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극장·아르코 예술극장 등 특정 장르 중심 운영 귀추 주목

연말 공연장이 온통 뮤지컬로 뒤덮이면서 오페라, 춤, 연극 등 다른 장르의 박탈감이 상대적으로 더욱 커지고 있다. ‘한 해 장사’의 관건이 걸려 있는 연말 공연시장을 한 장르가 장악해버리면 다른 장르들은 공연할 장소도, 관객도 확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연장을 뮤지컬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한 공연계의 ‘몸부림’이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원래 복합공연장으로 설계된 중대형 극장들은 연말부터 시작해 내년 라인업을 뮤지컬만으로 빼곡히 채워넣었다.

주로 연극을 무대에 올리던 대학로의 소극장들도 그 무대에 맞는 맞춤형 뮤지컬들로 연말을 보낼 계획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작아도 탄탄한 작품들도 많아 한 묶음으로 재단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는 공연 관계자들은 뮤지컬에 대한 철학보다는 소위 ‘돈이 되기 때문에’ 몰려든 제작 양상을 비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순수예술 장르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서는 전용관 마련이 시급하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전용관이 생기거나 기존 공연장이 특정 장르 중심으로 운영되면 더 좋은 환경에서 공연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순수예술 장르가 발전하는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한 우물 파기 시작한 다목적 공연장들

이 같은 상황에서 최근 공연장들이 특정 장르 중심으로 운영을 집중하고 있어 귀추를 주목케 하고 있다. 얼마 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밝힌 새로운 예술정책은 기존의 복합 공연장의 운영을 특정 장르 중심으로 재편하는 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페라, 뮤지컬, 발레, 현대춤, 연극 등 종합예술을 위한 공연장이었던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은 오페라와 발레 중심 공연장으로 바뀐다. 이는 대관 심의 때부터 오페라와 발레가 많이 공연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문화부의 지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화부가 공공적 측면에서 순수예술인 오페라와 발레의 육성 측면에 정책의 방점을 찍은 것이다.

윤미경 오페라하우스 공연사업팀 팀장은 “오페라극장은 정부의 장르 특성화 정책에 따라 설계 시부터 오페라와 발레를 전문으로 공연하기 위해 기획된 공연장”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같은 변화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의 목적에 맞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우선 예술의 전당에 상주하고 있는 국립오페라단과 국립발레단에 충분히 공연을 보장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는 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예정이다. 극장 측은 두 국립단체의 공연을 위주로 일정을 짜되, 유니버설발레단 등 일부 민간단체에게도 대관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다.

현재 계획된 비율은 국립단체와 민간단체를 50:50 정도로 예상되고 있다. 윤미경 팀장은 시즌제 도입을 통해 이 같은 라인업을 보강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소속기구인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역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이제까지 아르코 예술극장의 가장 큰 특징은 상업적 예술보다는 대중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는 기초예술을 주로 다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화부의 새 정책은 아르코 예술극장의 이 같은 특색은 그대로 이어가면서 대신 극장별로 장르적 특성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대극장은 춤 공연, 소극장은 연극과 춤의 실험무대로 재편된다. 연극으로 대표되던 아르코 예술극장의 색채가 춤으로 중심을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르코 예술극장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기초예술에 대한 육성의 차원에서 아르코 예술극장에서는 춤, 연극, 다원예술에 고루 초점을 맞춰왔다. 이중 현대춤 등 춤 공연이 60% 이상, 연극은 30%, 장르복합적인 다원예술이 나머지 10% 정도를 차지한다.

최용훈 극장장은 “춤 공연이 연극의 비중을 앞지르고 있으니 ‘춤 중심 극장’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제까지 이어온 극장의 특성을 배제하고 갑자기 춤 공연 전용관이나 춤 전문극장으로 바꾸는 시도가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라는 입장을 보인다.

지난 11월 재개관한 충무아트홀 대공연장은 내년 라인업을 뮤지컬 중심으로 짰다. 서울 중구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충무아트홀은 지난 3월부터 총 78억 원을 들여 809석의 객석을 1,300석으로 늘리고 대형 뮤지컬에 적합하게 오케스트라 피트를 만드는 공사를 진행해왔다.

현재 대관 비율을 보면 뮤지컬이 대략 80%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20%를 콘서트와 클래식 공연이 차지하고 있다. 충무아트홀 공연 일정을 살펴보면 개관 기념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를 시작으로 내년부터 <라디오스타>, <이순신>, <삼총사>, <돈주앙>, <올슉업> 등이 차례로 일정을 메우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뮤지컬 전문극장이라는 조건에 충분히 부합하는 모습이다.

4- 샤롯데 씨어터
5- 충무아트홀

■ 선택과 집중, 순탄치만은 않다

다목적 공연장의 이러한 특정 장르 중심으로의 운영 변화는 문화 장르의 다양성 측면에서 필연적이라는 반응이다. 오페라하우스의 윤미경 팀장은 최근 뮤지컬 극장 수의 증가로 인해 굳이 오페라극장이 그 역할까지 떠맡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 공연장은 그동안 공연문화의 현실상 다목적으로 활용된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부는 장르의 전문화 특성상, 현장의 분위기를 받아들여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로 운영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오페라극장은 오페라 발레 전용관이 되거나 ‘앞으로는 뮤지컬을 안 하겠다’라는 방침을 완전히 확정짓지는 않았다. 특히 최근 공연예술계의 블루칩인 뮤지컬 관객의 수요를 생각하면 뮤지컬이라는 매력적인 시장을 완전히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페라극장은 우선 순수예술 육성이라는 대목적에 충실하되, 공연 상황에 따른 탄력적 운영의 묘를 살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충무아트홀 역시 오페라극장과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 인형근 공연기획부 차장은 충무아트홀이 뮤지컬에 집중하고 있기는 하지만 뮤지컬 전문극장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개관 당시부터 공연계는 뮤지컬이 강세여서 극장 운영의 활성화 측면에서 뮤지컬에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클래식 장르는 좋은 시설을 갖춘 다른 공연장들이 있기 때문에 저희는 더욱 뮤지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내년 이후 늘어날 뮤지컬 전용관들과의 관계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공연장 시설을 뮤지컬에 맞게 개보수한 것입니다.”

두 극장 모두 내용상으로는 전문극장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다목적 공연장’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소구력이 보장된 타 장르를 수용할 수 없는 전용관의 한계를 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당분간 이런 다목적 공연장들은 사실상 특정 장르 전문극장의 길을 걸으며 시기적으로 유리한 타 장르의 공연을 삽입하는 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기존 다목적 공연장의 변화는 긍정적인 발상에서 출발했지만 당장 시행하기에는 당면한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현장예술인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문화부가 일방적인 ‘통보’를 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견도 그중 하나다.

지난 4일 대학로에서는 문화부의 특성화 운영 방침에 반발하는 연극계 인사들이 모여 공식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공연기획사 에이콤 인터내셔널의 윤호진 대표와 극단 미추의 손진책 대표 등 연극계 인사들은 “대극장 연극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마당에 아르코 예술극장 대신 중·소극장만 있는 아르코시티를 권장하는 제도는 말이 안 되는 발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최근 뮤지컬에 자리를 내주고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연극계이니만큼 이들의 반발이 거셀수록 문화부의 특성화 정책이 차후 아르코 예술극장의 운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 전용관들의 현재, 어디까지 왔나

다목적 공연장들이 변화의 과도기에 있는 사이, 전용관들은 특히 뮤지컬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국내 최초 뮤지컬 전용관인 샤롯데 씨어터가 현재 활발히 운영되고 있고 2011년까지 잇따라 뮤지컬 전용관이 문을 열 예정이다.

대학로에 1800석 규모로 들어서는 ‘CJ아트홀’은 내년 11월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인터파크ENT와 행정공제회 등 5개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만드는 ‘쇼파크’는 1500석 규모로 한남동에 자리를 잡고, 잠실에는 역도경기장을 개조해서 1260석 규모의 ‘우리금융아트홀’이 내년 2월 20일 완공을 목표로 현재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다.

신도림에는 1200석 규모의 디큐브시티와 400석 규모 브로드웨이홀이 새로 생긴다. 한편 송파구는 제2, 제3의 샤롯데시어터를 짓겠다고 발표해 뮤지컬 관객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작품을 볼 수 있게 됐다.

샤롯데 씨어터의 정용성 홍보마케팅 팀장은 최근 전용관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대해 국내 뮤지컬 관객의 증가와 그에 따른 관람 수준의 상승을 지적한다. 그는 “다목적 공연장들의 변화의 배경에는 운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자구책의 측면이 있습니다. 반면 전용관은 오직 그 장르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연장이기 때문에 설비 측면에서 눈이 높은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해석한다.

현재로서는 다목적 공연장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여러 가지 배경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극장 자체의 자구책일 수도 있고, 쏠림 현상을 방지하고자 하는 정부의 순수예술 보호와 육성 정책의 일환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시도가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해당 장르 관련 설비 환경이나 소외되고 있는 장르의 관계자들을 폭넓게 고려하는 과정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또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장기적인 문화 육성 정책의 관점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충실히 단계를 밟아나가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