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벽을 넘어] 사이버 세상의 나와 현실의 나의 괴리사람들과의 소통 어렵게 해

1-영화 '김씨표류기'
2-KBS '솔약국집 아들들'
3-SBS '시티홀'

“저는 남들 앞에서 말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한 남자가 더듬거리며 지하철의 시민들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그 지하철에는 PC통신으로 한 여자를 알게 된 남자도 있었다. 1997년의 영화 ‘접속’은 한국에 닥칠 소통문화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었다. 2009년에는 누구도 소통을 연습하기 위해 지하철에 가지 않는다.

1997년 지하철에 있었던 또 다른 남자들처럼, 사람들은 컴퓨터로 타인과 대화한다. 2002년 영화 ‘후아유’에서는 이미 게임 아바타를 통해 대화를 시도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케이블 TV의 게임 채널에서 온라인 게임의 캐릭터들이 가상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몇 년 전 이야기다.

소통 과잉 시대 외로운 사람들

소통을 타인과의 대화로만 한정한다면, 한국은 소통부재가 아니라 소통 과잉의 나라다. SBS ‘시티홀’에서 시장 선거에 나선 10급 공무원 신미래(김선아)가 인터넷을 통해 유권자들과 소통하면서 지지도가 올라가는 것처럼, 인터넷이 한 사람의 메시지를 전국민에게 알리는 것은 이제 드라마의 클리셰(상투적 표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소통과잉의 온라인에서는 매일처럼 소통 부재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인터넷 사이트 디씨인사이드의 ‘아웃 사이더’ 갤러리에는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인터넷에서는 모든 사람의 글에 쉽게 댓글을 남기는 활동적인 네티즌들이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친구 한 명을 쉽게 사귀지 못한다.

그들은 종종 방에서만 생활하느라 음식쓰레기들이 가득해진 방의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그들은 컴퓨터 앞에서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가족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KBS 드라마 ‘남자이야기’에서 천재 주식투자가로 나오는 ‘마징가 헌터’는 21세기 소통 부재형 인간의 캐리커처다. 그는 컴퓨터 앞에서처럼 헤드셋을 끼지 않으면, 타인과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KBS 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는 이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살인죄로 10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낸 박인순(김현주)은 출소 후 세상의 편견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사람을 구한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 ‘지하철녀’로 유명세를 타고, 얼마 뒤에는 살인죄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기가 급추락하는 경험을 겪는다.

그 사이 그의 어머니는 박인순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언론 플레이를 하고, 그 과정에서 박인순과 어머니 사이는 벌어진다. 사이버 세상에서의 소통은 나와 또다른 나를 만들어내고, 그럴수록 실제 나는 오프라인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소통에 필요한 건 진심

‘후아유’에서 게임 아바타로만 만났던 여자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진짜 자신을 밝히기 어려워하는 것은 2009년에 그대로 현실이 되고 있다. 영화 ‘김씨표류기’에서 여자 김씨(정려원)는 집안에서 미니홈피를 관리하고, 셀카를 찍고, 인터넷에서 수많은 댓글을 달지만 누구와도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가 대화에 대한 의지를 갖는 것은 망원경으로 보이는 무인도에 있는 남자 김씨(정재영)를 발견하면서부터다. 온라인의 소통은 오프라인과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지만, 스스로를 점점 더 안으로 파고 들게 만들고, 자신과 온라인의 인격을 다르게 만든다.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SBS ‘절친노트’는 소통과잉의 시대에서 소통부재를 겪는 현대인이 소통을 재개할 수 있는 방식을 알려준다. 서로 친하지 않은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절친 하우스’에서는 출연자들이 MC의 지시에 따라 다양한 스킨십을 유도하는 게임을 한다. 그들은 서로를 소개하며 노래를 부르고, 함께 손을 묶고 밥을 먹는다.

불편한 사이로 알려진 연예인들이 나오는 ‘절친노트’는 보다 극적이다. 말 한마디 건네기 어려운 사이인 출연자들은 다양한 게임을 통해 좋든 싫든 대화를 시작하고, 프로그램 후반에는 둘만 남아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온라인의 대화는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의 대화는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시간이라도 그 마찰을 치러낼 수 밖에 없다.

KBS ‘솔약국집 아들들’의 송선풍(한상진)이 일과 공부 외에는 세상 어느 것에도 큰 신경을 쓰지 않던 생활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은 한 여자가 자신에게 예상치 못한 포옹을 했을 때부터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무표정한 금자씨(이영애)가 인간적인 표정을 되찾는 것은 해외로 입양돼 영어로만 이야기할 줄 아는 딸과 통역을 통해 이야기를 하면서 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때부터다.

1997년의 ‘접속’이 새로운 소통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2009년의 ‘김씨 표류기’는 새로운 소통의 시대를 지나 다시 소통의 의미를 복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진정한 소통에 필요한 건 소통을 쉽게 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소통의 모든 순간을 견뎌낼 수 있는 진심이다. 모두가 쉽게 소통하고, 쉽게 소통을 포기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사람들이 소통의 마찰이 주는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 Lost in translation’은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두 남녀가 동경의 거리 한복판에서 대화를 나눈다.

주변의 일본인들은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모른다. 반대로, 그들은 오직 상대방과 대화할 수 있다. 소통부재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그들은 소통에 대한 절실한 마음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거리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집에서도 우리는 소통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소통을 시작할 것이다. 지하철에 나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