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 최소 3년전부터 하루 1시간 이상 소득의 10%이상 문화 생활에 투자해야

"얼마면 돼?"

이제는 고전이 된 드라마 '가을동화'의 대사는 문화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시간(학습)과 돈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과연 그럴까? 딜레탕트들이 문화에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을 물어보았다. 오랜 기간을 거쳐 이들이 터득한 노하우도 소개한다.

문화도 공부하세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문화향수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예술행사 관람률(연 1회 이상 예술행사를 관람한 비율)은 67.3%로 나타났다.

영화 관람이 4회로 가장 많고 미술 전시회와 연극 관람이 0.2회, 문학행사, 클래식음악회, 전통공연, 대중가요콘서트가 각각 0.1회였다. 한 달 평균 가구당 여가비용 지출액은 10만 원 미만이 28.1%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 10만~15만 원 미만(17.9%), 20만~25만 원 미만(14.9%)의 순서였다. 1인 여가비용 지출액으로 산출한다면 비용은 훨씬 적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문화생활로 딜레탕트가 되기는 어렵다.

자타가 공인하는 딜레탕트, 문화적 오피니언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알 듯, 문화를 보는 눈을 떠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문화예술 교육경험이 문화 소비에 미치는 영향' 조사결과는 이를 뒷받침해 준다. 논문은 한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직접 면접한 결과 "문화예술교육이 문화 소비활동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논문은 특히 영화와 같은 대중적인 문화소비보다 콘서트, 전시회 등 상대적으로 참여집단이 소수인 문화 소비활동에서 문화예술교육 경험이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음악학 박사 정재원 씨는 "적당한 취미를 넘어 딜레탕트가 되기 위해서 교육과정이 필수적이다"고 말한다.

"클래식 음악을 예로 들자면, 중세시대 음악이나 고전파 음악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쉽게 즐길 수 있어요.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문제가 되죠.

특히 19세기 이후 음악가인 존 케이지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공부하지 않으면 듣기가 힘들어요. 현대 클래식 음악의 특징은 그 곡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대단한 곡'이란 생각이 드는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는 겁니다."

일반인의 경우 문화예술 교육이 선행돼야 지속적인 문화 소비를 한다는 말이다. 꾸준한 문화 활동이 경험으로 쌓일 때 비로소 딜레탕트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돈과 시간

다시 '문화향수 실태조사' 결과로 돌아가 보자. 한국인이 문화여가생활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두 가지, 바로 돈과 시간이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74.5%가 연극, 무용 등 예술행사를 관람할 의향이 있다고 대답했지만, 문화생활의 걸림돌로 비용과다(35.1%)와 시간부족(29.0%)을 가장 많이 꼽았다. 마음은 있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딜레탕트는 문화생활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취재를 위해 만났던 딜레탕트들은 선호하는 장르와 직업, 나이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하루 평균 1시간 이상, 소득의 10% 이상을 문화생활에 사용했다.

온·오프라인 동호회 활동과 문화교육 프로그램 수강, 문화 블로그 개설 등 본격적으로 문화생활에 뛰어든 것은 최소 3년 전부터다.

다음 카페 '소설아 놀자'의 운영자 김유정 씨는 2005년부터 소설 읽기를 넘어, 소설 창작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책을 사는 데 드는 돈은 최소 10만원, 하루 한두 시간은 꼭 소설을 읽거나 쓴다.

이를테면, 밥 먹듯 소설을 생각하는 셈이다. 인문ㆍ학술 분야의 또 다른 딜레탕트는 하루 2~3시간 이상 책을 읽고 한 달에 책값으로 30만 원 이상을 쓴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생활한 것이 10년째다.

40대 후반의 미식가 A 씨는 한 달 150만 원 이상을 색다른 음식을 음미하는 데 쓴다. 식도락을 즐긴 것은 15년이 넘었다. 와인 애호가인 40대 한 남성은 웬만한 소믈리에보다 와인에 대해 더 해박하다. 17년째 와인을 공부하고 와인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정작 와인에 투자하는 비용은 10만 원에서 15만 원 가량이다.

2000년부터 온라인 미술 동호회 '우리 미술관 갈까?'를 운영하고 있는 최연욱 씨는 그림을 자주 보기 위해 재작년 미술투어 전문 여행사를 차리기도 했다. 최 씨는 유명 그림을 보는 데 투자하는 비용과 사업비용이 구분이 되지 않는 셈이다.

물론 이들도 고민이 있다. 국내 문화 관람료가 외국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문화생활을 삶의 질 차원에서 접근하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시장경제에 맡기는 상황이다. 때문에 문화 관람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일례로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VIP 티켓은 20만원, '나비부인'의 VIP티켓은 25만원이다. 전시회 또한 마찬가지다.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 중인 클림트 전은 국내 전시회사상 최고가인1만 6000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중인 퐁피두전은 1만 2000원이다. 부부가 주말 하루 시간을 내어 오페라 한 편을 보고 전시회를 감상한다면 50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다.

외국과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지난 해 내한 공연을 한 팝 가수 셀린 디온의 경우 VIP 티켓 가격이 30만 원으로 비슷한 시기 일본 공연의 13만 원보다 2배 이상 비쌌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콘서트 역시 국내 VIP 티켓 가격이 17만 원이었지만, 일본에서는 7만 원이었다.

미술 동호회를 운영하는 한 사람은 "몇 해 전 국내에서 했던 '루브르 박물관전'은 프랑스에서 직접 봤을 때보다 티켓가격이 더 비싼 것으로 알고 있다.

대형 전시회가 자주 열리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전시회 티켓 가격이 계속 올라가는 상황은 미술을 장사로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국내 문화 관람료가 높은 이유로 열악한 공연, 전시 환경과 전문 인력 부족, 국내 업체들의 출혈 경쟁이 고스란히 표 값을 높이는 데 들어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기업체의 협찬을 받는 과정에서 가격 거품을 더 부채질했다는 지적도 있다. 협찬 비용은 공짜 티켓으로 바뀌는데, 선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티켓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다.

'비용'문제는 음식문화를 즐기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몇 해전부터 각광 받기 시작한 와인은 국내 주류 유통 방식 특성상 대중화가 어렵다는 평가다.

국내 주류세 부과방식은 술의 종류와 제조원가를 기준으로 책정된다. 때문에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고급 술의 가격은 외국에 비해 훨씬 비싼 가격에 유통되고, 대중이 고급 주류를 즐기기 힘들다는 것이 한결 같은 목소리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문화관람 비용에도 이들은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인터뷰를 했던 20대 한 여성은 "월급에 비해 비싼 표 값이 부담되는 건 사실이지만, 아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성 직장인들이 단란주점과 고급 술집에 들이는 돈보다 저렴할 것"이라고 말했다.

값싸고 쉽게 문화를 배우는 팁

취재에 응했던 사람들은 "돈보다 열정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달 10만 원 미만으로 5편 이상의 공연을 보거나, 인터넷 서평을 올려서 받은 마일리지 점수로 책을 사는 알뜰족도 상당수 있었다. '열정만 있다면' 딜레탕트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회사원 김희경(26) 씨는 일 년에 60편 이상의 공연을 보는 딜레탕트다. 대학생 시절에는 일 년에 100편 이상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 그는 전시회, 클래식 음악, 연극, 뮤지컬 등 최신 공연 정보와 지난 7년 간 감상했던 공연 리뷰를 올린 문화포털 블로그를 기획하고 있다.

주말마다 뮤지컬과 클래식 공연,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가지만, 한 달 평균 문화생활에 지출하는 비용은 10만원 미만이다. 일례로 지난 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세종솔로이스츠'의 15주년 기념 공연 티켓가격은 최대 8만원(S석)으로 책정됐지만, 그녀는 단돈 1만 원으로 공연을 봤다. 어떻게 가능할까?

김 씨는 "정보를 얻는 노하우가 있다"고 말한다.

클래식 공연의 경우 그녀가 주로 이용하는 것은 합창석. 연주자들의 뒷모습을 보는 단점이 있지만, VIP석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티켓가격은 1만 원에서 비싸도 3만~4만 원을 넘지 않는다. 인터넷 사이트 '클럽발코니'의 유료회원으로 등록하면 유명 클래식 공연들의 합창석을 우선 예약할 수 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단체관람으로 신청해 절반 가격으로 본다. 공연 기획사나 극단의 단체관람 관객으로 등록하면 이메일을 통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명함이벤트나 리뷰행사 등 한번 보면 '물고 무는' 할인, 공짜 공연도 다수 이용한다.

물론 김 씨처럼 나름의 노하우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공을 들여야 한다. 김 씨는 이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7년이 걸렸다.

전문가들은 딜레탕트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꾸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스토리텔링'을 가진 예술 작품을 먼저 접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이나 순수 미술을 공부할 때, 작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마데우스'나 '불멸의 여인'등 친숙한 음악가의 삶을 주제로 만든 영화를 감상한 뒤 배경음악을 듣고, 이후 점차 작품의 폭을 넓히는 식이다. 일본만화 '신의 물방울'이 국내에 선보인 뒤 와인시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스토리를 발판으로 문화에 재미를 붙인 다음에는 작가의 삶과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면 감상이 훨씬 쉬워진다. 본격적인 공부를 할 때는 문화 아카데미 수업을 듣거나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를 통해 독학을 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최신의 문화예술 트렌드를 알기 위해서는 전문 잡지를 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문화예술 잡지는 국내 문화시장의 '최신 트렌드'와 '핫 피플'을 알려준다. 문화 시장의 지형도를 그리는 데도 유용하다.

한 딜레탕트는 "전문 잡지는 문화 트렌드는 물론, 역사와 계보를 알려주는 기획기사가 풍부하다. 꾸준히 6개월만 보아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나처럼 되는 거, 어려운 거 아니야. 너처럼 마음먹는 게 어려운 거지."

드라마 '온에어'에서 전도연의 대사는 문화인을 꿈꾸는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열정만 있다면 당신도 딜레탕트가 될 수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