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벽을 넘어] 집단사고·이념의 사유화 등복합적 원인 관계회복과 관용으로 풀어야

#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10일 경찰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수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6ㆍ10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이 서울광장에 차벽을 설치하거나 광장 진입을 막지 않아 큰 충돌은 피했으나 집회 참가자들이 밤늦게까지 태평로 일대 차로를 점거하고 광화문 방향 진출을 시도하면서 크고 작은 마찰이 빚어졌다. (한국일보, 6월 11일자)

# 20대 여성 A 씨는 몇 주 전 남자친구에게 ‘우린 잘 안 안 맞는 것 같아’란 문자 메시지 한 줄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그녀는 가슴이 먹먹하고 숨을 쉴 수가 없어 하루종일 헤어진 남자친구의 미니 홈피를 기웃거렸다.

그가 자신을 일촌에서 제외하지 않은 것을 미련이 남아서라고 굳게 믿으며 ‘옛날이 좋았어’같은 글이 올라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기뻐했다. 이런 일희일비는 그가 새로 사귄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책 ‘도시 심리학’ 21쪽)

전혀 다른 앞의 두 이야기는 사실, ‘소통의 부재’란 닮은꼴 사례다. 전자가 우리 사회 전반에 관한 소통 부재 현상이라면, 후자는 개개인이 느끼는 소통 부재의 이야기다. 클릭 한 번이면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대화하는 지금, 사람들이 소통의 부재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빨라진 리듬 달라진 사회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건국대 의과대학 교수)는 “과거 80~90년대와 비교해 소통의 리듬감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전화에서 휴대전화로, 편지에서 이메일, 메신저로 소통의 방법이 달라지면서 ‘소통의 부재’를 느끼는 지점도 빨라진 것이다. 과거 소통의 부재를 느끼는 시간이 짧게는 몇 시간(전화 메시지를 남기고 연락을 받는 시간), 길게는 수 주일(편지를 주고 받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몇 분에서 길어도 한 나절 만에 소통의 부재를 느낀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타인과 ‘항상 관계를 맺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6개월이나 1년에 한번 얼굴을 보지만 블로그나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를 들어가 상대방의 일상을 언제든 알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기실, 블로그를 통해 보는 일상은 상대방이 ‘보여주고 싶은 단면’일 뿐이다.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쿨 릴레이션십(cool relationship)’이 생기는 지점이다.

하 교수는 “격정적으로 토론을 하거나 눈을 마주치고 얘기하는 관계는 과거에 비해 실제로 더 줄어들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있음에도 ‘진심이 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진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최근 저서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진정 소통을 원한다면 그 정치경제적 기반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인프라’를 외면한 채 소통 부재의 책임을 개인과 집단에만 물어선 답이 나오질 않는다. 정치경제적 기반은 문화를 생산하고, 문화는 다시 정치경제적 기반을 생산하는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구분은 어려우며, 결과가 원인으로 부활하는 순환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소통법’ 5쪽)

이 책에서 그는 우선,집단 사고가 소통의 부재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집단이 하나의 이슈에 집중하면 의견이 대립하는 경향을 띠며 결국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인터넷 등 무수히 많은 정보는 소통의 균형감각을 길러주기보다 ‘내 의견’을 강화하는 데 쓰인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이 사회적 소통 과정에서 거세되면서 양 극단의 의견으로 표출된다.

책은 개인보다 사회적 소통 부재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개인간 소통의 부재를 성찰할 때도 이 분석은 유효하다. 소통의 부재를 호소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이 취합한 정보를 ‘내 의견’을 강화하는 데 쓰고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지난 해 가을 결성한 ‘소통 포럼’에서 ‘우리 사회의 소통을 막는 10가지 이유’를 제시한 바 있다. 승자 독식주의, 연고주의, 초강력 중앙집중주의, 서열주의, 지도자 추종주의, 극단주의, 이념의 사유화 등이다. 이중 ‘이념의 사유화’는 소설가 김훈 씨도 에세이와 인터뷰를 통해 종종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이 사회의 지배적 언론과 담론들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해버리는 거예요. 그걸 뒤죽박죽으로 말을 하니까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이런 언어가 횡행할수록 인간 사이에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 심화되는 것이고 이 단절이 지금 거의 완성되어 있는 것 같아요.”(에세이 ‘바다의 기별’ 135쪽)

즉, 최근의 소통 부재는 소통 리듬감의 변화, 집단 사고, 이념의 사유화 등 복합적 원인으로 일어난 현상이라는 진단이다.

소통을 위하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 걸까?

하지현 교수는 소통에 문제를 겪고 있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통의 부재는 상대방과의 ‘관계문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소통 문제로 상담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소통이 안 된다는 것’만 답답하지,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릅니다. 소통을 할 때, ‘상대방과 내가 대화의 원칙을 공감하는가’, ‘왜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가’ 이 부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중문화 평론가 이영미 씨가 제안하는 방안도 이와 비슷하다. 최근의 ‘소통 부재’ 현상에 대해 그는 “소통의 부재라기보다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이라고 본다”며 “일례로 최근 6월항쟁 집회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각계의 이해관계로 소통이 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소통부재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소통의 부재가 사회적 이슈로 나온 경우는 수면 아래 가라 앉아 있을 때보다 오히려 소통이 잘 되는 경우라고 봅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이 말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하죠. 즉, 표면과 이면이 같아야 진정성을 갖습니다.”

우리사회 소통에 관한 의견을 피력해 왔던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지난 해 칼럼 ‘쇠고기 문제와 반성의 이유’에서 “성공적인 소통은 신뢰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실천되는 현실에서 온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보수진보, 좌우의 소통보다 단절이 더 심각해졌다”는 질문에 대해 “이론으로 사실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사실 존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론이나 사실적 정당성을 자기 정당성으로 만들어서도 곤란하다. 이론과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것이 내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이명박 정부가 규제를 풀어야 한다면, 그 이유를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설명해야 한다. 진보가 거기에 반대하려면 사회 전체적 관점에서 어떻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보다 너그럽고 관대하게 생각해야 한다.”

관계 회복과 상대방에 대한 신뢰, 타인을 이해하는 관용과 통합의 자세. 이 시대 소통의 부재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