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침전 등 예술·문예 이용과 음양오행 맞춘 음식으로 몸과 마음 바르게

16일 서울 세종로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지하교육장. 20~30대 여성 20여 명이 모여 바느질에 열중이다. 수강생들은 모두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이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곧 태어나게 될 아이에게 입힐 배냇저고리.

임신 5개월째인 수강생 김선영(29ㆍ여)씨는 “태교의 대부분이 옛날부터 이어져온 것이라 방법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며 “문예를 활용해 몸과 마음가짐을 정결히 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말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조선왕조의 태교법을 고증을 거쳐 재현한 왕실태교의 비법은 무엇일까.

음악 등 ‘예술’적 방법을 이용해 산모의 정신건강을 살피는 것이 첫 번째 비밀이다. 침전과 같은 ‘문예’적 방법을 동원해 산모의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했다. ‘음식’을 정갈하게 해 몸의 건강을 돕는 것을 최대한 세심하게 한 것도 왕가의 혈통을 보존해온 왕실태교의 비법이다.

김은영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왕실태교는 사가의 여인들이 들어와서 받는다는 점에서 사대부의 태교를 좀 더 엄격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며 “문예를 활용한 태교는 엄마의 기를 아이가 받으니 엄마가 선하면 아이도 선할 수 있다는 사전 예방적인 차원에서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슬을 켜되 피리는 불지마라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활용은 조선왕실 태교의 비밀 가운데 하나다.

왕실 임산부의 처소는 정숙을 유지했으며 궁중악사를 불러 가야금과 거문고를 연주하게 했다. 산모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피리’가 금기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이색적인 왕실 태교법이다.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고 산모의 정서를 다스리는 음악이 태교에 좋지만, 피리는 감정을 격하게 자극할 우려가 있어서라는 게 그 이유.

임신 5개월 째부터는 낮에는 당직내시, 밤에는 상궁ㆍ나인 등을 시켜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낭독하게 했다.

수양대군의 큰 며느리이자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 한씨가 쓴 ‘내훈’에는 “밤에는 소경으로 하여금 시를 외우게 하고 교훈적인 내용들을 말하게 해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대부의 태교 지침서였던 ‘태교신기(사주당 이씨, 19C초반)’에도 “오로지 사람을 시켜 시를 외우고 옛 책을 설명하거나 아니면 금슬을 타게 해야 하느니라. 이것은 잉부가 들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배냇저고리와 두렁치마

침전이라는 ‘문예’적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조선 왕실태교의 특징이다.

왕실에서는 산모가 직접 아이가 태어나면 입힐 무명 배냇저고리.두렁치마.턱받이, 쑥뜸 들인 배꼽받이 등을 무명 옷감으로 만들었다. 태어날 왕손이 입을 옷을 직접 준비하며 산모의 마음과 정신을 정갈히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왕실에는 옷과 이불을 만드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 그럼에도 왕비는 누비옷을 만들었다. “누비옷을 만드는데는 정교한 손재주와 섬세함, 정성, 집중력 등이 필요했기 때문에 누비질을 하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반듯한 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했다”는 게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실의 해석이다.

이는 산모가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똑같이 도움이 되지만 실용도가 낮으며 아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퀼트’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왕실태교에 ‘십자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 산, 구름, 학, 소나무, 물, 거북 등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을 수놓는 것은 왕비의 일과 중의 하나였다. 잉태한 왕비의 처소에는 어김없이 ‘십장생도’ 병풍이 쳐졌다.

음식은 음양오행에 맞춰서, 적당히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맞춘 ‘음식’ 역시 왕실태교의 방법이다. 음양오행에 기반한 유가의 ‘우주관’은 왕실 임산부의 식탁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왕실에서는 태교를 할 때 음식물을 각각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의 기운으로 나눠 음양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剋)에 기초해 음식을 먹이는 것이 기본이었다.

유산을 초래할 수 있어 태아에 상극인 음식은 당연히 피하게 했다. 소화를 촉진시키거나 혈기가 흩어지게 하는 음식이 그것이다. 산모에게 가능한 소화를 돕고 혈기를 모이게 하는 음식을 먹였다.

나무(木) 기운의 음식 역시 권했다. 태아에게 필요한 혈기를 만드는 곳이 간인데, 혈기를 모으는 음식물은 대개 신맛을 낸다. 임산부들이 초기에 신맛의 음식물을 찾는 이유다. 신맛 음식의 기운은 오행상 나무(木)에 속한다. 이에 해당하는 음식은 보리, 닭 등이 있다.

송시열이 문왕(文王)의 어머니가 행한 태교를 지침으로 기록한 ‘계녀서’에는 “설익은 음식은 먹지 말 것”,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과식하지 말 것” 등의 구절이 있다.

19C 중엽에 왕실의 출산을 담당하는 관청이었던 산실청에서 쓴 ‘임산예지법’에는 “출산 당월에는 굳은 수라와 차진 병식(떡과 음식)과 마른 포육과 마른 어물과 기름진 음식과 기름에 지진 지짐 등 소화하기 어려운 것은 먹지 말라”라는 내용이 나온다.

왕가는 포식을 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음식 태교에 있어 이치를 따지고 절제를 실천한 셈이다.

탯줄을 고귀하게 여긴 왕실 의례, 일제가 파괴


(좌) 명종 임금 태항아리 (우) 태자석

조선왕실에는 본래 '의례(儀禮)'를 해가며 탯줄을 귀하게 갈무리 하는 전통이 있었다. 화장품 원료 등 상업적 용도로 활용되기도 하는 현대의 탯줄 갈무리와 조선왕실의 전통문화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탯줄을 경시하는 풍토는 일제의 만행에 연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역사가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조선 왕실은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아이의 생명줄인 탯줄을 태우지 않고 흰 항아리에 담아 길지(吉地)에 묻었다.

'안태의례(安胎儀禮)'의 전통이 그것이다. 이는 생명의 시작인 탯줄이 아기의 장수.복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왕실은 '안태의례'가 왕조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것으로 여겨 중요한 국가 행사의 하나로 삼았다.

조선 왕실은 아이가 태어나면 자른 태를 바로 백자항아리에 넣어 산실의 좋은 방향에 뒀다가 3일이나 7일째 되는 날 깨끗한 물로 백번 씻고 향기로운 술로 한번 더 씻어 태항아리에 이중으로 담아 보관했다. 태항아리는 네 구멍을 빨간 끈으로 엮어 묶은 후 태를 씻은 날짜와 책임자, 태 주인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 붙였다.

태항아리에 담겨진 태는 돌함에 넣어 태의 주인과 묻은 날짜를 쓴 지석을 석실에 넣어 안장했다. 태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 태실에 석물을 쌓아 올리고 새로운 태실비를 아기태실비 옆에 세웠다.

각지의 명당자리에 있던 태항아리를 거둬 왕가의 정기를 말살하려 한 것은 일제였다. 일제는 전국에 흩어진 태실 27기를 파서 충남 서산 운남면 태봉리에 함께 묻었다.

김은영 학예사는 "일제가 국민의 결집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능이 모여있는 자리에 왕가의 태를 함께 묻은 것"으로 "죽은이를 위한 명당자리에 산 사람을 위한 태실을 모신 셈"이라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