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상호교류, 뮤지컬이 검증 다리 되기도

춤과 영화는 각각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총아로 불릴 만큼 다른 차원에서 발전해왔지만,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데에선 공통점을 지니기도 한다. 춤과 영화는 그 관객층도 달라 적극적인 교류의 장은 마련되지 않았지만, 각각의 장르가 가지는 한계는 서로의 매체를 통해 보완되고 때로는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많은 춤 작품들이 영상으로 옮겨졌고, 영화에선 끊임없이 춤을 다루며 종종 춤 작품을 통째로 영화로 옮기기도 했다. 춤과 영화의 상호교류가 매끄럽지 못할 때는 뮤지컬이라는 검증 체계가 둘 사이를 이어주기도 했다. 실제로 춤은 뮤지컬을 거쳐 다시 영화화되었고, 그 반대의 순서도 흔하게 이루어져 왔다.

■ 영화에서 소화되는 춤의 모습들

특히 춤이 적극적으로 영화의 중심에 차용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대부분의 ‘춤영화’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춤이 단지 드라마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닌, 춤 자체가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본격 춤영화로 제한하면 그 범위는 훨씬 줄어든다.

러시아의 세계적인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듯한 <백야>(1985)는 춤-영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키로프(마린스키) 발레단의 캐나다 순회공연 도중 미국에 망명한 바리시니코프는 ABT(American Ballet Theatre)의 수석 무용수로서 서방 발레계에서 또 한 번의 발레인생을 꽃피웠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 실연된 바리시니코프의 현대춤 <젊은이의 죽음(Le Jeune Homme Et La Mort’ Choreographed)>은 영화라는 매체를 활용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 빼어난 춤 공연에 다름아니었다. 바리시니코프의 다른 춤-영화인 <지젤(Gigell)>(1987) 역시 영화로 각색된 춤의 또 다른 매력을 잘 나타내준다.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독일의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를 보고 그 장면 일부를 자신의 영화 <그녀에게>에 끌어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에게>는 아예 피나 바우쉬의 작품 <카페 뮐러>로 시작하고 <마주르카 포고>로 끝을 맺는다. 남미의 탱고, 삼바와 포르투갈의 전통음악 파두가 어우러지는 <마주르카 포고>는 삶의 환희와 정열을 표현하며 영화의 분위기의 특유의 색을 덧입힌다.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2000)는 발레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자체의 예술성보다 춤 예술에 대한 성별 편견과 계급, 나아가 섹슈얼리티까지 건드리는 확장된 춤-영화다. 축구와 권투만이 ‘남자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 보수적인 영국남성의 인식과 어린 빌리가 ‘발레’라는 신세계를 개척해가는 과정의 대비는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빌리의 의지에 조금씩 마음을 바꾼 아버지와 형이 빌리의 공연을 보는 마지막 장면은 춤 공연에서는 해낼 수 없는 인상적인 충격을 준다. 청년 빌리로 성장한 ‘새로운 백조’ 아담 쿠퍼의 멋진 신체와 황홀한 도약은 탄광촌 남자들로 대변되는 보수적 시선에게 남자의 몸이란 투쟁과 파괴로써만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 마지막 장면은 공중에 떠 있는 아담 쿠퍼의 몸에 집중되며 이러한 메시지를 증폭시킨다. 춤 작품 내에서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부분을 언어와 영상으로 직접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를 십분 활용한 덕분이다.

1- 매튜 본의 댄스뮤지컬 '가위손'
2-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3-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

■ 춤으로 번역되는 영화의 언어

영화가 춤으로 옮겨진 사례는 최근 몇 년 사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그만큼 무대 위에서 표현할 수 있는 소재의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춤 작품으로의 전환은 기존 춤 관객과 영화 관객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공감대가 전제되어야 하는 제약이 따른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와 서사 형식에 주목하는 영국안무가 매튜 본은 꾸준히 영화에서 모티프를 얻으며 기존 춤 형식의 확장 작업을 해오고 있다. 매튜 본은 일관되게 초현실적 세계를 그려왔던 팀 버튼과 <가위손>이라는 교차점에서 마주치게 된다.

남성 백조를 등장시켜 동성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권력의 부패와 음모와 같은 사회 풍자에 이르기까지 기존 <백조의 호수>를 완전히 전복시켰듯이 본은 <가위손>의 우울함을 우아한 파스텔 톤으로 바꾸어 재해석시켰다. 본이 추구하는 춤 세계는 뮤지컬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쉽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다른 춤 무대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적 낭만주의를 배제하고 현대사회의 일상에 주목하며 공연의 일회적 매력을 결합시킨 본의 공연 철학은 영화적 특성을 춤에 효과적으로 융합시키고 있다.

본이 영화와 춤의 결합 차원에서 뮤지컬 형식에 의존했다면, 최근 춤으로 옮겨진 장예모 감독의 <홍등>은 본격적인 발레로 탈바꿈됐다. 발레 <홍등>은 장예모의 영화적 색채를 그대로 옮긴 창작발레인 만큼 흰색의 ‘튀튀’가 아니라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를 입고 전통춤과 경극 스타일을 혼합한 현대적 발레를 선보였다.

원작과의 비교는 모든 각색 작품의 태생적 운명이라 <홍등> 역시 끊임없이 영화와 비교당할 수밖에 없다. 특히 발레 <홍등>은 장예모 감독이 직접 연출까지 맡아 원작의 색이 작품 전반에 배어 있다.

실제 장예모 감독이 고민한 바도 여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각색된 춤 작품에 대해서 ‘무대 위의 한 편의 영화’라는 평가는 대체로 찬사로 쓰이지만, 한편으로는 독립된 춤 작품으로서의 평가를 유보한다는 함의 역시 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춤과 영화의 밀월관계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창작 시도들이다. 현대문화가 주목하는 것은 장르의 경계나 정체성에 대한 집착보다는 경계를 넘어 장르적 특성을 장난감 삼아 관객과 즐겁게 소통하는 것이다. <가위손>의 차기작으로 매튜 본이 택한 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다.

소설 속 도리안 그레이처럼 탐욕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창작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매튜 본의 작업은 활력없이 늙어가는 국내 춤 예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