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 종합예술 공동 경험 중심 스터디·영화 교육프로그램 주도적 참여

스크린에 조악한 달 사진이 영사되고 있다. 최초의 극영화 '달세계 여행'의 한 장면이다. 강사가 말한다. "이 영화에서 달세계의 미개인들은 아프리카인으로 그려졌어요. 프랑스의 제국주의적인 관점이 드러난 거죠." 따라서 영화사는 사회사와 맞물려 전개된다는 설명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3월 3일 저녁 7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www.igong.org)에서 열린 '대안영상 담론 입문 연구 워크숍'풍경이다.

이름만 보아서는 영상문화 관련 대학원에서 진행될 것 같은 워크숍이지만 참여한 사람들은 회사원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하다. 그 중 가장 어린 이슬비(19) 씨는 독립영화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았다. 재작년 학교에서 인권영화제를 단체 관람한 것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워크숍의 강사이자 아이공을 이끌고 있는 김연호 대표는 "인터넷을 통해 영화는 물론, 영화 관련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정보가 워낙 빠르게 퍼지다 보니 예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참여자들이 많이 눈에 띈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영화 애호가의 시대

일반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영화를 보거나, 영화사와 영화이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외국문화원을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프랑스문화원은 거의 유일한 영화 정보통이자 영화 애호가들의 네트워크 장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기능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다.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다양한 주제를 내걸고 수시로 개최되고 있으며 시네마테크를 비롯한 대안적인 영화 상영 공간과 영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들이 생겼다. 인터넷은 영화 관련 정보에 접근하는 길을 폭발적으로 확장했고 영화 애호가들 간 소통의 도구가 되었다. 개인 블로그와 온라인 커뮤니티는 영화를 즐기는 또 하나의 대중적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시네마테크를 찾는 사람들도 변하고 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예전에는 알려진 작품만 보러 오는 관객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스스로 발견해나가는 관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오늘날 개개인의 영화 취향과 소양을 드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블로그 운영이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단순한 감상만을 적은 블로그는 너무 많다. 영화를 좀더 깊이 있게 비평해보려는 블로거들은 각자의 블로그 콘텐트를 모아 블로그 커뮤니티 형식의 웹매체를 만들기도 한다.

'네오이마주'(www.neoimage.co.kr)가 대표적인 예다. 네오이마주는 기존 매체와는 다른 시선의 비평 매체를 표방한다. 회원으로 가입한 블로거들이 자발적으로 비평을 등록하면 자원해서 활동하는 스태프가 그것을 편집해 사이트에 올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회원들 간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자체적으로 오프라인 세미나를 마련한다는 점에서는 반(半)-커뮤니티의 성격을 띤다.

네오이마주에서 편집스태프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 강민영(25)씨는 이런 형식의 웹매체의 장점으로 "자율적이면서도 심도 있게 영화를 보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꼽았다. 회원들이 글을 올릴 때 블로그에서 할 때처럼 스스로 관심 있는 영화를 선정하지만, 공동의 공간에 게시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더 수준 높은 글을 쓰려는 동기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이런 온라인 문화는 오프라인으로까지 이어진다. 네오이마주 세미나의 주제와 진행 방식은 참여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기존 교육기관의 커리큘럼에 비해 개개인의 관심사를 파고 들기에 더 편리한 것이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위치한 공방아카데미(cafe.naver.com/gongbangac)는 영화 이론은 물론 시나리오 창작, 영화 제작 관련 공부를 할 수 있는 커뮤니티다. 이곳은 운영자인 최원성(34) 씨와 이주용(32) 씨의 개인적 필요에서 출발했다. 각각 영화와 연극을 전공한 운영자들은 서로의 분야를 공부하고 나아가 공동으로 창작 작업을 하기 위해 이 공간을 구상했다.

영화나 연극을 배울 수 있는 곳이 거의 입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곳 역시 수강료가 비싸다는 문제 의식도 있었다.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한 만큼 참여자들 간의 결속이 더 단단하고 운영자들의 인맥 때문에 현업에 있는 사람들도 참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금은 프로듀서, 시나리오작가, 배우 등 관련 직종 종사자와 영화연극을 취미로 삼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공부하고 있다. 학원강사 조명선(34) 씨도 "영화 전문가와 함께 공부하고 싶은" 기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1분 영화제작 워크샵, 영화학교, 장편시나리오워크샵 등의 커리큘럼이 진행되고 있으며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꾸려나가는 영화이론 스터디도 마련되어 있다.

튼튼한 기본기가 영화 애호가의 지름길

이렇게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스터디를 찾아 자신의 취향을 개발하는 것은 영화 딜레탕트가 되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화사에서 중요한 영화, 다양한 영화를 섭렵하는 기본기를 갖추는 것 역시 필요하다. 기본기 없이 스터디에 참여했다가 오히려 흥미를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영화 애호가들이 시네마테크의 역할을 지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표적인 시네마테크로는 서울아트시네마(www.koteque.org)와 필름포럼(www.filmforum.co.kr)을 꼽을 수 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고전 영화와 거장 감독들의 특별전을 지속적으로 기획하고, 필름포럼은 필름포럼아카데미라는 교육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스폰지하우스, 미로스페이스, 하이퍼텍나다, 시네아트 등의 상영관이 비정기적으로 감독과의 대화 같은 관객 참여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한국영화사와 관련한 자료는 한국영상자료원(www.koreafilm.or.kr)에 모여 있다. 이런 곳들을 부지런히 찾아 다니는 것은 영화 애호가로서의 소양을 쌓는 지름길이다.

영화 평론에서부터 제작까지 영화 전반과 관련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춘 사설기관으로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www.hanter21.co.kr)가 가장 유명하다.

이곳의 특징은 수강생 간의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함께 강좌를 들은 수강생끼리 스터디를 지속해나가는 경우가 많다. 역사가 오래 되었고, 강의의 질도 신뢰를 얻고 있어서 영화계와의 연계가 잘 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강좌기획팀의 기정수 과장은 "각종 영화제, 공모전에서 수강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보겠다는 요청도 종종 들어온다"고 말했다. 디지털 카메라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다른 교육기관과는 달리 필름 카메라를 갖추었다는 것도 차별점이다.

공공적 영상문화의 허브를 지향하며 설립된 지역별 영상미디어센터에서도 영화 이론, 제작 관련 교육프로그램을 수강할 수 있다. 문지문화원 사이(www.saii.or.kr),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의 영상문화 아카데미(cafe.naver.com/tasciacademy.cafe) 등의 기관에는 인문학적 프리즘으로 영화를 보는 강좌가 있다.

영화 애호가의 둥지들

그 어느 때보다도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다. 그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반대로,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는 그저 흔한 취향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문화원 세대'가 영화에 대해 품었던 종교적인 열정이 오늘날 영화 애호가들에게도 남아 있을까? 그야말로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에 여전히 영화가 갖는 매력은 무엇일까?

영화 딜레탕트들은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점을 꼽는다. 인류가 개발해 온 모든 표현의 도구와 요소들이 영화에 녹아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영화 관람이 오감을 사로잡는 체험이라는 동시에 영화는 다만 영화로서만 해석되지 않고, 때문에 사람들 간 소통의 매개가 된다는 뜻이다. 서희동(32) 씨는 자신에게 영화는 "철학이자 예술"이자 "대화와 토론의 장"이라고 말했다.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영화가 "공동의 경험"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영화는 본래 많은 타인과 함께 체험하는 예술이다. 영화 애호가들은 결국 일종의 공동체 경험으로서의 관람 방식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조명선 씨는 영화를 좋아하면서 더 활동적이 되었다고 말했다. 영화 관람을 '공유'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 였다고 했다.

영화를 중심으로 사유와 감각을 뻗어나가고, 또 영화를 매개로 관계를 맺는 공간들이 곧 영화 애호가들의 둥지가 되는 까닭이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