 발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 싶다면 우선, ‘스타일’에 밀려 홀대받아온 발에 사과부터 하는 것이 어떨까.



글·최유진 미술세계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