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밥줄·명예·지지자 건 싸움 해야 의미 가져

1-좁디 좁은 대한민국 연예계
2-화합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절친노트’
3-거침없는 독설로 유명한 신해철
1-좁디 좁은 대한민국 연예계
2-화합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절친노트'
3-거침없는 독설로 유명한 신해철

“나도 먹고 좀 살자.” 얼마 전 MBC <세바퀴>에서 김구라는 가수 김희철에게 푸념 섞인 하소연을 했다. 김구라의 ‘인터넷 시절’ 팬이라는 김희철은 김구라가 예전처럼 누구든 가리지 않고 독설을 뿜어내길 바란다.

하지만 그 연예인들과 방송을 함께하는 지금의 김구라는 그들에게 욕설을 하는 대신 일일이 찾아가 사과를 했다. 무명 시절에는 먹고 살기 위해 욕을 했고, 유명해진 뒤에는 다시 먹고 살기 위해 사과를 한 김구라의 이 기막힌 인생은 한국에서 디스 문화가 생기기 어려운 이유를 보여준다.

인터넷이든 케이블이든 인디든, 한국의 연예인들은 성공하려면 대부분 공중파 3사와 대형 기획사로 상징되는 메이저 시장에 진출해야 하고, 메이저 시장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이가 된다.

인디 출신 록 밴드는 음악 프로그램 대기실에서 자신들의 음악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은 트롯 가수를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디스 배틀’이었던 미국의 이스트 코스트 힙합과 웨스트 코스트 힙합의 다툼은 그들이 각자 안 봐도 아쉬울 것 없을 정도로 각자 미국 동부와 서부에 엄청난 시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언더 그라운드 래퍼가 과거에는 대형 소속사의 연습생일 수도 있는 한국에서 공개적인 디스는 자신의 입지를 좁힐 뿐이다. 한 때 인기 힙합 뮤지션들이 다수 소속된 YG 엔터테인먼트와 언더그라운드의 일부 힙합 뮤지션들은 신경전을 벌였지만, 지금은 합동 무대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디스 대신 화해가 강조된다. SBS <절친노트>는 매주 서로 불편한 관계였던 연예인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과정을 보여준다. 활동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얼굴도 보지 않고 지냈다는 R.ef의 멤버들은 <절친노트>를 통해 화해, 요즘은 마치 재결성한 것처럼 활동한다.

디스를 해서 관계가 끊어지면, 그들은 이 ‘좁은 바닥’에서 더 작은 시장만을 갖게 된다. 이승철과 결별과 재결합을 반복했던 그룹 부활의 김태원은 공식 석상에서 이승철에 대한 섭섭함이나 결별 당시의 상황을 말하지 않는다. 반면 익명을 통한 인터넷에서는 건전한 비판부터 연예인들에게 자살 충동을 일으킬 만큼의 끔찍한 욕설까지 수없이 많은 디스들이 올라온다.

그래서 대중문화업계는 디스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간접적이거나,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충족시킨다. 온 스타일 <프로젝트 런웨이>에서 정식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출연자들은 서로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내 옷을 빼면 다른 모든 출연자들의 옷은 싸구려 같아서, 트렌드에 뒤떨어져서, 독창적이지 못해서 모두 별로다.

그들은 아직 ‘업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거리낌 없이 디스를 할 수 있고, ‘메이저’에 진입하기 위해서라도 디스를 해야 한다. 또한 연예 기자들은 대중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들을 기사의 형식으로 ‘디스’를 시도한다. 권상우는 <프리미어>와 인터뷰를 한 뒤, 그 내용의 일부만 발췌해 보도한 기사들 때문에 큰 곤란을 겪기도 했다.

어떤 연예기자는 특정 연예인이나 제작사에 대한 안 좋은 기사들만 골라 쓴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연예 매체가 연예인의 이니셜을 거론하며 부정적인 뒷 소문을 양산하는 ‘이니셜 기사’는 한국식 디스의 가장 부정적인 형태다.

이런 코너는 연예인의 루머가 궁금한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해준다는 명분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매체와 연예인 사이의 이해 관계 때문에, 혹은 정당한 디스라고 하기엔 너무나 ‘쪼잔’하기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모으는 코너나 다름 없다.

한 지면에 특정 연예인에 대한 찬사와 그 연예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적은 이니셜 기사가 함께 올라오는 게 한국 연예계의 디스 문화다. 그나마 최근에는 ‘메이저’가 되지 못한 케이블 TV의 몇몇 연예 프로그램들이 연예인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그들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연예인의 활동 자체에 대한 정당한 디스가 아니라 떠도는 소문을 무차별적으로 풀어놓는 것에 가깝고, 그나마 ‘연예 전문가’들의 설문조사라는 방패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 미국 힙합계에서 래퍼 제이지와 나스는 서로에 대한 디스를 음악으로 만들어 ‘살벌하지만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한국의 디스 문화는 흥미로운 상품이 되는 대신 대부분 ‘뒷담화’나 ‘비판을 가장한 욕설’로 바뀔 뿐이다. 물론 디스가 흥미로운 엔터테인먼트가 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신해철은 비꼬는 의도로 북한의 로케트 발사를 축하하는 글을 썼다가 친박연대의 송영선 의원에게 “김정일 밑에서 살아라”라는 디스를 당했고, 이에 “친위대 행사에 참여한 송의원은 천황 밑에서나 살아라”라는 독한 디스로 응수했다. 얼마 전 입시학원 CF로 여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던 신해철은 이 설전을 통해 다시금 이슈메이커로 부각 받았다.

신해철의 말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해철이 송영선 의원에게 쏟아 부은 공격이 대북 문제에 강경 일변도인 보수 우익에 대한 비판적인 세력의 입장을 대변해줬기 때문이다. MBC <무한도전>은 ‘김연아 특집’을 하며 “예능의 인재를 키워온 <무한도전>이 세계의 리더를 낳았습니다”라는 자막으로 “고대가 김연아를 낳았다”며 불과 입학 한달 밖에 안 된 김연아를 광고에 이용한 고려대학교를 디스, 고려대학교의 행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했다.

디스는 단지 “쟤 싫어”가 아니라 그것이 특정 계층, 혹은 지지자들의 입장을 대변할 때 위력을 갖는다. 미국의 힙합씬이든,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이든, 그들의 디스는 개인적인 갈등인 동시에 그들의 지지 계층의 입장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건 디스가 자신들의 밥줄을, 명예를, 지지자들을 건 싸움이 될 때 흥미롭다는 의미다. 남 욕 하는 건 그런 일이다. 제대로 하려면, ‘먹고 사는 일‘을 걸고 해야 한다. 몇 년 뒤에 먹고 살겠다며 사과할 디스 따위 하지 말고 말이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