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티크'등 부정적 선입견 깨고 성적 다양성 넓히는 계기 마련

“전 마성의 게이랍니다.”

김재욱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주지훈에게 그렇게 수줍게 커밍아웃을 한다. 그냥 게이도 아니고 무려 ‘마성의 게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원작에서 꽃배경과 함께 느닷없이 등장하는 이 만화적 장면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긴 용감한 영화는 민규동 감독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다.

신윤복 열풍을 불고 온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선 남장을 한 신윤복을 두고 기녀(여성)와 스승(남성)이 차례로 '꽂힌다'. 남성이면서 여성인 신윤복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자유롭게 바꾼다(!).

스크린에 옮겨진 신윤복(<미인도>)은 노출의 수위를 한층 높이며 남장 여자와 춘화의 재현을 빌미로 동성애 코드를 노골적으로 활용한다.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룰 '뻔'했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폭발적인 호응은 이후 등장한 섹슈얼리티 소재 극의 한계를 확실히 넓히고 있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동성애 코드 영화들은 이처럼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대중 속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색한 시선과 무거운 분위기로 관객을 불편하게 했던 이전의 연출방식과는 사뭇 달라진 양상이다.

일례로 6년 전 본격 동성애 영화를 표방했던 <로드무비>(2002)의 포스터 홍보문구는 ‘불편한 사랑이 시작됐다’였다. 지금 쏟아져나오는 동성애 코드 영화들보다 훨씬 ‘앞선’ 영화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성애자 사회에 나서는 두려움이 한층 더 컸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2008년에 그려지고 있는 동성애 코드는 한층 ‘편해진 사랑’이다. 케이크와 남자를 같은 선상에 놓고 ‘맛을 보라’고 권유하고, 학창시절의 풋풋한 첫사랑을 소년들의 순수한 시선으로 그려내기도 하며, 심지어 역사 속 왕과 호위무사의 ‘남남상열지사’까지 다루게 됐다.

다양하게 그려지는 낯선 사랑의 방식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동성애 문화를 접하게 하며 부정적인 선입견을 버리고 성적 다양성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최근 극장가는 개봉한 지 일주일만에 50만 관객을 불러모은 <앤티크>의 힘에 놀라는 중이다. 주지훈, 김재욱 등 꽃미남 스타들의 캐스팅은 어느 정도의 흥행을 예상케 했지만 요시나가 후미의 원작만화를 거의 그대로 옮겼다는 감독의 말은 원작 팬들을 반신반의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원작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아직 게이 문화가 익숙치 않은 한국적 토양에서 원작의 강도 높은 동성애적 표현을 원작 이상으로 잘 표현했다는 평가가 많다.

연출을 맡은 민규동 감독은 이미 전작 <여고괴담 - 두 번째 이야기>(1999)에서 여고생들의 사랑을 다룬 바 있다. 당시 영화는 본격적인 동성애 영화라기보다는 학원물과 공포물이 결합된 형태였다. 하지만 자신이 밝혔듯 민 감독은 머릿속에서 계속 동성애 문제를 계속 진화시켜 <앤티크>에서는 작심하듯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동성애를 그리고 있다.

‘자연스럽다’는 것이야말로 이전의 영화들과 달라진 점이다. 이제 영화 속 ‘연인’들은 괴로워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 이유없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무게를 잡지도 않는다.

영화 '소년, 소년을 만나다'(왼)
영화 '로드무비'(오른)

<앤티크>의 중심에는 진혁(주지훈 분)의 납치에 얽힌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고, 선우(김재욱 분)를 둘러싼 동성애 이야기는 그와 맞물려 일상적인 에피소드로 다뤄진다. 동성애의 정당성 운운이 영화의 핵심이 아닌 것은, ‘동성애를 이해하자’라는 기존의 강박에서 벗어난 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 20일 개봉한 김조광수 감독의 <소년, 소년을 만나다> 역시 본격 퀴어영화지만 심각하지 않고 밝고 경쾌하게 소년들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 자신을 ‘삥뜯은’ 석(이현진)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민수(김혜성)의 풋풋한 첫사랑 로맨스는 기존 이성애 청춘물의 형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게이이기 때문에 다른 소년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년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연정을 품는 것이다. 그의 뒤를 밟으며, 그에게 뒤를 밟히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소년의 심적 변동이 15분의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농밀하게 그려진다. 김조광수 감독은 청춘 멜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퀴어 코드 특유의 독특한 설정을 가미하며 게이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첫 사랑이라 어렵고, 게이의 사랑이어서 더욱 어렵다는 현실의 고충도 화면 안에 담아낸다. 대신 영화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보다 ‘사랑’이라는 대전제에 방점을 찍는다.

때문에 영화 속 캐릭터들과 결합된 판타지들의 색깔은 시종일관 풋풋하고 달콤하다. 소년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영화에 ‘현실의 동성애자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느냐’는 이성애자 관객의 항변은 오히려 촌스러워지게 됐다.

12월 30일 개봉을 앞둔 <쌍화점>은 <왕의 남자>(2005)에 이어 왕과 그의 남자를 다루는 ‘역사 뒤집기’를 시도한다. <왕의 남자>가 장생과 공길의 애정에 초점이 모아졌다면 <쌍화점>은 야사(野史)에서나 접했던 왕과 신하(호위무사)의 사랑을 그린다는 점에서 더욱 파격적이다.

영화는 고려말 원나라 배척운동 등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공민왕과 최측근에서 왕을 호위했던 미소년 친위부대 ‘자제위(子弟衛)’에 얽힌 비사를 모티브로 은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물론 여기서도 역시 동성애 장면에 대한 일종의 안전장치로 조인성과 주진모라는 꽃미남을 캐스팅해 관객의 거부감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속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은 분명히 예전과는 달라졌지만 정치적 공정성이나 일부 마니아층만을 염두에 둔 캐스팅은 여전히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평단의 반응 역시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꽃미남들이 화면을 메우는 동성애 코드 영화들은 동성애에 대한 이성애자 관객의 거부감을 불식시키는 역할은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동성애 영화라고 단정짓기에는 무리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소재 고갈에 허덕이던 한국영화가 금기에 묶여 있던 섹슈얼리티 부분에서도 조금씩 유연한 자세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태도의 변화는 소재의 외연 확장 측면에서 볼 때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종로 변두리의 한 음습한 극장에서 남의 허벅지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더듬는 ‘호모’의 전형적 이미지는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에 따라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경직된 페미니즘 운동이나 사회학적인 계몽이 해낼 수 없었던 동성애 문화에의 관용과 이해가 일본만화와 ‘미드’를 거쳐 한국영화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