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 장인의 정신 음미하며 삶의 여유와 비즈니스 경쟁력까지

옛말에 1대가 잘 살면 좋은 집을 사고, 2대가 잘 살면 좋은 옷을 사들인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3대가 잘 사는 집은 무엇에 집착할까? 답은 음식이다. 가난할수록 엥겔지수가 높아지는 법인데 이게 무슨 소리냐고? 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식량이 아니다. 미식을 말하는 것이다.

좋은 재료를 가지고 정성껏 만든 음식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음미하는 것, 즐기는 것이다. 딜레탕트는 음악 미술 공연 같은 장르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즐긴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딜레탕트의 속성이다. 일상의 범주에 있어서 오히려 무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잘 먹고 잘 마시는 일이다.

미식가를 불어로 구르메(gourmet) 또는 구르망(gourmand)이라고 부른다. 먹고 마시는 자체가 바로 문화가 아닌가. 그렇다면 식도락의 딜레탕트가 되어보자.

1인분에 10만원, 낭비일까?

30대의 K씨는 지난 2004년 와인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이전의 2차, 3차로까지 이어지던 음주 습관을 버리게 된 것. 취할 때까지 급하게 폭탄주를 들이 붓는 대신 식사할 때 가볍게 와인을 곁들여 마시다 보니 새벽에 귀가하는 일이 없어졌다. 이렇게 해서 남는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보내거나 자기 계발에 사용했다.

함께 와인을 즐기기 위해 동호회에 가입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변화 중 하나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 대와 직종이 천차만별이지만 와인의 맛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색함을 느낄 새가 없다.

공교롭게도 하나같이 연극, 음악, 공연 등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 문화생활의 저변도 넓어졌다. 얼마 전 동호회 사람의 소개로 가게 된 브릿 팝 밴드의 공연에서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은 벅찬 감동을 느끼고 돌아왔다. 지금은 와인을 맛보기 위해 일본이나 홍콩으로 여행을 떠날 정도로 그 매력에 깊이 빠졌다.

비용이 부담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밤새도록 양주를 마실 돈으로 대신 와인을 즐기는 셈이죠. 와인은 비싼 술이라고만 생각하지만 2만~3만원대의 저렴한 와인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하기 나름입니다. 해외로 나가면 값이 우리 나라의 절반도 안 되는 경우도 많아요."고 답했다.

주말이면 평소 눈 여겨 보아 두었던 맛집을 찾아 나서는 20대의 L양. 처음에는 그저 먹는 것이 좋아 시작한 취미였다. 그때만 해도 1인분에 10만원씩이나 하는 음식을 먹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식 경험이 쌓이면서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맛과 모양이 탁월한 음식을 만나게 되곤 했다. 이럴 때면 돈이 아깝기는커녕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내는 레스토랑의 쉐프들에게서는 장인 정신이 느껴져요. 최고의 재료에 그들의 독창성을 가미해 만들어 낸 음식을 먹을 때면 그 맛도 맛이지만, 나도 저 사람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동하곤 합니다."

와인과 미식의 효용은 삶에 여유를 가져다 주고 새로운 친분을 만드는 것 외에도 다양하다. 비즈니스에서 경쟁력이 되기도 하고 속하고자 하는 부류에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맛과 향을 남기는 와인이 있습니다. 훌륭한 영화 한 편이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듯이 와인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와인 한 잔에 든 삶의 여유를 맛 보라

와인이든 미식이든 그 본질이 즐거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접근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각 분야의 고수들이 조언을 했다.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생활에서 시작하라

- 재료를 확인하라

- 기록해라

- 사람들을 만나라

흉내가 아닌 진짜 자신의 취미가 되었는가의 기준은 그것이 가끔씩 생각나느냐 하는 것이다. 문득 커피 한 잔이 간절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일상 생활에서 종종 생각나는 음식이나 와인이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정말로 즐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익숙해지는 것이 우선이다. 평생 쳐다본 적도 없는 비싼 레스토랑을 가거나 유명세에 오른 비싼 와인을 통해 입문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집에서 치킨을 시켜 먹거나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와인을 곁들여 드세요. 와인 중에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리는 것이 꽤 많습니다."

익숙해지는 일 만큼 중요한 것은 방금 내가 맛 본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인상 깊은 공연을 본 후 배우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 와인보다는 신대륙-칠레,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미국의 와인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프랑스 와인은 기본적으로 모두 블렌딩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어떤 포도를 사용했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칠레나 호주 와인을 맛 본 후 마음에 들면 라벨에 쓰여 있는 품종의 이름을 기억해 두라. 같은 품종이 몇 번 중복되다 보면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게 된다.

미식에 있어서도 재료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무슨 재료로 만든 음식인지 모르고 한 입에 먹어 치우는 것과 꽃게살을 곁들인 로제 소스의 페투치네라는 사실을 알고 음미하는 것에는 실제 미각에도 엄청난 차이를 준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물어보라. 자신이 만든 요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쉐프라면 귀찮더라도 일일이 대답해 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급 식재료의 맛과 조리 방법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다.

와인과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어느 정도 확립되었으면 이제는 기록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수많은 미식가들과 와인 마니아들은 자료 공유 외에도 개인의 기록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나 인상 깊었던 와인의 사진을 올리고 아래 간단한 감상을 덧붙인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온라인 상에서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도 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하기 힘들거든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현재 포털 사이트에서 활동 중인 와인·미식 관련 동호회는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 인기가 좋은 몇몇 카페는 모임에 인원 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강좌를 수강하는 것도 좋다.

포도 플라자가 운영하는 와인 아카데미에서는 와인 초보자를 위한 S 와인 클래스를 진행 중이다. 가벼운 와인부터 진한 와인까지 다양하게 시음해 볼 수 있으며 와인 매너와 음식과의 매치까지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

요리 아카데미 츠지원에서는 요리뿐 아니라 완성된 음식을 먹는 것까지 과정에 포함시켰다. 음식을 먹는 동안 강사들이 음식의 유래와 미식 문화, 테이블 매너,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문화라도 스토리가 없이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음악이든 음식이든 마찬가지지요. 음식과 와인에 얽힌 스토리를 이해해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고 진짜로 즐길 수 있습니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