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연재로 역사적 건물 설계자의 재발견… 시대의 교훈 전해

한 전직언론인이 이미 사라진 식민 유산인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조선총독부를 둘러싼 희대의 로맨스가 재조명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허영섭(54)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지난해 8월께부터 이달 13일까지 인터넷 블로그, ‘H씨의 세상구경(http://blog.naver.com/gracias1234.do)’에 지난 1996년 자신이 발간한 책 ‘조선총독부, 그 청사 건립의 이야기’ 개정판을 총 122회에 걸쳐 연재했다.

‘게오르게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의 재발견은 이번 연재의 성과다. 라란데는 조선총독부 기초 설계를 도맡았던 인물이다. 라란데는 총독부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14년 4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일제는 1926년 광화문을 헐고 경복궁 근정전 앞에 세운 총독부 건물 준공기념판에 라란데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그에 관한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일제가 당시로서는 동양최대의 동서양 절충식 건축 양식이었던 총독부 건물 완성의 공을 외국인에게 돌리기 싫어했던 탓이라는 게 허 전 위원의 해석이다. 철도호텔(현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건물을 설계한 사람도 라란데다.

기구한 운명의 ‘에디타 데 라란데(Editha de Lalande)’역시 허 전 위원의 연재를 통해 관심을 모으게 된 인물이다. 에디타 데 라란데는 게오르게 데 라란데의 부인으로 역시 프러시아인이었다. 에디타 데 라란데는 은행가였던 이모부의 손에 이끌려 일본 고베에 왔다 게오르게 데 라란데와 만나 14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라란데 사망 이후 5명의 자녀를 이끌고 프러시아로 돌아갔던 에디타 데 라란데는 일본 외상으로 베를린에 간 도고 시게노리(東鄕 茂德)와 만나 재혼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시게노리는 일본 패망 이후 에이(A)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시게노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 도공 박평의(朴平意)의 후예다.

일제의 식민 건축에 부역한 일본 지식인의 역할 역시 허 전 위원이 강조한 역사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블로그 내용에 따르면 라란데 사망 이후 조선총독부 설계를 승계한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ㆍ대만총독부 건물 설계자)는 일본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출신들을 건축 설계에 폭 넓게 참여시켰다. 도교제대 법학과 출신들은 총독부 건축 행정의 주축이었다.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에 선 것은 일본 육군ㆍ해군 사관학교 출신의 군벌이었지만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최고학부 출신들이 양심에 반하는 부역을 하며 뒤를 맡은 것이다. 비겁한 지식인의 초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셈이다.

반면, 철학가이자 민예연구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1921년 조선총독부 건축을 위한 광화문 해체를 앞두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한 바 있다.

허영섭 전 위원은 “며칠 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가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는 유럽이 동남아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유화적었다’고 망언한데서 드러나듯이 일본인들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며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앴다고 해서 역사적 식민통치의 흔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식민통치의 과거를 제대로 기록하고 역사를 기억하며 마음을 다잡자는 의미에서 개정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허 전 위원은 블로그에 연재한 ‘조선총독부, 그 청사 건립의 이야기’를 일제의 조선 강제 합병 100주년을 맞는 내년 개정증보판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