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스토리텔링] 누구나 쉽게 이야기 생산·소비하는 디지털 시대'호모나랜스' 꿈꿔

1-베컴 '아디다스'
2-이영애 '자이'
3-스타벅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날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끝없는 이야기(never ending story)’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소설, 영화와 같은 고전적 서사 장르뿐 아니라, 게임, 광고, 테마파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스토리텔링은 당연한 레드 오션(red ocean)이 되어버렸다.

대중은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성공 스토리가 담긴 아디다스를 신고,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듯 스타벅스를 마시기를 원한다.(스타벅스의 로고는 세이렌이다) 브랜드 없는 아파트보다 이영애가 살고 있을 법한 ‘자이’에서 살고 싶어 하고, 이름 모를 들꽃이 만발한 시골길보다 공간마다 테마가 있는 헤이리를 거닐고 싶어 한다.

이 모든 정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보가 아닌 네이버 지식in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야말로 스토리텔링이 생활 곳곳에서 공기처럼 뿜어져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왜 스토리텔링을 원하는 것일까. 노트북, 핸드폰 등 디지털 기기들이 신체의 일부로 확장될 만큼 발달한 21세기에,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가 강력한 이야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당연한 근거이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이야기적 가치(story value)를 지향한다. 할리우드의 이야기 비평가 맥기(Robert Mckee)에 따르면, 이야기적 가치란 인간 경험의 보편적인 성격으로, 이 보편적인 성격이 긍정에서 부정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옮겨 다닌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영웅 설화든, 가상 세계에서 아바타를 통해 구현되는 영웅담이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은 시대에 따라 기술에 따라 달라지지만, 영웅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과 가치 자체는 동일한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대중의 잠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잠재된 온갖 욕망과 금기들에 허구라는 안전장치를 장착해 예술이라는 수면 위로 승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둘째, 기술이 인간을 압도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허구적 상상력을 발현하며 삶의 균형을 추구한다. 아일랜드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드라큘라(Dracula)>나 영국 소설가 메리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등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들은 유럽 전역에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과학기술이 꽃피던 시기에 탄생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지난 100년간 좋은 이야기를 판단하는 기준은 현실을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하고 고민했는가를 중시하는 리얼리즘에 고정되어 있었다. 식민지, 전쟁, 독재 등 한국 근현대 사회가 워낙 숨가쁘고 치열하다보니 허구적인 이야기 역시 당면 과제들과 어떻게든 연관을 맺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연히 판타지, 추리, SF 등 환상성(fantasy)이 극대화된 대중의 이야기는 비주류로 밀려났었다. 그러나 본래 한국은 예로부터 다양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나라이다. 서천서역을 넘나들며 미션을 수행하는 여성 영웅 신화에서부터 정치적 암투와 신랄한 풍자를 담은 해상 SF 별주부전에 이르기까지, 설화에서부터 고전소설에 이르기까지 역사만큼이나 방대한 이야기의 보고(寶庫)이다. 디지털 시대의 한국은 지난 100년간 주춤했던 이야기의 맥을 이제 막 확장하려는 참이다.

셋째, 스토리텔링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사회문화적 과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과거의 스토리(story)와 미래의 텔링(telling)으로 이뤄진다. 스토리텔링은 크게 변하는 부분과 변하지 않는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원천 소스로서의 스토리가 변하지 않는 부분이라면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기술인 텔링은 시대적 패러다임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변모하는 부분이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가운데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20세기가 계몽주의적, 이성 중심의 사회로 정답을 제시하는 사회였다면, 21세기는 다원주의적, 감성과 경험 중심의 사회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회이다.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무수히 많은 양의 정보를 동시다발적으로 접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정보에서는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정보를 풀어나가는 스토리텔링 과정을 통해서 공감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호모나랜스(homonarrans:이야기하는 인간)는 누구나 쉽게 이야기를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이야기꾼들의 시대를 꿈꾼다. 스토리텔링은 현실감을 상실하고 실재의 가치를 무마시키는 가짜(fake)를 양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잠재적인 비현실, 반현실, 초현실의 욕망과 상상력을 발현하기에 적합한 기술이요 도구이다.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면서 스토리텔링을 구현하는 가운데, 다양한 해답과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한혜원(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