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 신풍속도] 매운 맛 찾고 커피 마시고 미니스커트 입으며일상 속에서 위안 찾아

팍팍한 시기다. 누군가는 IMF 때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장기 불황의 조짐이 보인다고 겁을 준다. 언론의 호들갑이 하루 이틀이냐며 무시하고 싶지만 1000원을 들고 슈퍼마켓에 갔다가 아무 것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비로소 현실을 마주한다.

대학 동기는 회사가 곧 문을 닫을 것 같다는 흉흉한 소문을 연일 메신저로 보내온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고도 무릎이 꺾이는 이유는 이 상황이 언제쯤 나아질지 알 수 없다는 끝모를 불안감 때문이다.

최근 뉴욕 타임스에는 ‘불황은 충치와 함께 찾아온다’는 골자의 기사가 났다. 좋은 일 하나 없는 세상이다 보니 달콤한 것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 사탕과 초콜릿 판매가 급증하고 더불어 충치 환자까지 늘었다는 내용이다. 이와 함께 화끈한 디자인의 란제리도 잘 팔린다고 한다. 밖으로 나가면 돈 쓸 일 뿐이니 집에서 소박한 즐거움이나마 도모하려는 이들이 많은가 보다.

“좋은 기분이 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해요. 반대로 나쁜 기분이 들면 벗어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죠. 그 방법 중 하나가 소소한 지출이에요. 달콤하면서 비싸지도 않은 초콜릿이 가장 흔한 예죠.”

‘세상 밖으로 나온 심리학’의 저자 강현식 씨의 말이다.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사탕으로 혀를 달래기도 하고 란제리로 눈을 즐겁게 하기도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에 있어서 동서양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정작 한국에는 사탕 가게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성에 대한 터부도 남 다르다. 그렇다면 이 오랜 불황의 터널을 한국인들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을까?

단 것보다 매운 것?

정신적 고통이 찾아올 때 가장 손이 가기 쉬운 것이 음식이다. 우리는 종종 정신적 공허를 신체의 공복감과 착각한다. 또 포만감을 정신적 충만함으로 혼동하기도 한다. 각 경우에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에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중에서도 단 맛은 가장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맛이다. 원초적인 맛이라 함은 학습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쓴 나물이나 짭짤한 감자칩은 시간을 두고 습관을 들여야 맛을 알지만 사탕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맛있다고 느낀다. 심지어 불황에 담배나 탄산 음료의 소비는 줄어도 사탕과 초콜릿 판매량은 증가한다는 보고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디저트 문화가 들어오면서 단 맛에 대해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성인들 중에는 ‘단 것은 딱 질색’인 사람들이 많다. 한국은 오히려 매운 맛이다. 매운 맛이 주는 행복은 시간차 행복이다.

매운 것을 먹은 순간은 통각으로 인해 몸이 잔뜩 긴장하지만 곧 뇌에서 천연 통증 치료제인 엔도르핀을 분비하면서 몸이 이완되고 쾌감으로 이어진다. 그냥 즐거움이 아닌 고통 후 즐거움이라는 점에서, 동양의 문화는 서양 문화보다 은은하다는 사실이 새삼 증명되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 응큼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라면이나 삼각 김밥에서도 매운 맛을 강조한 제품들이 유독 인기를 끌고 있다.

소주, 그것도 안되면 커피

소주는 오랫동안 서민의 마음을 쓰디 쓰게 달래온 친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소주 판매량이 줄어든 것은 충격이다. 이제는 소주로 시름을 달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정도로 상황이 어렵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소주라는 것이 보통 혼자 다니지 않고 안주에 2차, 3차까지 몰고 다니기 때문에 이를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소주를 덜 마시게 된 것. 대신 엉뚱하게 커피의 소비량이 늘었다. 생활경제연구소 김방희 소장은 이를 커피 이펙트(coffee effect)라고 부른다.

“세계적으로 커피 소비량이 줄었는데 한국에서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죠. 돈도 시간도 없는 사람들이 소주 대신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보입니다. 커피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사치품이지만 어쨌든 술보다는 저렴하니까요. 불황이 장기화 되면 아마 커피의 소비량도 줄어들게 될 겁니다.”

미니 스커트 또는 란제리

미니 스커트와 불황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꽤 전통이 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제기된 이래로 꾸준히 반박당해 현재는 별 연관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미니 스커트라는 단어를 두고 동서양이 머리 속에서 떠올린 이미지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서 미니 스커트는 시선을 집중시키는 자극적인 패션의 대명사 격이다. 미니 스커트는 곧 서인영의 킬 힐이고, 소녀시대의 빨주노초파남보 스키니 진인 셈이다. 드러난 다리 위로 쏟아지는 남들의 이목은 축 처진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는 묘약으로 특히 여자들에게 효과가 좋다.

“불황에는 소위 ‘쎈’ 디자인이 잘 팔려요. 특이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을 수 있는 것들이요.” 슈콤마보니 이보현 실장의 말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불황과 미니 스커트를 말할 때의 미니 스커트는 짧은 치마, 즉 짧아서 원단이 덜 들어가는 치마를 뜻한다. 원단이 짧은 만큼 제작 비용이 덜 들어가 불황에 유행한다는 의미다. 시스루 룩(see-through look: 속이 환히 비치는 옷)과 클리비지(cleavage: 가슴 사이의 골)가 아무렇지도 않은 곳에서 미니 스커트를 시선의 집중과 연관시킨다는 것 자체가 귀여운 발상이다.

란제리도 미니 스커트와 마찬 가지로 우울한 마음을 ‘업(up)’ 시키는 효과가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는 없지만 패션의 자기 만족적 측면에서 본다면 과감한 란제리 역시 은근한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다. 보는 사람이 자신 외에 한 명 더 있다면 효과가 배가됨은 물론이다.

1-불황의‘커피 이펙트’소주 대신 커피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2-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감을‘업’시키는 란제리
3-사랑의 호르몬인‘페닐에틸아민’분비를 촉진시키는 초콜릿
4-개봉예정작‘박쥐’의 포스터. 흡혈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5-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안도감과 통제감을 주는 타로 점
6-숙면을 돕는 바디샵 '콰이엇 나잇' 제품들
1-불황의'커피 이펙트'소주 대신 커피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2-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감을'업'시키는 란제리
3-사랑의 호르몬인'페닐에틸아민'분비를 촉진시키는 초콜릿
4-개봉예정작'박쥐'의 포스터. 흡혈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5-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안도감과 통제감을 주는 타로 점
6-숙면을 돕는 바디샵 '콰이엇 나잇' 제품들

생각만하면 생각대로, 게임과 타로 점

여자들이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먹고 사는 ‘관계의 동물’이라면 남자들은 ‘성취의 동물’이다. 무엇이든 이뤄내야 하고 수행해야 한다. 이 특성은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는 게임시장의 규모와 무관하지 않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게임은 이들에게 누구도 줄 수 없었던 통제감을 선사한다.

비록 가상의 세계지만 자기 마음대로 영역을 설정하고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완벽하게 주어진 임무를 해냈을 때 느끼는 짜릿한 쾌감은 이들을 거의 중독 수준으로 빠뜨리고 있다. 덕분에 PC방은 연일 호황이다. 통제감으로 돈을 버는 또 하나의 아이템은 바로 점이다. 지난 주말, 타로 점으로 유명한 강남역의 한 간이 점집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3000원에 달랑 질문 하나만 받는다고 해도 1시간씩 기다렸다가 점을 보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팍팍한 오늘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내일은 오늘과 같지 않을 거라는 희망뿐이다. 설령 특별한 내일이 없더라도 미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은 반으로 줄어든다.

막 나가는 드라마와 피투성이 영화

“요즘 박연차랑 장자연이가 유일한 재미야.”

위로는 종종 남의 불행에서 오기도 한다. 가십 거리로 수다를 떨 때만큼은 자신이 처한 막막한 현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어서일까.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막장 드라마는 가십의 종합 선물 세트다. 스토리도 없고 개연성도 없지만 미친 듯이 발악하며 공멸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욕하고, 욕하기 위해서 다시 본다.

욕할 거리가 적은 날에는 입맛을 다신다. 드라마 ‘아내의 유혹’은 시청률 40%를 넘었고 비슷한 구조의 막장 드라마들을 줄줄이 양산하고 있다.

공포 영화 역시 힘든 시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 ‘드라큘라’가 나온 시기는 미국 대공황이 막 시작되던 1931년이었고 리메이크 되었던 1979년 역시 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불황이 전 세계를 덮은 때였다. 1998년도에는 유명한 뱀파이어 영화 ‘블레이드’ 시리즈가 등장했다. 피를 보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괴로움일 뿐이지만 사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쾌감을 느낀다.

강한 긴장 후에 찾아오는 이완은 흡사 극도로 매운 음식을 먹은 후에 느끼는 후련함처럼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최근 개봉 예정작인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흡혈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워낙 피를 좋아하는 감독이니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할 지 몰라도 우연치고는 재미있는 우연이다.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굿 나잇’ 용품

회사 걱정, 집세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 가뜩이나 지친 몸과 마음이 수면 부족으로 인해 더 상하지는 않을까, 공연히 걱정만 하나 더 늘어난다. 모든 것을 잊고 푹 잘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품들이 인기다. 코스메틱 브랜드 바디샵은 숙면을 장려하는 ‘콰이엇 나잇(Quiet Night)’ 라인을 출시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감정 정화 작용을 돕는 카모마일, 대추, 제라늄 등의 성분을 넣은 로션, 크림, 입욕제, 아로마 오일 등이 나와 있다.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 보들보들한 수면 양말은 G마켓 최고 인기 상품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고 베개, 우유, 안대의 판매도 늘었다.

힘든 시기에 작은 위안이나마 얻고자 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적정선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취미와 중독의 경계는 늘 아슬아슬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온통 빼앗길만한 짜릿한 자극에 쉽게 중독되는 사람들은 인간 관계가 원활하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관계로 채우지 못한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작은 즐거움에 집착하고 이 즐길 거리들이 또 다시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심리학자 강현식 씨는 이들을 위해 조언한다.

“사람은 무엇을 해서든지 현재의 불안감을 떨쳐내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요. 감각적인 즐거움은 당장의 괴로움을 줄여줄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더 안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어요. 단순히 자제하는 것보다 운동이나 영어 공부 같은 건설적인 일들을 찾아 나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불안도 일종의 에너지에요. 그 에너지로 못할 것이 사실 별로 없답니다.”

참고서적: ‘불경기 처방전’ 김대우 지음, 시공사
‘딜리셔스 샌드위치’ 유병률 지음, 웅진윙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