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 축구·야구 등 스포츠 내셔널리즘 미디어가 증폭시켜

WBC 한일전이 열리고 있는 18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한 회사 직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야구를 보며 열광하고 있다. 부산=이성덕기자

WBC 결승전 박빙의 한일 대결이 펼쳐지던 7회 초, 1루에 있던 나까지마가 병살을 피하기 위해 1루로 공을 던지는 고영민의 무릎을 잡으며 고의방해를 시도했다. 주심은 곧바로 수비방해로 더블 아웃을 선언했다. 이전 이닝 한국공격 때 이용규가 도루를 시도하다 나까지마의 다리에 걸려 헬멧이 깨지는 사고가 있던 터라, 한국 선수단의 감정은 편치 않은 상태였다.

이때 MBC 허구연 해설위원은 흥분한 상태로 일본 선수를 성토하다 “일본애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멘트를 날렸다. 해설위원도 인간인지라 일본 선수의 위협적인 행동에 격한 반응을 보일 순 있겠지만, 허 위원의 이 멘트는 다분히 시청자들의 공분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허 위원은 2라운드 경기에서 한국이 일본을 4대1로 이기자 일본에 대해 “총 맞은 것처럼 쇼크가 올 거에요”라는 말을 남겼다. 알다시피 이 발언이 모 여가수의 노래 가사를 패러디한 위트로 볼 수 있지만, 정황을 모르는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충격적인 멘트로 들렸을 것이다.

한국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WBC 한일전에서 보여준 일본 선수들을 향한 허 위원의 어록들이 통쾌하게 들릴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 어록들은 간혹 경기에 몰입하는 분석가로서의 해설위원의 언어는 분명 아닌 듯했다.

오히려 현장의 생생한 중계화면보다도 해설가의 주관적인 해설이 시청자들의 감정을 더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한일전에서 벌어지는 캐스터나 해설가들의 멘트는 날 것 그대로의 국민감정을 조리하는 ‘칼질’과도 같은 것이리라.

내셔널리즘으로 무장된 스포츠

북경올림픽 때 박태환의 자유형 결승경기,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파이널, 박지성의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그리고 WBC까지 지구촌 메가 스포츠 이벤트는 이제 우리 일상에서 ‘희노애락’의 만화경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시민들이 스포츠 중계에 대한 열정은 드라마 시청몰입만큼 뜨겁다.

스포츠가 마치 국민감정의 온도계가 될 정도로 절실한 것은 경기 그 자체보다는 경기를 중계하는 미디어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미디어의 스포츠 중계는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언어에 의해서 매개되고, 많은 시청자들은 대부분 그 언어에 동화된다.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언어는 경기에 몰입하고, 경기를 판단하는 시청자들의 감정에 중요한 자극제가 된다. 더욱이 국가간 경기가 벌어지는 게임에 있어서는 그 자극의 강도가 더 한다. 특히 축구나 야구 한일전과 같은 스포츠 이벤트를 중계하는 해설 위원들의 언어는 이른바 ‘스포츠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한다.

우리는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김동성과 안톤 오노의 결승전 대결 장면, 북경올림픽 박태환의 자유형 200M 결승장면에서 시청자를 흥분시키는 해설위원들의 내셔널리즘의 언어를 목격한 바 있다.

22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결승에서 한국이 베네수엘라에 10:2로 대승하며 결승진출을 확정, 코치진과 선수들이 응원단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 점에서 대중들의 스포츠에 대한 과도한 내셔널리즘적 반응들은 스포츠 중계를 통해 증폭된다. 국제 스포츠 이벤트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언어는 대한민국 국민의 대변자가 되면서 대중을 국가 안으로 호출하는 ‘원천 기술’을 보유한다.

스포츠에서 내셔널리즘은 사실 역사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즘이라는 종족적, 혈통적 내셔널리즘에 의해 지배받았다면, 냉전시기 몬트리올 올림픽은 이념적 내셔널리즘에 의해 지배받았다.

이 두 형태는 내셔널리즘을 배타적 ‘국가주의’로 번역한다. 반면 내셔널리즘을 ‘국민주의’로 번역하는 스포츠 이벤트들도 있다. 가령 2002 한일월드컵에서 ‘붉은 악마’ 신드롬은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

한국이 유독 국제 스포츠 이벤트에서 내셔널리즘적 반응이 뜨거운 것은 이러한 국가주의와 국민주의적 성격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국가주의는 민족이나 종족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형성된 이데올로기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식민지 역사, 냉전의 기억 등이 지배하는 내셔널리즘이다.

국가주의는 식민지 지배의 설움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활용해서 국민을 국가 안으로 통합하려는 목적을 드러낸다. 반면 국민주의는 민족적 과거에 대한 기억보다는 같은 국적을 가진 동시대 국민으로서 동질감을 갖기 위한 이데올로기이다. 가령 이번 북경올림픽 4강전에서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지배했다면, 쿠바와의 결승전은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국가주의나 국민주의는 완전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주의는 국민주의 없이는 재생산이 불가능하고, 국민주의는 국가주의라는 무의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과거 식민지 억압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다, 냉전-탈냉전의 한 중심에 있고, 경제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룬 한국과 같은 특수한 환경 속에서 스포츠는 민족의 억압의 한을 풀어주는 ‘씻김굿’이자 국가의 경제적 번영을 확인시켜주는 ‘별신굿’이다.

축구와 야구의 한일전,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피겨스케이팅 라이벌 대결 등이 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면, 13개의 금메달에 세계 7위를 이룬 북경올림픽대회나 4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한일 월드컵의 경우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한국 국민들은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선전해서 금메달을 따거나 좋은 성적을 내면 이것을 과거의 역사적 설움에 대한 보상이자, 미래의 국운의 징후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국 선수들은 한일전만큼은 져서는 안 된다는 각오가 충만하고 국민들도 한국 선수들이 통쾌하게 이겨주기를 염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일전에 대한 감정이 원초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허위의식’이다. 또한 한국 국민들은 항상 금메달 수와 순위에 집착을 한다. 메달수와 순위를 공식적으로 집계하지 않는 올림픽대회의 관행과는 다르게 한국 방송사들은 매일 메달 집계 상황을 실시간으로 올리고 국민들도 메달 수와 순위에 목을 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일본의 한 우익신문사가 당시 일본 축구의 영국 나카타에게 경기 전 일본 국가를 불러줄 것으로 요청한바 있다. 인터뷰를 한 기자는 한국의 예를 들면서 한국이 경기장에서 실력 이상으로 뛸 수 있는 것은 선수들과 국민들이 모두 태극기와 애국가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카타가 경기 전 일본국가인 기미가요를 목청껏 부르면 경기장과 TV를 시청하는 일본 국민들이 감동해서 축구의 혼이 경기장을 지배할 것이니 제발 한번만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카타는 경기장에서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기자의 이 질문에 “기미가요는 축구경기를 하기 전에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죠”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한국 선수들이 경기 전 가슴에 손을 얻고 애국가를 부르는 태도와는 분명 딴판이다.

국가의 운명을 건 스포츠

한국인들에게 스포츠는 단순히 오락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운명과 민족의 미래가 걸린 장엄한 순교자들의 예식이다. 서럽고 가난한 시절 손기정, 김일, 홍수환 같은 한국의 스포츠 스타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스포츠가 식민지-냉전-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국민들에게 전해준 경험적 감동은 국민들을 그렇게 애국적으로 응원하도록 만들었다.

한국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강고한 스타일을 형성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축적 때문이다. 한국은 선수들과 해설가들 그리고 국민들이 모두 합심해서 한국이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를 간절하게 염원한다. 선수들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몸으로 생각하며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한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 대부분에게 인터뷰를 하면 대부분 “국민들의 성원 덕분에”,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걸고”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방송사는 ‘태극전사’ 운운하며 국가주의적 이벤트를 호전적으로 선전한다. 해설가들은 원초적인 애국심을 여과 없이 내보낸다. 애국심으로 무장한 막장 멘트가 오히려 ‘쿨’한 스타일이 될 정도다.

국민들도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각종 애국적 구호들이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며 열렬히 응원한다. 경기장에 갈 수 없는 시청자들은 TV를 지켜보며 경기결과에 ‘일희일비’한다. 이러하니 스포츠가 한국 국민들에게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최근 젊은 세대들 중에는 애국적인 응원이나 관심보다는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마니아들도 있지만, 이들은 애국적 국민들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은 국가가 호출하는 애국주의와, 미디어가 증폭시키는 감정의 언어, 그리고 스스로 내면화한 민족주의로 인해 스포츠가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원한다.

게임 자체의 쾌락보다는 게임을 통해 재현되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상들이 한국의 승리 안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