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사적 공간 제외한 모든 일상생활 공간이 공공디자인 대상심미성, 상징성, 기능성 등 핵심가치로 통합적 이미지 창출해야

사람들은 집을 나서는 순간 불가피하게 공공(公共)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공공영역과 사적(私的)영역을 나누는 경계선은 바로 현관문인 셈이다. 집안에 틀어박혀 사는 은둔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공공영역을 경험하며 살 수밖에 없다.

공공영역을 구성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다. 도로, 철도, 버스, 지하철, 공원, 공공청사 등에서부터 교통표지판, 광고게시판, 공원벤치, 가로판매대, 가로등은 물론 심지어 휴지통에 이르기까지. 공공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처럼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은 모두 공공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공영역의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합리적으로 꾸미는 일을 ‘공공디자인’(public design)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산업디자인은 ‘아름다움과 유용성의 가치를 부각해 소비자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어떤 제품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반면 공공디자인은 ‘공공기관이 조성ㆍ제작ㆍ설치ㆍ운영 및 관리하는 공간ㆍ시설ㆍ용품ㆍ정보 등의 심미적ㆍ상징적ㆍ기능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행위와 그 결과물’을 말한다. 2006년 발의된 ‘공공디자인에 관한 법률안’에 따른 정의다.

언뜻 복잡한 듯 보이지만 디자인의 대상과 주체만 다를 뿐 아름다움과 쓰임새를 추구한다는 목적에서는 산업디자인과 거의 같다. 다만 공공디자인은 산업디자인에는 없는 몇 가지 차별적인 속성을 포함한다.

■ 쾌적함, 조화 등 공공적 덕목 강조

공공디자인 분야의 대표적 전문가인 권영걸 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서울시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은 세계 각국의 공공시설물을 비교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쓴 <공공디자인산책>이란 저서에서 공공디자인의 속성을 8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아름다움(aesthetic) ▲쾌적함(amenity) ▲조화(harmony) ▲정체성(identity) ▲가독성(legibility) ▲질서(order) ▲안전성(safety) ▲유용성(usability) 등 8가지가 그것이다.

아름다움과 유용성 정도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산업디자인에 비해 ‘공공적 덕목’들이 매우 중시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런 점을 볼 때 공공디자인은 어떤 지역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활의 편의와 심미적 만족감을 함께 얻을 수 있도록 하는 환경적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대한민국의 공공디자인은 과연 어떤가. 아니, 공공디자인이라고 할 만한 시도가 있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질문에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주변의 일상을 한번 떠올려보자. 편안한 보행을 막는 각종 장애물, 알쏭달쏭한 교통표지판, 시야를 어지럽히는 현란한 광고물, 제멋대로 지어진 건축물, 필요한 곳에 없는 횡단보도, 꼬불꼬불 미로 같은 지하철 환승역, 삭막하고 권위적인 공공청사….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지 않는가.

어쩌면 불편에 익숙해지다 못해 체념한 대다수 국민들은 정당하게 누려야 할 권리조차 망각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공공디자인은 지금껏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돼 왔다.

■ 전국 지방자치단체 인식 변화 조짐

하지만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다. 물론 아직은 미풍이지만 일부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공공디자인 혁신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디자인 코리아 프로젝트’를 향후 핵심 국정과제로 천명한 바 있는 정부의 역할도 주목된다. 이런 분위기 형성에는 2005년 말 발족한 한국공공디자인학회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그룹과 국회 공공디자인문화포럼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다. 이들은 공공디자인 관련 법제화와 공감대 형성에 많은 힘을 쏟아 왔다.

지난해 2월 국회서 열린 ‘공공디자인에 관한 법률안 입법 공청회’에서 디자인 비평가 최범 씨는 “근대화 과정에서 초래된 생활환경의 파괴를 복구하고 치유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던져진 커다란 과제”라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근대화 이후 우리 사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 주장은 왜 지금 이 시점에 공공디자인이 대두할 수밖에 없는지 그 배경을 잘 지적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우리나라가 탈(脫) 근대화를 통해 품격 있는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속도와 효율, 물량’으로 대변되는 경제논리에 짓밟혔던 일상의 문화성을 회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화적 품격은 선진국의 필요충분조건이나 마찬가지다. 문화 없이 경제만으로는 결코 선진국 대우를 받을 수 없다. 그런데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데 공공디자인은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많은 선진국들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공디자인을 통해 국가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유럽에는 공공디자인의 전범(典範)을 보여주는 국가들이 적지 않은데, 그 중 유럽연합(EU)의 중심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 나라는 전문가들이 첫손가락에 꼽는 공공디자인의 벤치마킹 모델들이다. 이들 유럽 국가의 공공디자인 정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또는 Design for People)이라는 이념적 슬로건에 그 방향성이 집약돼 있다.

■ 유럽의 '유니버설 디자인' 철학

유럽 국가의 공공장소에서 느껴지는 디자인적 이미지는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어찌 보면 배치되는 두 가치의 조화다. 가로등, 벤치, 버스정류장, 보도, 공중전화 부스, 가로판매대, 도로표지판, 휴지통 등 모든 공공시설물이 개성적인 디자인을 뽐내면서도 주변 건축물 및 환경과 잘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같은 특징을 지닌 유럽의 공공디자인을 이론적으로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 세계 관광객의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유럽의 매력에는 바로 이런 공공디자인 경쟁력도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공공디자인은 국내 공공디자인 정책수립 방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공디자인이 도시나 국가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창출하도록 통합적이며 일관적인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디자인의 혼선과 과잉으로 아니한 것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범 국가 차원의 공공디자인 법제화와 공감대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4- 가로등 디자인 시안
5- 조약돌 형상의 영국 런던시청 청사
6-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인공섬 무어인젤 내부
7-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미술관 쿤스트하우스
8- 실험적 디자인의 벤치

◇ 공공디자인의 대상 범위

▦공공공간

도시경관, 공공건물, 개방공간(공원, 광장 등)

역사공간, 특별지역(문화, 관광 등)

도시색채, 야간조명 등

▦공공시설

가로시설물(거리에 설치되는 각종 장치물, 스트리트 퍼니처)

개방공간에 설치되는 각종 장치물

▦공공정보

국가기구 상징물, 국가행사 상징물

교통안내 시스템, 옥외광고물, 관광정보 시스템

▦공공용품

공공기관 용품(내구재, 소모품 등)

공공서식류(각종 행정서식 등)

공공관리용품 등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