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서안화차' 뮤지컬 '헤드윅' '쓰릴미'등 동성애 소재로 흥행몰이

조선왕조실록(세종 18년 10월 26일)에는 ‘세종대왕의 며느리이자, 문종의 세자시절 두 번째 부인인 봉빈이 나인과 대식(동성애)한 사실이 발각되어 폐출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나인들 혹은 내관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던 동성애의 실체가 전면에 드러나면서 왕실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다. 이를 모티브로 한 ‘성(姓) 스캔들’을 ‘코미디’로 포장한 연극 <마리화나>가 2006년 초연한 후 해마다 재공연되고 있다.

오는 12월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마리화나>의 기존 관객들 중에 왕세자와 내관, 세자비와 나인, 나인과 나인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난잡한 관계에 거부감을 표하는 이는 많지 않다.

동성애의 접근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뿐, 공연을 보기 전에 동성애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끼’가 되고 있을 뿐이다.

거대한 게이 공동체라 불리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창작집단의 공연에 노출되어 온 관객들에게 동성애는 더 이상 낯선 소재가 아니다.

국내 창작 공연은 관객들의 수용 속도보다 다소 느린 걸음으로 동성애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마리화나>보다 3년 앞서 극단 물리가 초연한 <서안화차>(한태숙 작, 연출)는 당시까지만해도 드물던 동성애를 작품 속에 담아내 화제를 모았었다. <서안화차>에 등장하는 호모섹슈얼리티는 격앙되고 위태롭다.

부정결핍과 어머니의 직업적 성매매에 깊은 충격과 슬픔을 가지고 성장한 중국 혼혈인 상곤은 사춘기 때 만난 동성친구 찬승에게 과도한 애정을 품어온 동성애자. 사랑하는 이를 살해해서라도 영원히 소유하고자 했던 상곤은 찬승을 진시황릉의 토용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연극배우 박지일(상곤 역)의 비굴함과 냉혹함을 오가는 이중적 성격 묘사와 진시황의 영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상곤 내면의 메타포로 작용하며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응을 얻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인간에게 취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한태숙 연출가가 말한 것처럼, 동성애 자체로 다루어진다기 보다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연극적 장치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남북의 문제와 세 남녀의 사랑이 동성애 코드로 얽힌 연극 <그녀의 봄>(2006년 초연) 역시 두 남자간에 농밀한 애정행각이 오가기는 하지만 분단이라는 현실과 대비를 이루는 소재에 머물고 있다.

국내 공연에서 나타나는 동성애 코드는 이 같이 ‘금기시 된 것’의 다른 이름, 더 큰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대비적 요소, 혹은 ‘성’이라는 큰 테두리 안의 한 부분과 같이 ‘우회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달리 해외에서 수입된 라이선스 공연의 경우에는 보다 노골적으로 동성애 코드를 드러낸다. 동성애자를 희극적 존재로 부각시켜 재미를 더한다거나 ‘기존 가치에 반기’를 드는 록음악 정신이 투영되었거나 혹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여성관객이 70-80%를 차지하는 국내 공연계 현실을 비추어 볼 때 라이선스 공연의 연출적 안전장치는 필수적이다. 바로 20-30대 여성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남자배우의 캐스팅이다. 내년 2월에 공연되는 뮤지컬 <자나, 돈트(Zanna, Don’t)>는 동성애자가 다수인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3- 2009년 2월 국내 초연하는 뮤지컬 '자나 돈트'
4- 조선시대 동성애를 무대로 가져온 연극 '마리화나'

로맨틱 코미디이자 발랄한 하이틴 뮤지컬로 전략적 배치된 <자나, 돈트>에서 동성애자의 존재는 더 이상 ‘논란이나 문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2003년 오프브로드웨이의 흥행뮤지컬이었던 <자나, 돈트> 속 사랑의 매치메이커인 자나 역에는 <렌트> <연극 이> 등에서 게이 역으로 호평을 받았던 뮤지컬 배우 김호영이 히든 카드로 등장한다.

뮤지컬 <헤드윅>과 <쓰릴미>는 동성애 코드을 앞세워 대중적으로도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

<헤드윅>은 2005년 초연 당시 조승우, 오만석, 김다현 등 공연계 블루칩 배우들을 대거 앞세워 ‘안전하게’ 흥행몰이를 시작했지만 트랜스젠더 록가수 헤드윅의 삶과 록, 그 가사가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며 현재 KT&G 상상아트홀에서 오픈런 공연 중이다. <헤드윅>의 주제가 ‘사랑의 기원(Origin of Love)’은 게이 공동체의 자웅동체 신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지나 연출가의 번역을 거친 가사 속엔 ‘그 옛날 세 종류 사람 중, 등이 붙어 하나된 두 소년 그래서 해님의 아이 / 같은 듯 다른 모습 중 돌돌 말려 하나된 두 소녀 그들은 땅님의 아이 / 마지막 달님의 아이들 소년과 소녀 하나된 / 그들은 해님, 달님, 땅님의 아이(하략)’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주인공 헤드윅은 농도짙은 성적 농담이나 행위를 관객들에게 직접 자행하지만 객석에선 환호가 넘친다. 대다수가 젊은 관객이지만 중년 남성들이 적지 않은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현장의 모습은 의외로 흥미롭다.

지난해 초연, 재공연을 거쳐 내년 3월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쓰릴미>는 재공연을 하면서 농도짙은 키스와 포옹에 무게를 실었다. 매회 공연이 거의 빈좌석 없이 올려졌던 <쓰릴미>는 아이를 유괴한 뒤 살해한 두 청년의 심리와 동성애를 섬세하게 묘사했고 반복적으로 공연을 보는 매니아들은 물론 ‘18세 금’이라는 제한에 걸리는 10대 청소년들의 관심도 급증했다.

“멋진 남자배우가 두 명이나 나온다는 건 여자관객들에게 선물과도 같다”는 한 공연 매니아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장치로 호남이나 미남배우가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영화와 비슷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국내외 공연에서 나타나는 동성애의 방식은 다를 지언정, 공연 속에 등장하는 동성애 코드에 대해 전문가들은 소재고갈의 해소, 성적 억압의 탈출구,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유연성, 관객의 구미를 당기는 자극적 요소 등의 분석을 내놓는다.

내년 1월과 2월에 각각 <렌트>와 <자나, 돈트>로 두 편의 동성애 코드가 담긴 공연을 올리는 신시뮤지컬컴퍼니의 최승희 홍보팀장은 “이젠 동성애가 하나의 트렌드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한동안 주크박스 뮤지컬이 공연계의 트렌드였다고 한다면 동성애는 현재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공연 속 동성애 코드가 얼마나 진지하게, 혹은 어떤 방식으로 진전과 변화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관객들을 향해 사회적 금기와 예술적 자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공연계의 시도는 2009년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