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고도' '북극의 눈물' '누들로드'등 시청자 사로잡으며 붐 이어가

‘다큐멘터리는 재미없다.’ 1년 전만 해도 이런 단언은 아무런 거부감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1년 사이 나타난 변화된 흐름은 이러한 명제에 우리 스스로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 다큐멘터리 몇 편이 근래 세계 유수의 방송상이나 영화제에서 수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전의 다큐멘터리들 중에도 ‘수상’한 작품은 많았지만, 소구력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이 브라운관 앞으로, 극장으로 다큐멘터리를 보기 위해 모이는 것은 분명 다큐멘터리의 어떤 변화 때문이다.

최근 등장한 다큐멘터리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도들은 이처럼 우리가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가져온 고정관념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이 작품들은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대중에게 보여온 지루한 형식의 답습을 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소재도 소재거니와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 작품들은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열며 ‘다큐멘터리는 재미없다’라는 편견을 서서히 깨나가고 있다.

■ 참신하고 수준 높은 콘텐츠로 다큐 이미지 개선

2008년 현실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현실이 드라마보다, 코미디보다 더 흥미로울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극적이었다.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논픽션의 시대, 사람들은 이제 오락 프로그램보다 뉴스나 다큐멘터리 등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부터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다큐멘터리의 모습이 바뀌며 사람들의 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는 것. 다루는 소재나 풀어가는 구성, 영상의 화질 등이 우리가 제작한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품격인 다큐멘터리들이 잇따라 대중 앞에 선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좋은 다큐멘터리란 참신한 기획과 오랜 인내가 만났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그런 ‘명품’ 다큐멘터리들이 여러 편 등장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난해 국내외에서 방송 관련 각종 상을 휩쓸어 명실공히 2008년 최고의 방송 프로그램으로 공인받은 <차마고도>를 들 수 있다.

<차마고도(茶馬古道)>는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환하기 위해 중국과 인도 사이에 개통된 교역로인 ‘차마고도’를 조명한 프로그램. 이 작품은 5000km에 이르는 교역로의 장대한 자연풍광을 담아내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의 원초적인 삶에서 아시아 문화의 근원을 포착해 시청자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다. 국내 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최초로 에미상 후보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다큐멘터리가 최고의 방송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은 것은 다른 다큐멘터리들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상승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당장 지난해 방송위원회 수상작을 봐도 지상파 TV부문 최우수상에 KBS 1TV <미술>과 뉴미디어부문 최우수상에 중앙방송 Q채널의 <레나테 홍 할머니의 망부가 - 다시 봅시다> 등 다큐멘터리들의 선전이 눈에 띄고 있다.

■ 고품격·명품 다큐, 시청자 눈길 유혹 성공

EBS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한반도의 공룡> 역시 명품 다큐멘터리가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육식 공룡 타르보사우루스의 생애를 다룬 구성과 순수 국내 컴퓨터그래픽 기술로 8천만 년 전 백악기에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들의 모습을 재현해 많은 호평을 받았다.

특히 그때가 벨로키랍토스, 테리지노사우루스 등 거대 공룡의 낙원이었다는 사실에, 제작진은 16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실감나는 기술로 한국산 공룡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 EBS 홈페이지 시청자게시판에는 찬사의 글이 쏟아졌다. 이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한국의 컴퓨터그래픽(CG) 수준’에 관한 것. EBS는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힘입어 지난 연말 이례적으로 재방영까지 했다.

지난 연말 방영된 MBC 창사 47주년 특별기획 <북극의 눈물>은 다큐멘터리로서의 정통성을 뚝심있게 밀고나가며 현재의 다큐멘터리 붐을 촉발시킨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으레 남극이나 북극의 위기와 관련한 환경 다큐멘터리들의 계몽적 태도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흥미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제작진은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위기를 맞고 있는 북극 지역의 동물과 현지 원주민의 삶에 참여해 ‘북극 생태계’에 카메라를 비춘다. 그 결과 <북극의 눈물>은 새하얀 북극의 설경과 콜라병을 들고 나타날 것 같은 북극곰의 일상이 낭만적 감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고, 강압적이지 않은 환경보호에의 메시지가 이상적으로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환경 다큐멘터리로서의 역할에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첫 회 시청률이 11.4%(전국 기준, AGB닐슨 미디어리서치 집계)를 기록한 이 작품은 입소문을 타고 ‘다시보기’ 서비스에 대한 요청과 함께 이어 방영된 제2부도 시청률 10.8%에 이르는 대박을 기록했다.

한편 <차마고도>에 이어 ‘인사이트 아시아’ 시리즈로 제작된 6부작 HD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는 <북극의 눈물>에 이어 다큐멘터리 붐을 키우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있다.

<누들로드>는 국수를 통해 인류 음식의 문명사를 되돌아본다는 참신한 기획이 돋보이는 다큐멘터리. 2년 4개월여 간 제작비 8억 원을 투입한 이 작품은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신석기인들이 고안해낸 국수가 지난 4천여 년 동안 시간과 국경을 넘어 전파되며 세계의 식탁에 오른 여정을 담았다.

특히 <누들로드>는 유럽과 중동, 아시아 지역 등 8개국에 선판매될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어 보장된 명품 다큐멘터리로서의 가치도 입증됐다.

6부작의 내용은 각각 <기묘한 음식>, <미라의 만찬>, <파스타 오디세이>, <아시아의 부엌을 잇다>, <인류 최초의 패스트 푸드>, <세상의 모든 국수> 등으로 채워진다. 역사적 고증과 심층 취재를 거쳐 각 시리즈마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국수를 조명하고 흥미로운 볼거리도 삽입해 다큐멘터리의 묘미를 한껏 살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왜? 지금, 다큐멘터리 붐인가

<차마고도> 이후, 최근 등장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들은 기존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인식을 깨듯 잇따라 좋은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히 시청자의 취향이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과 화면으로 가득한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에 질린 시청자들이 품격 있는 교양과 현실성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에서 진정성을 찾게 됐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청자의 요구에 부응하듯 다큐멘터리도 기존의 교육적이고 지루한 연출에 머무르지 않고 시청자의 수준과 취향을 고려한 시선으로 그들의 공감을 얻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온 점이 이 같은 다큐멘터리 붐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송환>으로 잘 알려진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역시 무엇보다 프로듀서들이 다큐멘터리가 재미없다는 인식을 탈피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온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북극의 눈물>의 경우 20억 원의 제작비를 들일 만큼 장르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 명품 다큐멘터리라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의 영향도 한 요인으로 꼽는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적으로 다큐멘터리는 붐이에요. 점점 더 다양화되면서 다큐멘터리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고 있는 거죠.” 이에 따라 연출기법이 자유로워진 다큐멘터리는 기존의 엄숙주의를 벗어나 다양한 화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다큐멘터리 전문채널이 등장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친숙해진 측면도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 히스토리 등이 케이블방송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시청자들은 다양하고 수준 높은 해외의 다큐멘터리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PIFF & Q채널 아시아 다큐페스티벌, EBS 국제다큐페스티벌(EIDF), 인디 다큐페스티벌 등 각종 다큐멘터리 영화제들이 다양해지면서 극장에서도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그만큼 다큐멘터리에 대한 수요층이 확대되어온 것이다.

■ 다큐멘터리 풍년으로 진화 이어간다

하지만 지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몇몇 다큐멘터리들만으로 한국의 다큐멘터리 전반이 호황을 맞을 것이라는 것은 섣부른 예단이다. 김 교수는 “영화 쪽에서는 다큐멘터리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자리를 잡은 지 꽤 됐지만, 방송 쪽에서는 좀 늦은 감이 있다”고 지적하며, 방송 PD들이 스크린에 작품을 옮기려는 시도도 이 같은 작품으로서의 인프라 구축이 미흡함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또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다큐멘터리 방송이 각자의 장르의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교류도 부족한 만큼, 이런 것을 좁힐 수 있는 대화의 장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수요가 확인된 만큼 새해에도 명품 다큐의 붐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11일 방송된 MBC 스페셜 <물의 여행>은 <북극의 눈물>을 잇는 자연 다큐멘터리다. <물의 여행>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물속 생물들의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하는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작품이다.

EBS는 ‘2009년 7대 기획’을 확정해 발표하면서 ‘어린이 존중과 가정’을 다룬 실용적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큐멘터리 영화들도 잔잔하고 따뜻하게 다큐 팬들의 마음을 달래줄 예정이다. 이미 개봉한 <워낭소리>, 2007년 ‘올해의 독립영화상’을 받은 <할매꽃>, 끝나지 않은 위안부 문제를 다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등 기대되는 다큐멘터리들이 오는 2월 이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 강추! 세계의 명품 다큐멘터리

※ 11- '명멸하는 불빛' (1997, 켄 로치)

1995년 영국 리버풀에서 500명의 항만노동자가 항구회사로부터 부당하게 해고된다. 노동자들은 이후 3년여에 걸쳐서 부당해고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며, 1996년 투쟁 1주년에는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등의 항만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투쟁을 조직하며 국제연대투쟁의 새 장을 열었다.

※ 12- '볼링 포 컬럼바인' (2002, 마이클 무어)

인디 다큐의 걸작 <로저와 나>의 마이클 무어가 강력한 총기 규제가 필요하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 완성한 걸작 다큐멘터리. 제목인 '볼링 포 컬럼바인'은 폭력이 일상화한 미국 사회 모습과 총기 소지가 자유로이 허용되는 환경 등 직접적 원인은 도외시한 채 록음악이나 비디오 게임 등 일상적인 문제들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을 비꼰 것이다. 제75회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수상작.

※ 13-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 (2000, 빔 벤더스)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 멤버들은 라이 쿠더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쿠바의 허름한 술집에서 만나는 노인이나 먼 훗날 쿠바 음악서적에서나 마주쳤을 이름에 그쳤을지 모른다. 빔 벤더스는 라이 쿠더와 그들이 이루어낸 기적같은 드라마를 동명영화로 만들 것을 결심한다.

※ 14- '식코' (2008, 마이클 무어)

속어로 ‘환자’라는 뜻을 가진 <식코>는 미국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영국 노동당의 오랜 리더였던 토니 벤이나 체 게베라의 딸인 알레이다 게베라 등의 목소리를 통해 공적 의료 시스템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요건이며 이런 시스템은 다수가 참여하여 요구해야 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