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이미지냐 '희망의 판타지'냐

“예전에는 인생을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가 좋았는데 요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가 좋더라고요.”

공주에 사는 이경희(27) 씨는 하루 서너 편의 드라마를 매일 볼 만큼 드라마 마니아로 통한다. 그녀는 3,4년 전만해도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웰 메이드 드라마’를 선호했지만, 최근에는 욕하면서 보는 통속극이 재미있다고. 불황이 깊어지면서 이경희 씨와 같이 시청자의 드라마의 선호도가 달라지고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 이영미는 지난 2001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야망과 불황’이란 글을 통해 97년 외환위기 이후 드라마 경향의 변화를 설명한 적 있다.

당시 이 평론가는 99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줄기차게 방영됐던 선악구도의 ‘콩쥐팥쥐형’ 드라마가 극단적 경쟁과 무조건적 승리에 대한 한국인의 강박증과 피해의식의 괴로움을 드러내 시청자의 공감을 얻었다고 분석했다.

또한 물 불안가리고 성공에 집착하는 악인을 통해 시청자는 ‘사실 나도 저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비윤리적이어서 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며 자기 합리화하며 자위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10년 후 다시 불황이 찾아온 지금, ‘콩쥐팥쥐형’ 드라마가 브라운관을 잠식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앞서 올해 방영된 통속극은 경기가 상대적으로 좋던 2000년대 중반에 비해 더욱 늘어났다.

‘에덴의 동쪽’처럼 집안의 원수가 알고 보니 아버지이고, ‘아내의 유혹’처럼 남편의 내연녀는 내 친구가 되며 ‘유리의 성’처럼 가난한 여주인공은 재벌 집 시집살이에 눈물을 흘린다. 이경희 씨는 “결말은 착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즐기면서 함께 희열을 나누고 싶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불황을 맞이해 달라진 드라마 트렌드 중 하나는 ‘희망의 판타지’다. 팍팍한 현실과 대조되는 드라마 속 상황을 보며 일종의 ‘각성 효과’를 얻는 셈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오합지졸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카리스마 강한 지휘자를 만나 훌륭한 연주를 해내는 과정은 분명 불가능하면서도 감동적인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SBS 드라마 ‘식객’과 ‘바람의 화원’도 마찬가지. 재능만큼 호기심과 의협심도 강한 주인공들은 각종 난관을 헤치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마지막으로 불황과 정반대로 명품 이미지가 드라마를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클래식을 소재로 한 ‘베토벤 바이러스’를 비롯해 그림을 소재로 한 ‘바람의 화원’이 인기를 모았다.

이들 드라마는 문화예술 장르가 서사를 풀어가는 키워드가 된다는 점에서 이전 드라마와 차이를 보인다. 현재 와인을 소재로 한 SBS ‘떼루아’가 선보이고 있으며 곧 만화 ‘신의 물방울’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가 기획 중이다.

명품 드라마 출현에 대해 ‘스포츠 한국’ 연예부 이현아 기자는 “지갑이 열리지 않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최근 몇몇 드라마는 현실과 반대되는 설정으로 시청자의 대리만족을 꿈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