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기부 문화의 새바람 재능기부]

개인마다 가진 고유의 능력과 전문성을 수혜자에 기부하는 나눔 문화
기부와 봉사 활동 접목한 형태,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 지녀
문화예술계 등 전문직 종사자 재능기부 활동 뚜렷한 증가세
다 함께 행복한 사회 위한 공익활동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1-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홍보 이미지
2-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을 맡아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여행가 한비야
3-월드비전이 관여한 코러스영화 '유앤유'에 연출 재능을 기부한 영화감독 박제현
4-권영호 사진작가의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홍보사진


우리 대중가요 역사에 불후의 명곡으로 남은 '아침이슬'의 가수 양희은 씨. 그녀는 언제부턴가 노래보다는 이런저런 방송 프로그램 출연을 새로운 본업으로 삼아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가수에서 만능 방송인으로 변신한 셈이다.

가슴 속에서 길어올린 듯한 깊고 낭랑한 목소리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 특히 중년의 원숙미와 잘 어우러진 목소리는 시청자, 청취자들로 하여금 더욱 친근감과 신뢰감을 갖게 한다.

그 덕분에 양 씨는 요즘 방송 내레이터로서도 인기 상종가다. 지상파 방송 3사의 각종 교양, 오락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양 씨는 지난 1월12일 방송된 MBC 의학 다큐멘터리 <닥터스>에도 내레이터로 출연한 바 있다. 월요일 저녁마다 안방을 찾아가는 <닥터스>는 불치병이나 사고로 절망 속에 살아가는 환자들과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 분투하는 의료진의 생생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그녀는 이 프로그램에 무보수로 출연했다. <닥터스> 제작진이 연말연시를 맞아 마련한 유명인 목소리 기부 행사에 동참한 것이다. 제작진은 내레이터 출연료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쓰자는 제안을 해왔고, 양 씨가 이를 흔쾌히 수락해 이뤄진 일이다.

<닥터스>에 목소리를 기부한 것은 그녀뿐이 아니다. 지난 연말부터 1월26일자 방송분까지 아나운서 김성주, 정은아, 탤런트 정애리, 신애라, 이범수, 개그우먼 김미화, 가수 박상민 씨 등 모두 8명의 유명인이 목소리 기부에 릴레이로 동참했다. 이들은 자신의 가장 가치 있는 '재산' 중 하나인 목소리로 이웃사랑을 실천한 셈이다.

국내 기부문화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개인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나 전문성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눠주는 이른바 '재능기부'(혹은 전문성기부)가 점차 확산돼 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선은 곧 돈을 나누는 것과 거의 동의어로 통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불우한 이웃을 돕고자 할 때 그 수단으로 가장 먼저 돈을 떠올린다. 사실, 고도로 직업이 세분화된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따로 들여 남을 돕기란 애초부터 쉽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흔히 기부라고 하면 당연히 돈이나 현물을 공익적 용도로 내놓는 행위라는 통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재능기부는 기부자가 직접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투입해 수혜자를 돕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기부와는 차이점을 지닌다. 특히 교환가치(돈)로 환산되는 개인의 재능을 손수 발휘한다는 점에서 재능기부는 기부와 자원봉사의 성격을 합쳐 놓은 듯한 기부형태로 볼 수 있다.

재능기부는 서구사회에 뿌리내린 '프로 보노'(pro bono) 관습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프로 보노는 변호인을 선임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라틴어로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을 가진 '프로 보노 퍼블리코'(pro bono publico)에서 따온 말이다.

물론 국내에서도 프로 보노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법률상담, 무료변론 등 법률구조 활동을 펼치는 변호사들이나 오지와 낙도 같은 의료 사각지대에서 봉사를 하는 의사, 간호사들의 경우가 바로 프로 보노인 셈이다.

최근 들어 재능기부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직 종사자에서부터 평범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되는 추세다. 그 중심에는 기부자와 수혜자 사이에서 조직적인 가교 역할을 하는 공익단체가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문화예술계와 연예계의 재능기부가 매우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1% 나눔 운동'으로 유명한 아름다운재단은 수 년 전부터 문화예술인들의 재능기부 프로그램을 운영해오고 있다. 문인은 자신이 쓴 책을, 사진작가는 자신의 촬영기술을, 영화인은 자신의 영화를 나눔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게 기본 철학이다.

아름다운재단의 재능기부 프로그램은 문화나눔, 나눔의 책, 희망나눔 영화인 캠페인 등 크게 3가지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데, 소설가 신경숙, 시인 안도현 씨 등 명사들도 다수 참여 중이다.

이 재단 1%사업팀 서경원 팀장은 "개인들이 가진 전문적 재능을 어떻게 사회에 기여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모색해 왔다"며 "재능기부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시민들의 보다 폭 넓은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부 모델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국내의 대표적인 모금단체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모금회)에도 재능기부의 손길이 답지하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1억 원 이상의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 멤버들에게 제공되는 스카프의 디자인을 손수 해서 기부했다.

개그맨 황기순 씨는 매년 사이클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거리공연을 펼쳐 즉석 모금한 돈을 8년째 모금회에 기탁해 오고 있다. 이름하여 '사랑더하기 사이클 대장정'을 통해 모인 시민들의 정성은 형편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휠체어를 마련해주는 데 쓰인다. 이 행사에는 동료 연예인 100여 명도 돌아가며 함께 동참하고 있어 훈훈함을 더한다.

모금회 홍보팀 유수경 간사는 "유명인들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오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재능기부는 개인의 특별한 재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어떤 분야든 전문가들의 재능을 돈으로 사려면 변호사나 의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기에 사회적 약자 계층에게 '맞춤식'으로 무상 제공되는 재능기부는 가뭄에 단비만큼이나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 등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기업'의 자활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선 전문가들의 재능기부 사례도 눈길을 끈다. 특히 사회적기업지원네트워크(SESNET)와 소셜컨설팅그룹(SCG) 등은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경영 컨설턴트 등의 자발적 전문가 그룹을 조직해 사회적기업의 자립을 열성적으로 돕고 있다.

이들의 재능기부 활동이 더욱 의미가 큰 것은 수혜자 입장에서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속성을 갖는다는 점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배고픈 자에게 그저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셈인 것이다. '자립을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사회적 봉사'라는 세스넷의 기치는 그런 뜻을 잘 함축하고 있다.

기부는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또 세밑이 되어서야 하거나 돈으로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우울한 사람에게 즐거운 노래를 들려줘 웃음을 되찾아주거나 고민에 휩싸인 사람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것을 나눠주는 기부행위다.

재능기부는 바로 그 안성맞춤의 모델이다. 기축년에는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주변과 나눠보자. 기부를 내면화하고 생활화하는 뜻 깊은 첫걸음이 될 것이다.

1-앙드레 김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한 패션쇼
2-극단 학전은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연극 공연의 좌석을 문화소외계층에게 기부했다
3-재불화가 한미키 화백(오른쪽)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자신의 작품을 기증해 이뤄진 재능기부 전시회.
4-사진작가 권영호


"내가 돕는 게 아니라 얻는 게 더 많은 걸요"

사진작가 권영호 씨의 특별한 봉사

1998년 올해의 패션 사진기자상을 받고 <엽기적인 그녀> 등 다수의 영화 포스터를 촬영하기도 한 중견 사진작가 권영호(41) 씨는 2007년 초부터 틈틈이 병마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동과 청소년들이 희망과 용기를 가지도록 돕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의 요청을 우연히 받아들인 것이 계기가 됐다.

"어느날 메이크어위시재단에서 '한 아이가 모델처럼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는데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며 전화를 걸어왔어요. 그때 그 어린이를 만났다가 느낀 바가 있어 그 후로 계속 재단과 인연을 맺어나가고 있죠."

권 작가는 사진작가협회나 언론사가 주최하는 자선바자회에 자신의 작품을 기증한 적은 있었지만 재능기부와 같은 직접적 봉사활동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보기에는 제가 아이들을 돕는 것 같지만 사실 아이들을 보면서 배우고 얻는 게 더 많아요. 그렇게 아픈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볼 때는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고 마음도 착해지더군요."

그는 해외촬영도 자주 나가는 등 스케줄이 매우 빡빡한 편이지만 난치병 어린이들과의 만남을 최우선으로 여긴단다. "내게는 하루이지만 어린이들은 몇 달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 때문에 재단측과 미리 일정 조정을 해서 아이들과의 약속을 꼭 지키려고 합니다."

권 작가는 올해 일곱 살 난 딸이 있다. 난치병 어린이들 중에는 자신의 딸과 비슷한 또래가 많아 마음이 더욱 쓰인다고 한다.

"운명처럼 만난 일이라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하게 될 것 같네요. 나중에는 난치병 어린이들과 함께 한 추억을 작품집으로 내고 싶은 생각도 갖고 있어요."

사람은 무엇을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기쁘다고 한다. 권 작가가 실천하는 재능기부는 그 진리를 오롯이 밝혀주고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