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트 선구자 백남준·홍경택의 '펑케스트라' 시리즈등 기반 제공민정기 화백·황석영 소설 '삼포가는 길' 등 그림으로 표현

예술계의 ‘크로스오버’는 진행된 지 오래다. 이질적 장르가 교차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예술간 융합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더욱 가속, 팽창하고 있다.

특히 미술에서의 장르 혼합은 신선한 충격이자 미술계의 기존 흐름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음악은 물론 문학,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장르들이 미술과 만나 복합문화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실제 음악과 미술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자극하며 각 장르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백남준’ 의 작품 세계 역시 음악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음악을 공부했던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미학(미술사, 음악사 공부)을 전공하고 졸업 논문으로 현대 작곡가 ‘아놀드 쉔베르그’에 관한 글을 작성하는 등 음악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을 보여줬다.

이후 독일 뮌헨대학에서 다시 음악사를 공부한 백남준은 그곳에서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 등을 만나 전자 음악에 관한 작업을 하면서 일상의 소리와 소음을 사용해 음악을 만드는 등 플럭서스와 같은 네오 다다 미술운동에도 동참하며 그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갔다.

백남준의 음악적 영감이 전자 음악의 영역을 전자 비전 즉, 비디오 아트로 확장 시켰고,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 있게 한 기반이 된 것이다.

백남준 작품이 담고있는 가장 큰 메시지는 ‘탈경계성’이다. 즉, 음악과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 간 경계, 예술작품과 관객과의 구분을 타파한 창의적 정신으로 이는 현대 예술의 융합주의적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음악의 선율이 느껴지는 미술 작품들은 최근 ‘홍경택’ 작가의 작업에서도 만날 수 있다.

홍경택 작가는 그 동안 ‘연필’, ‘서재’, ‘도서관’, ‘스피커 박스’, ‘곤충 채집’ 등의 시리즈로 국내외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상종가를 누려왔다. 작품 세계를 새로이 확장 시켜 나가고자 그는 2005년부터 <펑케스트라>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다.

<펑케스트라>는 펑키(Funky)/펑크(Funk)와 오케스트라(Orchestra)의 합성어로 대중음악의 멜로디와 리듬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느낌들을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화가 반 고흐,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팝가수 프린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함께 공존하고 여기에 나이트클럽 DJ와 팝송 가사까지 드러내는 등 홍경택의 작품은 음악, 영화, 미술 등이 융합된 퓨전의 세계를 보여준다.

홍경택 작가는 <펑케스트라> 시리즈 작업과 관련해 “어둠이 걷히고 해가 뜰 무렵에 비로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며 “대표적인 올빼미형 작가이자 실제로도 작업을 하면서 펑크 음악을 틀어놓고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색과 문양을 구상한다”고 전했다.

문학 역시 현대의 미술 언어로 재탄생 해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문화적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3- 홍경택 <펑케스트라 - 박찬욱>
4- 홍경택 <케서린 제타존스>
5-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을 소재로 한 민정기화백의 작품
6- 백남준 <존케이지의 현악기를 위한 26.1.1499>

‘민정기’ 화백의 황석영 소설 <삼포가는길>, <장길산>, <오래된 정원>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이라는 동인에서 활동할 당시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를 동판화 13점으로 제작했던 민정기 화백은 황석영 작가가 신문에 <오래된 정원>과 <손님> 등을 연재할 때 삽화까지도 도맡아 제작한 바 있다.

전라남도 장흥이 고향인 ‘김선두’ 작가는 동향의 소설가 이청준의 작품 <병신과 머저리>, <별을 보여드립니다>, <당신들의 천국> 등을 소재로 그림을 표현했다. 김선두와 이청준은 수 차례 함께 고향골 기행까지 하면서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도 했다.

그밖에 서양화가 ‘이두식’은 <여름사냥>, <객주>, <화척>, <홍어> 등 김주영 작가의 작품을 그림으로 표현했고, ‘박향률’ 작가는 <사랑>, <꽃 피는 저녁>, <별똥별> 등 정호승 시인의 시를 화폭에 담았다.

한편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작가들의 시와 소설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미술 작품들이 한 자리에 모여 주목을 받고 있다. 거제문화예술회관이 개관 5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문학, 그림으로 만나는 행복>전시가 그것으로 문학과 미술의 접목을 통해 다원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복합 문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하고자 했다는 게 주최측의 설명이다.

전시에서는 청마 유치환을 비롯해 김기림, 김유정, 김정한, 백신애, 이무영, 임화 등 거장 7인의 문학작품을 현대미술로 펼쳐보인다.

이무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흙의 아들 김영감은 ‘이 인’의 작품에서 묵향이 빚어 내는 강한 필선으로 흙내음 가득한 우리 땅을 지키는 파수꾼 이미지로 새롭게 태어났고, ‘오원배’ 작가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김기림의 시를 테마로 초현실주의적 화법을 통해 현실과 관념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대의 도시적 생존방식을 표현했다.

또한 모더니즘 미술에 나타난 숭고함과 엄숙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최석운’ 화백은 1930년대 우리나라 농민들의 비참한 삶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담은 김유정의 소설을 특유의 해학으로 그려냈다.

오원배 화가는 이와 관련해 “종래 문학작품의 표제나 형식을 이미지화 하는데서 탈피해 작가 정신과 작품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했다”며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데서 나아가 작가와 작품의 온전한 의미를 전하는 것이야 말로 문학과 미술의 진정한 소통”이라고 말했다.

장르적 경계가 낮아지고 다른 장르와 융합, 지평을 넓혀가는 문화의 탈경계 현상은 세계적 흐름으로 미술은 그 중에서도 속도와 깊이에서 두드러진 약진을 보이고 있다.



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