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20~30대 문화를 논하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미국드라마(이하 미드)와 일본드라마(이하 일드)이다. 인터넷 P2P 파일 공유가 일반화되며 본격적으로 확산된 미드와 일드는 ‘드라마는 가족과 함께’라는 공식을 무너뜨렸다.

지상파 텔레비전과 케이블의 수입 드라마 시청률 평균이 2%가 채 되지 못한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미드와 일드 유행의 진원지는 인터넷임이 분명하다. 밀폐된 공간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 보는 미드와 일드는 거실에서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전형을 깨뜨리며 청년문화를 만들었다.

미국과 일본을 보는 의식의 변화와 새로 나타난 소비 패턴, 젊은 층을 공략하기 위한 한국 드라마의 변화를 소개한다.

■ 미드는 롤 모델

‘미드’와 ‘일드’를 키워드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수백 개의 카페와 블로그가 뜬다. 마니아들은 미국과 일본의 방영과 동시에 이를 다운받아 번역 자막을 만드는 ‘무료 봉사활동’도 한다.

자막을 만들고 P2P파일로 공유하는데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는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하루 10시간 이상 미드나 일드를 시청하는 ‘드라마 폐인’이 등장한 것도 미드와 일드가 가져온 새로운 현상이다. 미드, 일드 파일을 카페에 올리면서 이에 대한 ‘관람평’을 함께 쓴다는 점에서 대중문화 연구자들은 “미드와 일드 시청자는 문화 소비자인 동시에 문화 생산자”라고 말한다.

이들은 미드와 일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의 가치관을 받아들인다. 인터넷 미드 동호회에 가입한 28세의 한 남성은 “미드를 시청하다 보면 그들의 문화나 가치관 중에서 긍정적인 면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반복 노출되면서 미국 이미지가 무의식중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리잡게 된다”고 말했다.

32세의 여성은 “미국식 농담에 익숙해지고 미국식 행동에 익숙해진다. 귀엽다며 모르는 아이의 머리를 만지거나 볼을 쓰다듬는 행동이 한국에서는 관심의 표현이지만 미국에서는 아동 추행이 될 수 있는데 미드를 볼수록 동일한 행동이라도 미국식 사고에 우선해 판단하게 된다”고 대답했다.

선호하는 외모는 일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꽃미남의 등장. 대학생 김재원(20)씨는 “꽃미남이란 단어가 나오고, 이들이 ‘대세’가 된 건 일드의 영향 때문이라고 본다. 학원물이 많은 일드는 터프한 남학생보다는 <꽃보다 남자>처럼 예쁘게 생긴 남학생들이 주로 등장한다”고 말했다.

3- '히어로' / 스틸컷 기무라 다쿠야-이병헌
4- 노다메 칸타빌레
5- ‘CSI 뉴욕’ / 온미디어 제공
3- '히어로' / 스틸컷 기무라 다쿠야-이병헌
4- 노다메 칸타빌레
5- 'CSI 뉴욕' / 온미디어 제공

■ 스타벅스와 브런치

미드와 일드는 신세대 소비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소비문화의 변화에 있어서는 장르화가 뚜렷한 일드와 미국의 전문직 드라마 보다는 미드의 칙릿형 드라마에서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식생활의 변화다. 한국 드라마의 식사 장면만큼이나 미드에서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스타벅스는 세계적인 불황을 맞아 전년 동기대비 96.5% 순이익이 급감한(2008년 4/4분기 기준) 미국의 상황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한국에서는 올 한해에만 50여개 매장이 새로 문을 열었다.

브런치 문화가 빠르게 퍼진 것도 드라마 <섹스 앤더 시티>를 비롯한 칙릿형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

드라마 속 여 주인공들은 주말 오후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으며 사생활을 이야기하고, 이런 장면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강남을 중심으로 브런치 카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청담동, 신사동 가로수 길과 삼청동 일대를 가보면 주말마다 브런치와 와플을 먹기 위해 브런치 카페 앞에 길게 줄을 선 진풍경이 연출된다.

패션에서도 일드와 미드의 영향을 빼 놓을 수 없다. 패션 브랜드 펜디(Fendi)의 바게트 백을 비롯해 에르메스(Hermes)의 말발굽 목걸이, 선명한 컬러의 마놀로블라니크(manolo Blahnik) 수제 하이힐 등 많은 상품이 미국 칙릿형 드라마를 통해 국내 여성들에게 소개됐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목걸이는 인터넷 사이트 ‘다음’와 ‘프리챌’의 Carri 숍 인기 품목이었고, 에르메스 말발굽 목걸이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순식간에 품절된 적이 있다.

여성이 좋아하는 액세서리 아이템이 보석에서 가방과 구두로 바뀐 데도 이들 미드의 영향이 크다.

최근 한국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여자 연예인들은 자신의 키 보다 더 큰 신발장에 수 십 켤레의 구두를 수집해 공개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돼있다. 올해 개봉된 영화판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가 결혼을 준비하며 남편 빅에게 “예물은 다이아몬드 말고 신발장”을 달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 한국 드라마의 변형

10대~30대 젊은 층이 미드와 일드를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미드와 일드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최근 2년간 미국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거의 빼놓지 않고 다 보았다는 이경희(27) 씨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있는 미드는 시청자들이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일드는 마치 만화에서 인물이 나온듯하다. 유치하지만, 유치함이 재미있다고 느낄만큼 드라마 속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역시 미드를 즐겨본다는 서동우(28) 씨는 “스펙터클에서 비교가 안 된다. 특히 연애나 가족 중심이 아니라 장르별로 전문성이 있다. 직업 드라마에서 리얼리티가 살아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시청자들의 이런 변화는 한국 드라마의 성향도 바꾸고 있다.

‘스포트라이트’‘온에어’‘그들이 사는 세상’‘뉴하트’‘종합병원2’까지 올 한해는 전문직을 다룬 드라마가 대세를 이뤘다. 30대 비혼 여성을 삶을 다룬 칙릿형 드라마의 등장도 눈에 띈다. 정이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달콤한 나의 도시’가 방영됐고, 30대 패션지 기자를 소재로 한 ‘스타일’이 기획 중에 있다.

한편 이미 미드와 일드로 이탈한 20~30대 시청자를 아예 틈새시장으로 간주하고, 스펙트럼이 넓은 홈드라마와 사극을 집중적으로 편성하는 것도 국내 지상파 방송의 최근 특징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이제 드라마 시청자 층을 50~60대까지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가족을 소재로 한 홈드라마나 통속극을 집중적으로 편성하는 것 같다. 타깃 시청자가 큰 사극의 편성도 늘어났는데 최근에는 여성, 젊은 시청자를 수용하기 위해 퓨전 형식이 많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