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선봉으로 길거리 미술·영화·문학으로 급속히 확산

(위)double-P의 그래피티.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사진제공=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
(아래)그래피티. 서울 압구정동 굴다리, 사진제공=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 바퀴벌레 한 마리쯤 쓱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에는…"

최근 1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싸구려 커피>의 앞부분이다. '백수'의 일상을 자조적인 언어로 건조하게 표현했다.

극도의 사실주의이지만 유머코드가 숨어있다. 포크 락이나 펑크 음악을 연상시키는 느릿하고 약간은 촌스러운 운율은 이런 감상을 더해준다.

대중음악을 필두로 문학, 미술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에 '루저(loser)'코드가 급격히 확산하고 있다. 이는 대졸자의 절반이 취업을 할 수 없는 '패배자'의 대중화 시대가 부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지난해 9월 이후 심화한 경기불황과 실업의 확산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루저 정서 유행하는 대중문화

대중음악에서 패배자 정서는 최근 들어 하나의 코드이자 유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규대학을 졸업하고도 평균임금 88만원의 비정규직을 피해가기 힘든 청년들의 자기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랫말이 눈에 띈다.

홍대 앞에서 시작해 기성 가수 못지 않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인디밴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패배자로서 자기정체성을 풍자적이고 비관적인 가사에 유머러스한 멜로디로 덧입히고 있다.

가수 이장혁은 <스무살>이라는 곡에서 "내가 알던 형들은 하나 둘 날개를 접고 아니라던 곳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중략) 귀찮은 숙제 같은 그런 나를 보면서 더 이상 어떤 말도 넌 하기 싫었겠지.(중략) 밖으로 밖으로 널 잡고 싶었지만 안으로 안으로 나는 취해만 갔어"라고 노래한다.

불나방스타소세지클럽은 <시실리아>란 노래에서 "내 사랑 시실리아. (중략) 함께 가줘요 롯데X아. 불고기버거 내가 쏘리라"라고 노래한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스끼다시 내 인생>이란 노래에 "스포츠 신문 같은 나의 노래. 마을버스처럼 달려라. 스끼다시 내 인생" 이란 가사를 집어넣었다.

이들 음악의 유행은 현실의 반영이자 음악가의 자기표현이라는 게 전문가 해석이다. 김학선 대중음악 평론가는 "영웅으로 치장하는 과거의 루저 정서의 음악과 달리 요즘 음악은 젊은이들의 절망과 시련을 그대로 보여준다"며 "음악하면서 먹고 살기 힘든 인디밴드가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 청년들에게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루저'문화를 주제로 한 영화 역시 주목받고 있다. 액션배우들이 직접 만든 <우린 액션배우다>(2008년)나 한물 간 영화배우를 코믹하게 그린 <라디오스타>(2006년)가 '루저' 영화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게릴라전 펼치는 미술 저항

그래피티 예술(graffiti art)로 불리는 길거리 미술의 확산은 미술계에 불고 있는 루저문화 바람의 대표격이다. 특히,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패자, 혹은 약자의 정치적 정서를 담은 작품이 눈길을 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의 한 그래피티는 전투경찰이 어린아이를 제지하는 모습, 돼지를 끌고 가는 경찰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더블 피(Double-P)라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작가 이니셜이 선명하다.

서울 신촌동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와 전봇대 등에는 최근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미지와 '삼성중공업은 서해를 살려내라'는 문구를 담은 그래피티가 등장했다. <제이 앤 제이 크루>와 <원탁> 등 일단의 작가들은 서울 압구정동 굴다리 등지에 힙합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래피티를 그리고 있다.

명문 미대 졸업과 미술전 입선을 필수자격으로 여기는 주류 미술계는 아직까지 이들을 크게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허락 받지 않은 벽면에 게릴라성으로 벌이는 이들의 예술 활동은 점점 주류 미술계의 관심을 불러모으며 활발해지고 있다. 그래피티 작가 중 일부는 벽면에서 캔버스로 그림판을 옮겨 서울 서교동 <상상마당> 등의 개방적 전시공간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래피티의 확산은 '루저'그룹의 사회적 발언권 확보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는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도시공간이 시민 개인의 발언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인 그래피티 작가들은 자기표현에서 시작해 변화에 대한 갈망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하와 얼굴들'(왼쪽)


루저 문학 전성시대

문단에서는 불황을 지나는 문인의 경제적 비관의 처지가 작품에 드러나고 있다. 문인 특유의 '돌봄'의 정서, 비판의식 역시 루저가 다수인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루저 정서를 대변하거나 묘사하는 작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

공지영 작가는 산문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2008)에서 딸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글로 사회의 많은 패자, 혹은 패자의 불안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메시지를 전했다. 공 작가는 최근 지승호와의 대담집인 <괜찮다, 다 괜찮다>(2008)에서 역시 '패자'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2007), 임정연의 <스끼다시 내 인생>(2006),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 등의 작품 역시 '88만원 세대'의 일상을 그리며 청년층의 루저 문화를 묘사한 바 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현재 젊은 작가들은 현실에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청년실업자, 혹은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며 "70~80년대 문학이 패배자마저 영웅적으로 그린 것과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 평론가는 이어 "등단의 관행이나 문예수업의 필요성 등 때문에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루저로 규정 지을 만한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면서도 "패배한 사무라이들이 일본 근대문학을 연 것이나 금오신화, 홍길동전 등의 서얼문학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에서 패배한 사람이 문학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