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에 '고야'는 있는가]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등 영향 탈정치적·현실도피 미술 주목부조리한 현실 독창적 미적 감각으로 표현한 '고야'와 대조

(위) ‘자유의 여신’작업과정 (출처=<권력과 미술>) (아래) 박수근의 '빨래터'
(위) '자유의 여신'작업과정 (출처=<권력과 미술>) (아래) 박수근의 '빨래터'

“왜 내가 본 모든 작품이 그렇게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재일조선인 지식인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최근 저작 <고뇌의 원근법>에서 한국의 근대미술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그렇게 ‘예쁘지’ 않았음에도 미술이 예쁜 것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그렇게 치열하거나 철저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비치기도 한다.

예쁜 미술에도 나름의 역할은 있다. 하지만 예쁘다는 것이 장식품으로서의 기능을 넘는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강수미 독립 큐레이터는 “예쁘다는 말 자체가 통찰을 줄 때보다는 만만할 때 쓰는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미술의 불복종>의 김정락은 미술의 가치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한 반항과 불복종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에게서도 성장의 징후는 반항이라는 것에 비유했다. “미술은 그렇게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회와 제도, 관습에 반항하고 불복종하는 순간에 자율적인 위치를 얻고, 또한 그들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라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라는 서경식의 정의와 “미술과의 애정 어린 관계는 그것을 애완견처럼 예뻐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와 미술이 털어놓는 사심 없는 역사적 진실을 경청하고 고민하는 일”이라는 김정락의 제안을 전제로 한국미술의 미의식을 점검해 봤다.

한국 근대미술은 예쁘기만 한가

한국 근대미술의 미의식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 한국 근대미술의 출발점은 1910~20년대 일제강점기다.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에 들어와 있던 서구 모더니즘을 수입한 것이 시초다. 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는 “이때 수입된 인상파와 야수파가 이국적이면서 아름답게 여겨지며 한국미술의 ‘미학’으로 자리잡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다보니 한국 근대미술에 “생활 속의 구체적 진실”이 결여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직시한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 상징적인 예이다.

이렇듯 근대미술의 역사가 짧고 급속했다는 점, 그 시작이 자생적이지 않았다는 점은 한국 근대미술의 한계였다. 한국전쟁과 검열이 심했던 군사정권 등 미술사를 단절시키는 경험들도 근대미술의 미의식에 영향을 미쳤다. 박영택 경기대 미대 교수는 “서구 근대미술의 미의식이 역사적 고민이 축적된 ‘전통’인데 비해 한국 근대미술의 미의식은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은정의 <권력과 미술-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권력과 미술>은 역사적 경험이 한국미술에 어떻게 침투했는지를 꼼꼼히 보여준다. “심미적 형식조차 역사적인 경험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승만 정권 하에서의 미술단체, 전람회, 제도 등을 살핀다. 이런 물리적 기반은 국가 권력이 이해에 따라 미술을 통제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미의식’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서경식 교수) 근대국가의 특징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양상이다.

이승만 정권은 해방 후 일제강점기에 열렸던 ‘조선미전’을 ‘국전’의 형식으로 부활시켰고, 한국전쟁 때는 종군화가단을 운영함으로써 반공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종군 미술을 만들었다. 책은 “일제강점기에 습득한 미술 제도를 원형으로 미술 제도를 재편성했다”고 설명한다. 이 와중에 유입된 서구 모더니즘도 서구 역사에서 기존 틀에 저항함으로써 형성되어온 맥락이 거세된 채 받아들여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미술의 미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한국전쟁 중 부산시청 외벽에 걸린 <자유의 여신>이다. 김환기, 김병기, 남관 등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정부의 발주를 받아 작업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패러디한 것 같다. 구도와 정황은 닮았으되 ‘여신’이 태극기를 들었고 주변 사람들이 한국인의 모습이다.

원작의 배경인 1830년 왕정복고에 반대해 일어난 7월 혁명의 의의를 한국전쟁에 겹쳐놓고 있다. 조은정은 이 작품의 제작 목적이 “일반인에게 한국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계몽”이었으며 “내부의 시선을 타자화하고, 우리 안의 사대주의와 파시즘을 공유한 제1공화국 시대의 속성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런 미의식은 ‘예쁜 것을 좋아하는’ 미의식의 거울쌍이다. 미술이 자율성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엄혹했던 상황 탓에 오히려 탈정치적이고 현실도피적인 미술이 주목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미의식 재조명

하지만 반면 한국 근대미술의 미의식을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강수미 독립 큐레이터는 “미술작품은 작가가 체험한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반응의 융합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의식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미술 작품에 직접적으로 투영된 작가의 시선 외에도 간접적이거나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정서와 감각을 해석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즉자적인 것을 아름답거나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은 유교적 전통을 고려할 때 더욱 필요한 태도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언뜻 예쁘게만 보이는 미술에서도 당대 상황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고뇌로서의 미의식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이중섭의 그림에서는 개인적 그리움뿐 아니라 한국 근대사회가 공유하고 있던 상실의 고통이 담겨 있다.

박수근 그림을 내용에만 주목해 개인사와 결부하면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기술적 특징인 두터운 마티에르에 주목하면 환영을 만들어내려는 서구 유화에 반하는 미의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영택 교수도 박수근의 작품이 60년대 전후 한국사회의 고뇌를 담고 있음을 예로 들며 “근대미술이 예쁘기만 하다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직접적인 것에 익숙한 서구 미술의 판단 기준과는 다른 잣대로 한국미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근대미술의 미의식을 섬세하게 재조명하고 재논의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한국전 때 많은 작품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태호 교수의 지적처럼 한국 미술을 한국적 맥락과 결부하는 “사회학적 시선”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 <권력과 미술>의 조은정도 “아직 이 방면의 연구가 축적되지 않아 대부분의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고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 시대사회 미술의 미의식을 정치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내외부적 맥락을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쁜 미술을 의심하는 의의

한국 근대미술의 미의식을 재검토해보는 것은 “우리의 미의식이 실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만들어져온 것임을 깨닫기”(서경식 교수)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당대 미술의 역할과 의미, 가치를 판단하고 향유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미술이 “유치할 만큼 예뻐졌다”(강수미 독립 큐레이터)는 위기감이 있다. 시장 논리가 득세하면서 보기 좋고 쉽고 편안한 팝 이미지가 대량 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미(美)이고 그것만이 미술(美術)의 기능일까. 이태호 교수는 ‘미술’이라는 말 자체가 ‘art’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반성 없이 들여온 결과라고 말한다. 시장이 이끄는 한국미술은 그 우연하고 왜곡된 글자 하나, 그 자체의 뜻에 아직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이태호 교수는 “미술의 본령은 일깨움”이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그림이 아름답나?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그의 작품들의 가치는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파격한 데 있었다.” 예쁜 것을 예쁘다고 느끼는 데 그치는 한국미술의 미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다.

한국미술에 '고야'는 있는가



(위) 프란시스코 드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아래) 박이소의 '우리는 행복해요'
(위) 프란시스코 드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아래) 박이소의 '우리는 행복해요'

프란시스코 드 고야는 전쟁의 참상과 지배층의 민중 수탈 등, 인간 역사와 사회의 구체적이고도 보편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그려낸 스페인 화가다. 그의 작품이 미술사에서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독창적인 미적 감각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미술의 불복종>은 그가 "고통스러운 상처에 붓을 댄 화가"라고 설명한다. 특히 "인간의 관습과 무지를 비판하는 내용의 판화 연작 <카프리초스>"에 대해 "악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형상과 상황들이지만 감상이 깊어지면 비애와 반성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1808년 5월 3일>은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통해 역사와 인간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한국미술에 '고야'와 같은 작가가 있는가, 라는 질문은 곧 한국의 지난한 근현대사 경험과 감각에 대한 이토록 치열한 미의식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다.

1970년대의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또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서 태동한 1980년대 민중미술은 한국미술에서 외면되었던 민중의 삶과 그 고통을 화폭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고야'의 의지를 실천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민중미술을 이끌었던 소그룹 '현실과 발언'의 일원인 이태호 교수는 "작가들이 미술과 시대 간 관계, 시대정신에 대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미술계 작가 신학철을 한국의 '고야'로 꼽는 의견도 있다. 민중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사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재해석한 <한국 현대사> 연작이 그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민중미술의 성취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의도나 목적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했고 사회에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미감의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는 의견이 여럿 있었다. 강수미 독립 큐레이터는 민중미술이 "리얼리즘적 정신을 시각적으으로 너무 쉽게 표현했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고통이 그렇게 쉽게 표현될 만한 것이 아닌데 한국의 80년대 민중미술에서는 거리의 노동자를 그리는 것 자체가 그 고통을 대변하는 것처럼 오인되었다는 것이다.

강수미 큐레이터는 독창정이면서도 피상적이지 않은, '중층의 미의식'을 지닌 작가로 박이소를 꼽았다. "조형미학으로 보면 아름답지 않더라도 질료를 다루고 생각을 표현한는 언어적 측면을 높게 살만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영택 교수 역시 박이소와 안창홍을 주목했다. 미의식이 축적, 발전할 만큼 오래지 않은 한국미술사에서 "최선의 역량과 에너지로 당대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였다.

하지만 역시, 현실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고발하는 것을 넘어 작가 자신의 미적 해석틀을 통해 "초현실주의적으로까지 담아냈다는 점"(이건수 <월간미술> 편집장)에서는 '고야'의 경지에 이른 한국 작가를 찾기 어렵다는 답변이 많았다. 이건수 편집장은 "분단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미술 역시 이념적 구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미학에 도달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80년대 민중 미술처럼 구체적 삶을 주목하는 역사적 실천들이 미술적 형식미까지 갖춘 예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미술의 미의식은 추해지고 있나



오치균의 '누드 자화상'

예쁜 미술 일색이던 한국미술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 사이에서는 기괴한 이미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달 말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괴물시대> 전처럼 '괴물'의 형상을 통해 현실을 발언한 작품들을 재조명하는 시도들이 눈에 띈다.

미술시장에서조차, 외면당했던 1980년대 민중미술 계열 작품들이 거래되고 있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은 "'오치균'도 좋은 가격에 거래될 만큼 시장의 미의식, 미적 감각이 넓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김윤섭 소장은 지난 정권 하에서 정책적으로 민중미술에 대한 재조명이 있었다는 점을 꼽았다. 특히 김윤수 관장 재직 시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컬렉션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박영택 교수는 90년대 후반 이후 작가층의 변화를 원인으로 꼽았다. 유학파가 늘어나면서, 일본을 통해 서구 미술을 획일적·피상적으로 받아들였던 전 세대와는 달리 다양하게, 보다 창의적으로 서구 미술을 이해하는 경향이 늘어남에 따라 미의식 역시 바뀌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 현대미술이 자극과 충격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한국미술에도 엽기성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저항 혹은 전복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이 많다. 최금수 미술평론가는 "젊은 작가들이 기괴한 이미지를 차용하게 된 데에는 '눈에 띄자'는 의도가 앞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90년대 이후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은 중국 팝아트의 영향이 컸다.

강수미 독립 큐레이터도 "최근에는 '그로테스크'까지도 시장에서는 '예쁨'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강도'가 보는 이를 각성시킬 만큼이 아닌, 즐길 만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 미학이 공포스러운 현실을 담기보다 대중문화나 미술이론 등 '문화적 원천'에서 태동한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같은 의미에서 우려할 만하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굳이 '아름답지 않은' 형상과 감각을 선택한 현실 인식을 품고 있는 미술에 대한 해석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 강수미 독립 큐레이터는 김준의 작업을 주목했다. '타투작가'로서 한국사회의 금기를 화폭에 전면화해 왔던 그는 최근 디지털 작업을 통해 신체를 '이종 변이'시킨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이런 이미지가 자아내는 공포는 디지털 시대의 인식론으로 해석할 만하다.

박영택 교수는 80년대 민중미술의 '내용'을 계승하고 있는 작가로 박찬경, 강홍구, 조습, 송상희, 노순택 등을 꼽았다. 소수이긴 하지만 현대미술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발언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