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공간 공존의 조건]주상 복합·아파트 건설 유혹에 추억의 공간·문화 예술 터전 존폐 기로


정부가 지난 2006년 입법예고한 '용산 민족, 역사공원 조성 및 주변지역 정비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반환받은 미군기지터의 일부는 공원화 대신 아파트, 주상복합을 비롯한 주거시설과 상업, 업무 시설로 개발할 수 있다.

2006년 이후 미군기지가 인접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인근에는 '용산 파크타워', '시티파크', '용산 자이'를 비롯한 주상복합 건물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파트 벽이 도심의 녹지공간으로 기대를 모았던 '빈 공간'을 포위하는 형태로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빈 공간'의 문화적 가치는 여러가지다. 쉼의 공간이자 상상과 창조의 원동력이다. 생태공간으로 자연을 접하게 해 삶의 질을 높인다. 그런데도 최근의 도시개발은 이런 문화적 질감, 삶의 기억들을 지워나가는 꽉 채우는 방식의 '속도전'을 펼치는 양상이다. 문화창작의 전초기지로서 여유에서 비롯한 상상력의 터전, 지난 삶의 방식과 기억을 현재와 공존하게 하는 '빈 공간'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홍성태 상지대 (도시생태학) 교수는 "빈 공간은 자연과 인간, 현대와 역사, 상층과 하층이 공존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며 "자연이라는 보편적 가치, 역사라는 유일한 가치, 계층적 상하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꽉 채우는 공간 개발은 문화적으로 저급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빈 공간', 위협받는 문화예술의 터전

자생적 예술창작의 터전이자 요람으로 발전한 '빈 공간'이 상시적 개발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문래동3가의 철공소 밀집지역이 대표적이다.

서울 문래동3가 일대는 원래 70년대 서울시의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왕십리 일대의 철공소들이 옮겨온 공업지역이었다. 그러나 중공업의 쇠퇴와 함께 공단 건물에는 곳곳에 '빈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2~3층에 자리한 중개상들이 중공업이 쇠퇴하던 90년대부터 공단을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1층에 있는 철공소들만 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1평당 1만 원대의 저렴한 월세와 공단 인근의 힘이 넘치는 분위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예술가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문래동3가 일대에서는 현재 70여 개에 이르는 작업공간에서 미술가, 무용가, 음악가를 비롯한 200여 명의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7년째 임대가 없어 쓰레기 더미가 가득했던 한 공단건물 3층에 공동의 전시공간인 'LAB 39'를 만들었다. 또, 공장의 철문, 건물 옥상과 외벽, 인근의 식당을 비롯한 곳곳에 벽화를 그리고 미술작품을 설치해 이곳을 문화창작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빈 공간'에서 나온 이들의 자생적인 창작의지는 최근 위협받고 있다. 작년 서울시의회가 시내 준공업지역에 최대 80%까지 아파트를 건립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했기 때문이다. 현재 2~3층에 불과한 쇠퇴 산업인 철공소가 대부분인 건물 주인들은 대부분 차익이 막대한 주상복합이나 아파트 개발 유혹을 느끼고 있다. 인근지역은 이미 아파트와 주상복합이 대부분인 상태(사진).

서울시는 아트팩토리를 기획하고 있지만 입주대상이 제한적이다. 문래동에 입주한 한 예술가는 "이정도 돈으로 입주할 수 있는 곳은 서울시내 어디에도 없다"며 "예술가들은 도시에서 작업할 권리가 없나"라고 반문했다.

1-예술인들이 빈 공간을 창작의 터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울 문래동 3가 일대의 철공소 밀집지역. 서울시 조례개정에 따라 언제든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와 같이 꽉 찬 공간으로 바뀔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2-서울 문래동 3가 철공소 건물의 빈 공간에 입주한 예술가들이 마을 주민들의 사진을 찍어 녹 슨 우편함을 예술작품으로 변화시켰다.
3-서울 문래동 3가예술가들이 철공소 건물의 계단에 그림을 그려넣었다.

'꽉 찬 공간'으로 없어지는 '삶의 기억'

꽉 채우는 방식의 도시공간 재구성은 지난 삶의 기억과 문화적 질감, 생태를 공존하게 하는 '빈 공간' 역시 그대로 두지 못하게 하고 있다.

서울 종로 세운상가 철거는 북한산 줄기가 종묘의 숲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흉물을 없애고 생태로를 살리는 '빈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기대를 모았었다. 그러나 재개발은 작은 녹지공간 외에 3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확정됐다.

단층건물 위주로 소시민들의 지난 삶의 방식을 보여줬던 서울 종로 피맛골 역시 재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가 높은 건물로 더 꽉차게 도시공간을 채울 예정다. '기차집', '대림 생선구이', '이강순 갈비집', '파전집', '열차집', '우미관' 등 피맛골 일대의 소시민의 기억과 정취가 담긴 공간은 모두 없어진다.

최근 종로의 한 주상복합으로 자리를 옮긴 '청진동 해장국' 집은 고유의 맛이 변해 단골 손님들의 실망을 샀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 용산동의 재래시장을 밀어낸 자리에는 어김 없이 '멀티 플렉스'가 들어섰다.

서울 정릉 일대의 한옥마을 역시 재개발에 들어가 지난 시간과 삶의 방식을 기억하게 하는 문화적 자원을 스스로 없애고 있다.

서울 정릉 1동 178번지 일대의 한옥마을 20여 채는 당초 뉴타운 지역으로 지정됐다가 지난 2006년 10월 길음동과 함께 '도시재정비 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서울 정릉 3동 372번지 일대 한옥마을 45채 역시 구청장 선거 때마다 아파트 재개발 공약 대상 지역으로 언급돼 왔다.

김인수 건축가는 "70년대 개량 한옥인 정릉 일대의 한옥마을은 전통한옥은 아니지만 도시형 한옥으로서 문화적 가치가 충분하다"며 "사람이 살고 있어 지난 삶의 방식과 정취를 담은 공간을 돈의 가치로 환산해 없애는 것은 반문화적"이라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