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고전 재해석한 책 출판계 블루오션… 고전강좌도 동반 인기

지난 9일 정조의 비밀 서찰 299통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학계와 언론은 일제히 정조의 '막후정치'를 대서특필했다. 정조와 정적으로 알려졌던 벽파(僻派)의 영수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는 '성군' 정조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집었다. 서찰로만 볼 때 정조는 비밀정치와 공작과 타협에 능하고, 여론에 민감한 군주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백년 전 조선시대의 권력과 정치, 통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정조 2-심환지
1-정조
2-심환지
정조의 서찰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최근 불고 있는 고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면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고전이란 무엇이며, 고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동서양 고전을 재해석한 책은 출판계 블루오션으로 떠올랐다. 학술적ㆍ역사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작금의 경제ㆍ사회ㆍ정치상황과 접목해 '고전에서 해법을 찾는' 고전강좌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 고전의 위력

고전의 위력을 가장 크게 실감하는 분야는 출판계이다. 국내 고전출판의 성공작으로 꼽히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허균의 '홍길동전'을 기점으로 200권 출간을 돌파했고, 이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상위 5개 베스트셀러는 2007년보다 지난해에 더 많이 팔렸다. 상위 5개 베스트셀러는 지금까지 합해서 110만부가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가 됐다. 출판사 측은 "불황이 시작됐지만 예전에 비해 판매가 5~10% 더 늘어났다"고 밝혔다.

고전시리즈로 유명한 범우문고는 2007년에 39만 부가 팔렸는데, 출판계 불황이 심화됐던 지난해에 오히려 8만부가 더 팔렸다.

을유문화사 역시 2005년 세계 사상고전 시리즈와 지난 해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김영준 편집장은 "고전 시리즈는 시간이 가고 출간 책이 늘어날수록 판매도 덩달아 늘어난다. 출판시장이 불황이지만 사상고전 시리즈를 처음 낸 2005년과 비교해 판매가 줄지 않았다. 앞으로도 꾸준히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계발서가 휩쓸던 경제 서적 분야에서도 2,3년 전부터 고전과 경영을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책이 출간되고 있다. 2007년 출간된 를 비롯해 <논어 경영학> <경영, 역사에서 길을 찾다> 등은 고전과 경영을 접목한 자기계발서의 일종이다. 2007년 출간된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는 이듬해 2편이 출간됐다. 이 책은 삼성경제연구소가 매달 진행하는 인문, 고전 강연 조찬 모임인 '메디치21'의 강의를 요약한 것이다.

세종, 이순신 등 역사적 인물을 통해 리더십을 배운다는 기업의 인사 교육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온라인 교육업체 '휴넷'은 <실천! 이순신 리더십>을 2006년에, <창조의 리더 세종>을 지난해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휴넷의 안병민 이사는 "최근 몇 년 간 창조경영이 재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데, 고전이 창조경영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관심이 높다"고 설명했다.

1-1797년 4월11일,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 벽파 세력이 약화할까 하는 우려를 전달했다. 편지 끝부분에‘뒤죽박죽’이란 한글을 사용한 점이 이채롭다. <문화부 기사참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제공> 2-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베스트
1-1797년 4월11일,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 벽파 세력이 약화할까 하는 우려를 전달했다. 편지 끝부분에'뒤죽박죽'이란 한글을 사용한 점이 이채롭다. <문화부 기사참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제공>
2-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베스트
# 지금 왜 고전인가?

고전은 왜 각광을 받는가?

우선 고전을 오늘날에 맞춰 새롭게 해석하는 젊은 학자들이 늘어난 것이 한 이유로 꼽힌다. 이른바 '눈높이 교육'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말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가 2003년 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푸코와 데리다, 들뢰즈 등 젊은 층에게 친근한 서양 철학자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책이다. 출간 후 5년 동안 꾸준히 4만 부 이상을 판매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이밖에도 정민 한양대 교수가 고전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한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등은 밀리언셀러가 됐다. 안대회 교수의 <선비답게 산다는 것>, 이종묵 교수의 <조선의 프로페셔널>등 고전을 쉽게 설명하는 책들도 사랑받고 있다.

고전의 인기가 불안한 시대 조류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현 시대에서 고전은 선인들의 깊이 있는 사고와 통찰을 던져줌으로써 위기를 헤칠 지혜를 준다는 것이다.

지난 해 12월 15일 성공회 성가수녀원에서 열린 인문학 강연에서 신영복 성공회대교수는 "세상에는 수많은 사실이 있지만 진실은 하나다. 수없이 많은 사실들 중에 여러 개의 사실 조각들을 선택해 짜맞춰 하나의 진실을 일궈내는 것이 인문학적으로 사물을 보는 관점"이라며 인문과 고전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서울대 인문대 배철현 교수 역시 "고전만큼 꾸준한 사랑을 받는 것이 없다. 성경이나 플라톤은 수 천 년을 이어 오며 각 시대의 방향을 알려주었다. 기업을 비롯한 현대의 주체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전 공부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불안의 시대, 오피니언리더들이 고전에 눈을 돌리고 있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