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업이 살길이다문화 마케팅에서 문화가 있는 기업으로 진화는 이윤 넘어 생존의 문제

두통 치통 생리통에 좋다는 한 진통제의 패키지가 최근 클림트의 그림 ‘아델 브로흐 바우어의 초상’으로 바뀌었다. 회사 측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 세기의 명작을 패키지로 사용했다고 밝히고 패키지를 바꾼 후로 매출이 20% 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통 치통 생리통이라는 문구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바우어 부인의 모습은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글로벌 기업으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모 전자 브랜드는 유럽의 유명한 궁전들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수백 년의 세월이 묻어 있는 오스트리아 쇤부른 궁의 오래된 벽에는 해당 브랜드의 LCD 디스플레이가 걸렸다. 유럽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현장에 발을 걸침으로써 그 이미지를 같이 입겠다는 전략이다. 이른바 문화 마케팅이다. 그렇다면 묻자. 이 기업들을 ‘문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케팅으로서의 문화, 장님의 코끼리

‘문화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은 개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기업의 경우에는 단순한 이미지 제고를 넘어서 수익 창출이라는 문제가 끼어 있기 때문에 더 절박해진다. 기업들은 오케스트라를 후원하고 자사 제품에 명화를 그려 넣는 방식으로 자사와 자사의 물건을 구매하는 고객들에게 상류 문화의 향기를 뿌려준다.

‘돈에 눈이 먼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공익적 기업의 옷을 입는 수확을 얻기도 한다. 기업의 모든 문화 마케팅이 얕은 상술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좀더 멀리 보고 직원들의 문화 생활에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

매주 회의 전에 시 한편을 낭송한다거나 부장, 과장, 대리가 사이 좋게 미술 작품을 관람하도록 지원한다. 문화 생활로 살찌운 창의력으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달라는 바람이다.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국내 기업들은 바빠졌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문화 마케팅을 시행하지 않는 기업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이 신종 마케팅은 실제로 기업의 매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문화가 왜 중요한 화두가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옆 집 담장 너머 본 것을 흉내내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문제는, 문화는 취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수많은 마케팅 기법 중 하나가 아니라 기업의 존폐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사실이다. 계속 코끼리 다리만 붙들고 있는 장님은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코끼리 코에 제대로 한 방 얻어 맞을 수도 있다.

삼성 딜라이트관

소비자의 웃음과 눈물을 이해하는 기업

“문화는 기업과 소비자의 기호 조작 수단입니다” 컬처마케팅그룹 김묘환 대표의 말이다.

과거에는 정보 전달 속도가 늦었다. 기업 간 기술력의 차이는 극명했고 소비자는 기업들이 어떤 일을 하는 지 모른 채 제품의 기능이 좋고 저렴하면 만족했다. 그러나 월드 와이드 웹의 등장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기술력은 불과 몇 일이면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품질로 승부한다’는 말은 과거에는 정직하게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미였지만 이제는 소비자의 요구에는 관심 없이 물건이나 만들겠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소비자도 변했다.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했던 사람들은 제품의 생산과 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원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소비자들이 무엇에 열광하고 무엇에 싫증 내는지, 소비자들의 코드 즉 그들의 문화에 제대로 공감할 수 있는 기업은 평생 고객을 얻게 되는 셈이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퇴출 위기에 부딪히게 되었다.

애플과 닌텐도는 소비자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향유 거리를 제공한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다. 반면 한쪽에서는 문화의 뜻을 잘못 이해해 기존에 하던 방식대로 스스로 ‘문화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소비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뿌리는 웃지 못할 촌극을 벌이고 있다.

소비자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문화적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문화적 기업뿐이다. 이제 기업들에게도 흉내가 아닌 진짜 자신들만의 문화가 필요하다.

앞으로 문화라는 단어가 기업에 있어서 효용의 측면이 아닌 생존의 측면으로 다가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감성을 원하는 소비자에게 품질 좋고 가격이 저렴한 상품으로만 승부하려는 생각은 여자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남자와 다를 바 없다.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자에게 최고급 드레스를 사주고 다시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별뿐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