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들 착취에 대한 원죄의식의 해방 승인한 상징적 사건

미국 건국 232년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제17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흑인노예해방령에 정식 사인한지 145년 만에, 그리고 흑인인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한 지 45년 만에, 노예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인 사건이 47세의 흑인 오바마에 의해 이루어졌다.

1619년 8월 미국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끌려온 20여 명의 흑인들을 시작으로 지난 4세기 동안 1200~1500만여 명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미국대륙에 이유도 없이 끌려와 평생 노예의 족쇄에 결박당해 살아왔다.

1662년 버지니아주 법원이 공표한 ‘노예’라는 공식명칭은 200여 년 만에 공식 해체되었지만 미국흑인들(African-Americans)은 여전히 사회적 차별과 인종적 멸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 44대 대통령 당선자로 우뚝 선 오바마는 흑인에 대한 이러한 관습적, 정서적 편견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 사건이자 흑인의 인권을 위해 싸운 ‘흑인 선조들’의 분신이기도 하다.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투표율과 가장 많은 지지표를 획득한 ‘오바마’에게 미국인들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국 흑인의 역사, 아니 전 세계 흑인 이산의 역사에서 ‘오바마 임팩트’(Obama Impacts)는 어떤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가질까?

19세기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라는 소설이 있다.

1995년 데미 무어와 게리 올드만 주연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은 목사 ‘아서’와 유부녀 ‘헤스터 프린’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헤스터 프린은 목사인 아서와 간음을 한 죄로 A라는 주홍글씨는 평생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는데, 그녀가 달고 다닌 A라는 주홍 글씨는 문학비평가들 사이에서 그 의미를 놓고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A라는 알파벳은 영어에서 간음(adultery)을 상징하지만, 문학비평가들은 이 A라는 글씨가 미국의 원죄를 의미한다고 해석해왔다. 즉 근본적 복음주의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신대륙에서 온 영국 청교도주의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수많은 죄악들을 저질렀다.

종교적 순결주의와 신세기 프론티어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앵글로 색슨족들은 미 대륙의 인디오 부족들을 집단학살했고, 거대한 플렌테이션을 만들어 흑인노예들을 착취했다.

백인들의 종교적 이상은 인종적 차별, 이교도들의 제거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죄악의 수단’을 동원해야 했던 미국 백인들의 원죄의식은 무의식 속에 응축되었다가 언제가 폭발할 수 있는 공포의 원천이었다. 헤스터 프린이 가슴에 달고 다니는 A라는 글씨는 한 인간의 ‘간음’에서 백인집단의 ‘착취’로 그 의미가 전환된다.

4일(현지시간) 저녁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의 당선 축하행사가 열린 미국 시카고 도심 그랜트 파크에 모인 지지자들이 오바마의 당선 소식이 전해지자 환호하면서 기뻐하고 있다.

오바마의 정치적 사건은 미국 백인들이 A라는 원죄의식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씻김굿’이라고 할 만하다. 아브라함 링컨을 비롯해서 이미 수많은 미국 백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흑인노예로 삼은 것에 대해 속죄하고 ‘아프리카 흑인’과의 평등한 삶을 선언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흑인 인권운동가들의 희생이 뒤따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착취에 대한 고백’만으로 백인들이 자신의 원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백인들의 고백은 착취의 당사자인 흑인들이 사회적 삶 안에서 스스로 정당하고 평등한 권리를 행사할 때 비로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오바마의 정치적 승리는 그러한 백인의 원죄의식의 해방을 비로소 승인한 상징적 사건인 것이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 흑인의 96%, 히스패닉의 66%, 아시아계의 62%가 오마바를 지지함으로써 인종주의적 편향을 드러냈지만, 백인의 43%가 지지했다는 사실은 사실상 미국 백인 사회가 ‘청교도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최후의 예식으로 해석할 만하다.

미국은 냉전 체계의 종식 이후 사실상 다문화, 다중심사회로 진입했다. 미국에서 청교도출신의 앵글로색슨 백인순결주의를 인구통계학적으로 주장할 만한 근거들은 매우 희박하다.

미국 전체인구에 백인과 흑인들의 인종적 비교는 8:1로 여전히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상당수 백인 혈통은 라틴계, 동유럽계, 아시아계와 섞여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역시 온전하게 흑인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구들은 전체 흑인인구에서 많지 않다.

미국 전체 인구의 인종분포는 백인이 83.5%, 흑인이 12.4%, 아시아계 3.3%, 본토 인디안 0.8%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들은 사실상 혈통적, 문화적 혼종화의 사례들을 고려할 때 큰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오바마 역시 케냐에서 온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흑인혼혈아이다.

따라서 오바마의 정치적 승리를 흑인의 승리로만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승리는 미국 다문화사회의 승리이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으로 건너 온 전 세계 이산민들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오바마의 승리로 이제 히스패닉, 아시안 등 미국 인구의 다양한 혈통을 지닌 많은 유색인 정치가들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바마의 승리는 흑인을 포함해 미국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유색인종들의 ‘화룡점정’의 의미를 가진다. 사실 미국에서 엔터테인먼트나 스포츠 계에서 성공한 흑인들은 오랜 유산을 가지고 있다.

슈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탄생 이후 미국 대중음악의 주류는 지금까지 흑인들이 주도하고 있고, 덴젤 워싱턴, 모건 프리먼, 그리고 윌 스미스 등 흑인 할리우드 스타들도 즐비하다.

미식축구, 야구, 농구 등 미국 프로스포츠에서 흑인들을 빼면 흥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중문화의 영역뿐 아니라 학계와 정치계에서도 흑인 유색인들은 비약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넓혔다. 오마바의 승리도 이러한 흑인들이 일구어놓은 놀라운 성과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승리는 ‘또 하나의 승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승리는 미국의 정신적 물질적 지도력이 비로소 흑인 유색인에 의해 행사된다는 일종의 ‘지도력의 신화’, 혹은 ‘권력의 임펙트’에서 나온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종속적 위치가 바뀌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주체 의식의 위치와 배치가 변경됨으로써 공존과 상생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오바마의 승리는 그런 점에서 ‘정치적 배치’를 변화시킴으로써 ‘권력의 순환적 흐름’을 만들었다는 데서 기념비적인 의미를 가진다.

주지하듯이 오바마의 승리를 인종주의의 우세승으로 판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실 그 스스로 말했듯이 미국인들이 오바마를 선택한 것은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미국 사회에 일대 변화가 오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흑인지도자 오마바를 선택함으로써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고달픈 삶에 극적인 반전이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또한 미국 국민의 선택은 현 부시 정부에 대한 혐오증의 결과이고 그런 점에서 공화당 우파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의 효과도 컸다.

그리고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잔존하고 있는 인종차별을 완전히 종식시킬 수는 없다. 오바마의 승리는 미국 사회가 현재 안고 있는 복합적인 모순들이 집합적으로 폭발한 일종의 ‘정치적 화산’ 효과이다. 그 화산효과가 상생과 공존을 향한 즐거운 ‘축포’가 될지 아니면 더 복잡한 파국으로 빠질 무서운 ‘용암’이 될지는 미래의 정치에 달렸다.

어쨌든 이제 오바마는 미국의 경제 위기, 세계의 금융 위기를 해결해야 할 “흑마탄 왕자”로 선택되었다. 비단 경제만이 아니라 미국과 전 지구의 정치적 분쟁과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지만, 그에게 닥친 가장 큰 급선무는 경제 회복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영역에서 오마바는 분명히 자신의 임펙트를 발휘할 것이지만, 현재의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금융과 무역 질서에 있어서는 미국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하는 배타적인 미국주의자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오바마의 승리는 세계체제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의 한 지점을 읽을 수 있는 지점이다.

세계정치 체제에서 그의 지도력이 얼마나 발휘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검증여부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선택은 스스로의 헤게모니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함께 반대로 그것의 몰락에 대한 공포를 함께 가지고 있다. 오바마에 대한 미국의 선택은 어떤 점에서는 모험이자 도박이다. 기존의 미국의 정치 체제와 세계 체제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른바 ‘오바마 임펙트’는 이제 시작되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sangyeun6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