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과 함께 영원히 사는 명사들]故 장영희 교수·정은임 아나운서·시인 기형도 등 삶의 자취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신파극에 나오는 전형적인 대사처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파극의 대사는 억지 눈물을 강요하지만, 이들이 살고 간 삶의 흔적과 후대에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종종 살아갈 힘과 희망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우리 안에서 반추되고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이들이 하나의 신화처럼 우리에게 되새김당하는 것은 그네들의 보통 사람들과 다른 극적인 삶에서 비롯한다. 청천벽력 같은 불운의 연속에도 꿋꿋이 운명에 맞서며 오히려 ‘희망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어떤 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힘든 시기를 살고 있는 동시대 사람에게 큰 힘이 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지 않고 치열하게 살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는 남은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20대에 모든 것을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20대에 머물며 살고 있는 제임스 딘, 리버 피닉스 같은 요절한 천재도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회자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격려하다

얼마 전 ‘영원한 문학소녀’이자 명수필가였던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잇따른 암 선고와 투병생활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자신의 밝은 에너지를 글과 강의로 전파해왔던 그였기에, 부고를 접한 이들의 슬픔은 단순한 슬픔 이상의 것이었다.

지난 11일 빈소가 마련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학교 관계자와 선후배, 제자, 동료 가톨릭 신자들의 방문이 이어지면서 고인의 빈 자리를 실감케 했다. 빈소를 직접 찾지 못하거나 장 교수의 글을 읽고 그의 고정 독자가 된 사람들은 블로그를 통해 고인을 추억하고 명복을 기렸다.

그의 글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던 것은 (이렇게 소개되기를 바라지 않겠지만) 그 자신이 온갖 ‘불행의 요소’를 안고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후 1년 만에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은 1급 장애인이었고, 2001년 유방암에 걸렸다가 완치됐지만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해왔다.

다소 비현실적이라고 할 만큼 불운했던 일들을 자신의 몸 안에 담고 살아왔지만, 그는 절망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하는 ‘희망 메신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가 낸 두 권의 수필집인 ‘내 생애 단 한 번’과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일상의 작은 행복을 담아 독자들에게 순수문학의 참맛을 선사해 수많은 ‘장영희 팬클럽’을 만든 저서다.

‘암 투병’을 하는 ‘장애인’이라는, 범인(凡人)으로서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그는 늘 소녀처럼 웃으며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삶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그의 삶 자체가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던 셈이다.

그가 죽음에 맞서 보여줬던 강력한 희망의 힘은 그대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고, 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도 오롯이 담겼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를 것이고, 그럴 바엔 노래를 부르는 게 낫다고.

갑자기 물때가 바뀌어 물이 빠질 수도 있고 소녀 머리 위로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구해줄 수도 있다고. 그리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영화처럼 살다가 영화가 되다

1990년대 초반, 지금처럼 수많은 영화잡지들이 명멸하기도 전에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 DJ였다. 지금은 벌써 3040세대가 된 중장년층 영화팬들에게는 아련한 추억 같은 이름, 바로 정은임이다.

예전에 문학평론가 김현이 ‘행복한 책읽기’로 책벌레들을 행복하게 했다면, 정은임 아나운서는 ‘행복한 영화읽기’로 영화팬들을 즐겁게 했다. 그는 MBC에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진행하면서 당시 영화 관련 정보에 목말라하던 영화팬들의 기대에 십분 부응했다.

이 프로그램은 기존의 방송이 영화음악에 치중하던 것과는 달리 ‘영화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고민’을 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특히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한 편의 영화를 반찬으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통렬하게 비판을 가하기도 했던 것은 아직까지도 영화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감미로운 추억이다.

1-서강대 장영희 교수
2-정은임 아나운서
3-유재하
4-김현식
5-시인 기형도
6-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시인 20주기 추모문집

아직 인터넷도, 심지어 PC통신도 등장하기 전의 지형에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 ‘키노’와 ‘씨네21’ 등장 이전에 씨네필들을 흡수하고 양산했던 영화 전문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지금의 영화 관련 TV프로그램처럼 오로지 문화와 교양으로서의 영화에만 치중하진 않았다. 평소 노동조합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던 그는 볼셰비키의 ‘인터내셔널가’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트는 등 ‘소신 있는’ 진행으로 청취자들을 감탄과 불안의 양가적 감정으로 몰아넣었다.

또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강제철거의 부당성에 대한 내용으로 오프닝 멘트를 하는 등 전형적인 영화 프로그램의 격을 깨는 컨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자신이 영화팬이기도 했던 정은임은 1995년 프로그램이 폐지되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한국의 영화마니아’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으며 전문가로서의 길도 걸었다. 2004년 교통사고로 35년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마무리한 정은임은, 자신이 좋아했던 리버 피닉스처럼 치열한 삶과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화처럼 머물러 있다.

나이와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의 재능

1990년 전후엔 유독 많은 명사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기형도, 김현과 같은 문인에서 유재하, 김현식 같은 가수들이 차례로 죽어갔고, 이들 중 몇몇은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올해 20주기를 맞아 추모문집 발간 등 다시 한 번 조명되고 있는 기형도는 문학계를 넘어 범 문화계에서도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만 서른 살도 채 못살았던 청춘이었지만 그렇기에 영원히 젊은 기형도로서 문청들에게 그 특유의 우울한 매력을 영원히 무한발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할 당시 그의 시를 평했던 당대의 문학평론가 김현은 기형도를 가리켜 ‘젊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시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형도의 시에서는 늘 죽음의 냄새가 배어있다는 것이다. 기형도의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을 맡았던 김현은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빨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쓴 바 있다.

김현은 또 “누군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사라져 없어질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시들을 읽고 기억한다면 그의 육체는 사라졌어도 그는 죽지 않을 수 있다”고도 말했는데, 올해 나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로 기형도는 문청들의 가슴을 헤집고 있다.

기형도가 영원히 시를 멈춘 이듬해에 타계한 김현은 시인 황지우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평론가’라고 추앙했던 인물. 약관 20세에 평론가로 등단해 49세로 숨을 거두기까지 그는 23권의 개인 저서와 6권의 공저, 13권의 편저, 15권의 역서를 간행했고, ‘전집’은 사후 3년 만에 16권으로 출판됐다.

엄청난 저술 활동을 벌이면서도 수준 높은 평론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엄청난 분량의 꼼꼼한 책읽기에 기인한다. 방대한 독서량과 타고난 통찰력은 곧 좋은 신인을 발굴하고 인정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치열한 독서와 비평 작업의 기저에는 4ㆍ19로부터 시작된 격동의 역사 속에서 문학은 무엇이고 문학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종석은 김현에 대해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번째 비평가이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평론가를 배척하는 창작자들마저도 그를 인정하고 반추하게 하는 것은 첨단 시대를 걷는 오늘날에도 문학과 지성, 비평에 대한 김현의 태도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