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애도의 문화] 애도와 죽음에 대한 인문학적 질문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대담

시대의 징후는 일찍이 감지되었다.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소설가 박범신은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칼럼 ‘갈망이 깊어지는 사회’에서 “자꾸 조금씩 목이 졸리는 느낌”이라고 썼다.

전달 용산 철거민 참사가 일어났고, 막 일제고사 파동이 있었던 참이었다. 그 즈음 또 몇 건의 살인과 방화, 강도와 강간, 각종 사건사고가 벌어졌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 것쯤이야 자질구레한 일상이 된지 오래이기에.

그런데 박범신은 “이 모든 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밀하게 한통속으로 맺어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가 김수환 추기경을 애도하는 긴 행렬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 살 수는 없다는,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을 본 것은 그런 연유였다.

데자뷰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끝내 가버린 이곳에 행렬이 재현됐다. 더 길어졌고 더 널리 퍼졌다. 그만큼 갈망이 깊어졌다는 것일까. 그 장중함 속에서 갈망과 종종 절망이 겹쳐졌다. 이들이 손에 쥔 촛불이 희망이었던 것이 불과 1년 전이다.

매일 온갖 매체에서 벌어지는 ‘범인’ 가려내기, 잘잘못 따지기, 몰아 세우고 다그치기, 첨예하고 선명한 말들의 공방만으로 이들의 마음을 전부 헤아릴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말해질 수 있는 것, 보여질 수 있는 것”일 뿐이다. ‘범인’을 밝혀 단죄하고 나면 과연 이, 말해질 수도 보여질 수도 없는, 깊은 갈망과 절망도 해소될까. 졸린 목이 후련해질까.

이 한바탕의 소란에 휘둘린 후 남겨진 삶들이 문제였다.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것도 스스로 삶과 사회와 시대를 돌보려는 의지를 돋울 수 있는 명석하고도 사려 깊은 질문을. 도움이 필요했다. 얼마 전 본 한 신문기사의 제목이 떠올랐다.

“당신은 이 사회, 삶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나요”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의 인터뷰 기사였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안정돼 있으면 삶이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잖아요. 지금은 그야말로 혼란기이고 시대적 전환기잖아요. 이럴 때는 인문학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죠. 내가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건가.”

그래서 인문학에 물어보기로 했다. 지난 28일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조한혜정 교수와 이 학교 문화학과 박사 과정에 있는 우리신학연구소 엄기호 연구위원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들을 함께 고민해주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요. 이 죽음은 애도가 무력해질 정도로 이미 너무나 정치화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조한혜정 애도의 개념이 지금처럼 부각된 것은 미국의 9.11 테러 이후입니다. 이 애도는 우리가 통제,관리할 수 없는 처절한 비탄의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근대의 논리를 넘어선 것이지요. 9.11 테러가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힘의 싸움으로 이어지면 상황은 계속 망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테러를 응징하자’는 목소리는 상황을 전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디스 버틀러 같은 이가 연구한 것이 이런 맥락이죠.(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의 관점에서 현대 사회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애도는 정치의 목적이 아니다.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 ‘불확실한 삶’ 중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도 사회적으로는 9.11 테러와 비슷한 재앙으로 볼 수 있죠.

다른 재앙들과, 즉 기후 온난화나 전염병 같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는 일들과의 관련 속에서 이 사건을 본다면 어떻게든 금방 고쳐보자는 태도를 갖기는 어렵습니다.

- 그렇다면 애도는 결국 이 시대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겠군요.

조한혜정 이제까지는 삶만을 생각한 시대입니다. 예를 들면, 시대 전체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벌려고 애썼던 것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렇게까지 괴물처럼 살지는 않을 텐데 말이죠.

인류학적으로 보면 구성원 개인이 돈을 많이 벌어도 언젠가 죽은 후에는 남에게 주어 무로 환원하고 대신 명예와 동경을 얻는 체제가 있어야 사회가 존속되는 건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체제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장례식이 상징적이죠. 언제부터 장례식이 죽음을 보는 자리가 아니라 삶의 위세를 경쟁하는 자리가 되어버렸잖아요. 거기에 화환이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해졌고요. 인류의 어떤 시대보다도 세속적인 시대예요. 죽음이 닥쳤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단절된 시공간에 들어가서 삶을 바라봄으로써 삶을 다른 식으로 사유하게 되는데, 그 전환의 시공간마저 없어져 버렸어요.

이것을 되찾지 않으면 문명적 전환을 하기 어려운 거죠.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는 애도의 개념은 이런 의미이고, 이번 일도 그런 태도로 접근해야겠죠.

(좌) 엄기호 연구위원 (우) 조한혜정 교수

-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의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엄기호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남의 죽음처럼 안 느껴지지 않나요. 이는 그만큼 사람들에게 몰락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예요. 예를 들면, 1997년 IMF 전에는 사업을 하다 망하는 것이 예외적인 사건이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안 망하는 것이 예외적이잖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절대 몰락하지 않을 것 같았던, 권력의 정점까지 갔던 사람마저 얼마나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보며 자기동일시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다못해 이명박 대통령마저도 이번 사건에서 자신의 임기가 끝나고 난 후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죠.

- 그래서일까요. 허탈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엄기호 노 전 대통령이 우리가 이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분열을 잘 보여준 인물이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우린 다 분열적이거든요. 예를 들면 참교육을 논하고 전교조에 몸 담으면서도 자신의 아들딸은 과외를 시키는 것처럼요.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도 끝까지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서 이런 비극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하면서도 “대통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다”는 식으로 자신의 영혼은 ‘저기’에 두었죠.

심지어 국가인권위원회가 반대 의견서를 제출하자 “당신들은 그거 하라고 있는 것”이라며 기뻐했습니다. 굉장히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 행동인데도 도대체 우리도 그렇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지 않나요. 그런 데 공감한 거죠.

조한혜정 엄기호 씨가 이야기한 대로 노 전 대통령이라는 인물도, 이 사건도 다 사람들 각자의 삶과 연결되는 거예요. 단지 ‘노무현’을 지키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가 상징한 가치,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해서 애도한다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만큼 우리의 생존 자체가 벼랑 끝에 섰다는 거죠.

이런 인식에서 우러난 애도 속에서 ‘공통의 감각’을 경험해야 해요. 우리는 그 분이 간 것에 대해 함께 예의를 표하며 같은 장에 있는 존재라는 감각 말입니다. 그로 인해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모두가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죠.

- 김수환 추기경 선종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사람들이 스스로 전통적 제의와 유사한 애도의 형식을 구성하는 것을 보면 이런 죽음이 단지 세속적,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애도하는 이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애도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조한혜정 애도의 시공간은 세속적, 일상적 시공간과 다르게 때문에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은 굉장히 문제적입니다. 자칫 말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근대적 패러다임에 갇힐 수 있거든요.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현들을 나름대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 딜레마인 것 같습니다. 지금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미디어에는 섣부르고 공격적인 말들이 너무 많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든 면과 전파를 채워야 하니까 당장 말로 대답할 수 있는 것만 묻고 다닌 결과인 것 같습니다.

조한혜정 차라리 백지를 내던지, 이철수의 판화 같은 것만 중앙에 하나 내는 식의 시도도 있으면 어떨까요. 지금은 너무 소란스럽고, 도대체 이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목소리가 크고 목적을 빨리 달성해야 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전유해 버릴까봐 염려가 됩니다.

애도 없이 그렇게 되면 다시 이전의 부패한 상태로 돌아가기 쉽겠죠. 이럴 때일수록 애도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과 죽음의 차원에서 성찰하면 인간으로서 예의와 품위를 지키면서 사는 방법들이 보이거든요.

- 애도의 행렬을 보면서 그 발걸음이, 묵묵하고 정성스러운 태도가 앞으로 우리 일상에도 깃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한혜정 삼보일배 같은 거죠. 미안해하고 겸손해지는 애도의 몸짓이자 시위의 형식입니다.

엄기호 그 몸짓엔 죄책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비판했던 사람들도 냉소적이었던 사람들도 모두 죄책감을 느끼고 있잖아요.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사람을 죽일 수 있는)악이 얼마나 평범한 것인지 스스로 깨치고 있는 거죠. 언론도 마찬가지예요.

소위 진보적인 신문들도 지금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검찰 수사 기간 동안 보도했던 것을 보면 다른 신문들의 논조와 다르지 않거든요. 그가 산다는 것 자체를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았던 만평도 있고요.

그러다가 정말 돌아가고 나니 이명박 대통령이나 검찰만을 악마화한다고 이 ‘악’이 해결이 안 되는 거죠. 스스로 공범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하는 도착적인 사과의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중앙도서관에 ‘김동길 교수 사죄하라’는 대자보가 붙어 있더군요. 김동길 교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감옥에서 복역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쓴 것에 대해 사과를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분노도, 그 방법도 이해는 됐지만 또 다른 표적을 만든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엄기호 면피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래 그렇게 행동해왔던 사람들이죠. 특별히 그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그보다는 죄책감에 대한 자기 반성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조한혜정 애도의 시대는 자성과 반성의 시대죠. 분노를 외부에 투영하기보다 스스로, 신성하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함으로써 타도와 대립, 힘의 결투를 중단해야 합니다.

엄기호 “노무현을 죽인 것은 검찰”이라는 식으로 특정한 사람을 악마화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검찰은 비판 받아야 하고 제도도 바뀌어야죠.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을 수사한 검사가 우리 생각처럼 어떤 권력욕, 이해관계 때문에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하게도 검사가 하는 일을 수행한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만큼 악이 편재해 있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이런 식의 애도 문화를 체험한 다음 세대는 좀 달라질까요?

조한혜정 현장에 나온 아이들도 애도를 하는 것인지, 또 다른 세속적 정치적 투쟁의 장을 목격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역사 속에서 이런 경험을 계속 되살려준다면 좋아지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선행학습 시스템이 아이들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딴 데 한 눈 못 파는 아이들은 죽음도 보지 못하고 애도가 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측은지심을 믿는 거죠. 이번 애도의 시공간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런, 설명할 수 없는 상황과 감정을 직시하고 통과해나가려면 개개인도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적인 능력과 감수성이 필요하니까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요.

조한혜정 ‘말이 없음’의 시공간에 있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요가나 명상을 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겠죠. 근대 자체가 말의 시대이지 않나요. 그것을 성찰하려면 말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겪고 깨쳐야 할 것 같습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