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의 것 반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경향 타고 예술계 재등장

손이 예술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보다 직접적인 예술과 인간의 소통을 이끌고 있다. 가공의 것에 반발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향이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인간성을 최대한 배제할수록 고급으로 여기던 모더니즘의 심미감은 손의 재등장과 함께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우리 예술계에 나타난 손의 재등장은 소통의 주체로서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요구가 커졌음을 증명한다. 지난 3월 5일부터 이달 24일까지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는‘Speaking with Hand’라는 제목의 손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이번 전시회 관람객이 평소보다 25%가량 늘어난 총 1만여 명 수준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고 있다. ‘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경북 포항시는 밀레니엄을 앞둔 지난 1999년 국토 최동단인 호미곶에 ‘상생의 손’이란 대형 조각품을 설치해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현대 미술의 주류는 손의 느낌을 최대한 배제하고 인공미를 발전시키는 모더니즘으로 발전해왔다. 도날드 주드는 손의 느낌을 최대한 배제해 스테인리스 나이프를 사용해가며 작품에 최대한 손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할 정도였다.

그러나, 손길을 작품에 남기며 인간과 예술의 직접적 소통을 꿈꾸는 포스트 모던 역시 반론적 성격으로 공존해왔다. ‘Speaking with Hand’에 나온 손 사진, 조각은 시대성을 보여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 작품인 ‘골무를 낀 손(1920)’은 당시 손이 예쁘기로 유명했던 작가 아내의 손을 찍은 것이다. 동시대의 두툼하고 굵은 여성의 손들과 비교하면 얇고 긴 사진의 손은 시대의 미감이 변했음을 보여준다. 산업혁명기 나타난 빈부격차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매리 앨런 마크가 찍은 ‘테레사 수녀, 메루트(1981)’는 주름지고 갈라진 기도하는 손에서 인간 상실의 시대상과 인간성에 대한 갈구를 보여주는 듯하다.

손은 작가와 예술작품의 관계에서 생명성이 있는 직접적 표현의 주체이기도 했다. 모더니즘 미술은 시각에만 집중하지만, 인간은 손을 통해서도 사물을 인지하며 의사를 표현한다는 면에서 보면 부자연스럽다.

잭슨 폴록은 1946년 마루바닥에 편 화포(畵布)에 공업용 페인트를 뿌려가며 손의 행위를 기록하는 이른바 ‘액션 페인팅’을 시작했다. ‘액션 페인팅’은 추상미술의 한 방법으로 전통을 이어왔다.

국내에서도 사람의 관계이자 이성주의에 저항하는 손 작품들은 지속돼왔다. 하나는 예술의 주체로서, 다른 하나는 예술의 표현대상으로서다.

예술의 주체로서 손을 활용한 대표적 국내작가로는 오치균이 꼽힌다. 최근 한 대형화랑에서 전시를 연 오치균은 붓 대신 손에 물감을 찍어서 화폭에 그림을 그려왔다. 캔버스 위에 나타난 강렬한 마티에르는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서 뿐 아닌 예술의 주체로서의 손의 역할에 주목하게 한다.

‘오브제’로서 손에 주목해온 작가들도 있다. 강관욱은 최근작 ‘구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손이 주제로서 강조된 조각을 해왔다. 주인공에 따라 각각의 입장의 차이가 손을 통해 강조된다. ‘구원’에서는 무언가를 간절히 기도하는 주름 깊게 파인 할머니의 손이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다.

생명성 있는 ‘소통’의 주체로서 ‘손’의 강조는 이성주의의 부작용, 복제와 기계를 통한 예술의 ‘아우라’ 상실 가속화에 맞서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는 “모더니즘은 남성, 백인 중심의 유럽 제국주의와 함께 시작해 과학과 이성의 판단과 표정만 남기고 인간의 흔적을 지우는 데 집착해 온 게 사실”이라며 “미술에서 손의 회복은 이성주의, 과학중심, 발전사관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인간 감정의 직접적 소통에 대한 회복의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