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문화공간 사용설명서] 크링·플래툰 쿤스트할레·마카로니 마켓신진 작가 발굴·서브 컬쳐 아티스트 자원·유럽식 문화 전파에 앞장

1-크링
2-60석 규모의 크링 시네마
3-크링 한상범 과장

복합문화공간은 진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은 자세히 뜯어볼 가치가 있다. 각 공간의 대표가 직접 들려주는 복합문화공간 사용 설명서를 공개한다.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케케묵은 머리와 가슴 속을 포맷시켜줄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기준은 탄생 1주년 미만의 따끈따끈한 문화 공간들. 준비물은 열린 마음 하나면 된다.

크링 kring/한상범 관장
사회를 살찌우는 기업의 문화 사랑


크링은 지난 해 하반기 경 개관해 이제 갓 1년을 넘겼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크링은 금호 건설이 기업의 사회 공헌을 취지로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그 동안 전시, 영화, 패션, 보석 등 온갖 분야의 전시와 쇼, 이벤트가 이 곳에서 열렸다. 올 초에는 서울 컬렉션의 일부가 개최되기도 했다.

크링은 건축 당시부터 빈 공간을 지향했다. 1층은 물론이고 2층에 마련된 전시홀도 작품들을 철거하고 나면 완전히 텅 비게 된다. 심지어 층의 구분도 모호해 조금 덩치가 큰 구조물의 경우 1층과 2층의 공간을 모두 차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기 위해서다.

음악회가 열릴 수도 있고 영화가 상영될 수도 있으며 메이크업 쇼가 개최될 수도 있는 다양한 상황을 대비해, 무엇이 전시되든 작품이 공간을 재정의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요즘의 사람들은 다양한 것을 원한다. ‘그곳에 가면 그것이 있다’라는 공식은 아직도 유효하지만, 동시에 ‘그곳에 가면 다양한 것이 있다’라는 말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크링에 오면 1층 시네마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영국 현대 미술이나 아프리카 미술, 조각전 등 매달 바뀌는 전시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2층의 탁 트인 휴게 공간에서는 커피 한 잔 마시며 쉴 수도 있다. 역시 비용은 없고 자율 기부를 통해 모인 금액은 모두 홀트아동복지회 등을 돕는 데 쓰인다.

이처럼 크링은 기본적으로 비영리 문화 공간을 추구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부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간혹 비싼 수입 자동차나 코스메틱 브랜드의 설명회 공간으로 대관되는 경우도 있어서 어쩌다 럭셔리한 장소라는 인식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크링이 주목하는 것은 1차적으로 신진 작가들이다.

앞서 말했듯이 기업의 사회 공헌이 이곳의 설립 목적인 만큼 가난하면서 창의적인 작가들을 찾아내 전시회를 열고 대중에게 그들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작가들을 선정하는 일에는 나도 일부 관여를 하지만 대부분 금호아트센터에 소속된 전문 큐레이터들에게 일임하는 편이다.

초기에는 특화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크링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 건물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미래 지향적인 작품들을 위주로 전시하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콘셉트가 정체되면 생명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한 곳에 집중하기보다 매월 다른 기획을 함으로써 더 많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관람객들에게도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전시를 거듭하다 보니 공간의 특성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설치나 조각, 멀티미디어 작가들에게 다소 편중되는 경향이 있더라. 이것을 크링의 색깔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영화 역시 ‘영화를 보는 365개의 다양한 시선’이라는 슬로건 아래 독립 영화와 예술 영화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기획하고 있다. 파리를 주제로 한 영화, 홍상수 감독의 영화, 현재 진행 중인 현대 독일 영화 특별전 등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영화들을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영화관은 유일하게 5000원의 입장료가 있는데 너무 무분별하게 들락날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수익금은 전액 독립영화제 등을 후원하는 데 쓰인다. 레스토랑이나 바는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혹시나 레스토랑의 반응이 너무 좋으면 문화 예술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맛집으로만 인식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9월부터는 음악회를 새롭게 시도할 계획이다. 시각을 자극하는 것에 더해 이제 귀까지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려고 한다.

기업의 사회 공헌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결국은 기업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기업과 예술의 결탁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문화 예술 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의 10%만이 티켓 판매로 충당되고 70%는 국가가, 나머지 20%는 기업의 후원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은 기업의 참여 부분이 특히 약하다.

도움의 손길이 없으니 당장 잘 팔릴 문화 상품들만 판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 공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사회 봉사가 개인을 살찌우는 일이라면 문화 예술계의 지원은 사회 전체를 살찌우는 길이다. 결실을 보기까지는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일단 열매가 맺히고 나면 사회 구성원 전체를 바꿀 만한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 줄 것이다.

크링 : 2호선 삼성역(3번출구)에서 학여울 방향 200m

플래툰 쿤스트할레 Platoon Kunsthalle/Tom Bueschemann & Christoph Frank
세상을 바꾸는 힘, 서브 컬처


우리는 독일에서 온 아티스트 그룹 플래툰이다. 지난 4월 강남 한복판에 28개의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구조물을 세운 우리에게 정말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냐고. 우리는 아시아의 떠오르는 서브 컬처 아티스트들을 지지하기 위해 왔다.

2000년 베를린에 유럽 본부를 설립한 이후 우리는 5년 안에 아시아 지역에 헤드 쿼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일본을 생각했지만 아디다스의 한 지인이 “서울을 주목해 보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서울을 잘 몰랐다. 그런데 서울을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사람들이 아주 매력적이기도 했고 서브 컬처가 풍성하게 공유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이곳에서라면 붐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서울만을 위한 공간은 아닌 셈이다. 이곳은 일본,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 서브 컬처의 중심이 될 것이다.

왜 서브 컬처에 집중하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순수 예술 분야에서는 비주류 문화를 예술로 여기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서브 컬처 아티스트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는 이 세대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해답을 가지고 있는 무리다. 젊고 열린 사고를 가진 작가들은 그래피티,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등 새로운 방식으로 독창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들에게는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다. 일부 대안공간이 겨우 갈증을 달래주는 정도다. 쿤스트할레는 이들이 대중과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작업에 필요한 공간을 내주고, 또 그렇게 나온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도 지원한다.

1층은 쇼케이스 장으로 쓰이는데 한국과 일본, 유럽의 작가들이 한 달을 주기로 계속해서 재미있는 작품을 전시한다. 프리아트와 테크놀로지 랩에서 활동하고 있는 James Powderly는 ‘공짜로 버스 타기’라는 제목의 비디오물을 보여준다. 일부러 서툰 손길로 제작한 이 영상물을 통해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를 재치 있게 비꼬고 있다. 부산이 근거지인 스트리트 아티스트 kay2는 벽면을 활용해 무장한 의경과 시민의 대치를 표현해 정치적 이슈를 작품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목요일과 금요일 밤은 클럽으로 변신해 DJ들이 일렉로닉 뮤직을 들려준다. 2층은 작가들의 작업실로 4명의 작가들이 6개월간 쓸 수 있는데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또 1층으로 옮겨져 전시된다. 3층은 플래툰 멤버들의 공간, 4층 옥상에는 음료와 소시지 등을 판매하는 노천 카페가 있다.

우리는 직접 참여 작가를 선정한다. 독일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 비주류 작가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주 어려울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006년 4월에 처음 한국을 찾은 이후로 리서치 작업을 계속해 현재는 800명 정도의 작가 데이터 베이스를 보유하고 있다. 이젠 플래툰 쿤스트할레라는 공간이 알려지고 나니 작가들이 스스로 전시 의향을 밝히며 찾아 오기도 한다.

작가들을 선정하는 기준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느낌이다. 일 대 일로 마주했을 때 그들이 주는 느낌, 그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감,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 메시지가 무엇인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개인적으로는(Tom) 한국의 음악이 아주 흥미로웠다. 지금 2층에서 작업 중인 매거진 킹이라는 음악가는 스스로 악기를 발명해 완전히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낸다.

오디오와 VJ를 한 팀으로 묶어서 경합한 0-00라는 콘테스트를 했는데 여기에 참가한 팀의 음악은 전부 다 좋았다. 그래픽 디자이너 중에는 대통령의 사진 아래에 ‘No more hope”를 써 넣은 송범영의 작업이 인상적이었다.

비주류 문화는 태생상 어쩔 수 없는 그 창조적인 과격함 때문에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비주류 문화에 익숙한 이들과 소통하려고 했다면 홍대가 더 적합했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서브 컬처에 활짝 열리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는 굳이 럭셔리 문화의 중심인 청담동에 자리를 잡았다.

쿤스트할레를 이용하는 비용은 작가들에게도 무료지만 그래서 관람객들에게도 무료다. 이곳에서 돈이 오고 가는 곳이라면 음료를 파는 바와 독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전부다(커피 값도 아주 저렴하다). 그럼 이 모든 경비는 어디에서 충당하느냐고? 이벤트를 열 때 뜻을 함께 하는 기업들의 후원을 받기도 하고 행사 성격에 따라 약간의 입장료가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이상은 비밀이다.

다음 쿤스트할레가 정착할 곳은 아마 멕시코 시티가 될 것이다. 4번째는 아마도 발리 같은 섬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종적으로는 아카데미를 설립해 학생들로 하여금 전세계의 쿤스트할레를 돌며 다양한 안목과 비전을 키운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는 특히 돈이 아닌 문화가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플래툰 쿤스트할레 : 도산사거리 관세청 방향 하나은행 골목

4-(좌) 톰 뷔시만 (우) 크리스토프 프랭크
5-(좌) 프란체스코 (우) 크리스
6-부티크 클럽 '펑션'
7-카페

마카로니 마켓 Macaroni Market/Franchesco Chu & Chris
커피 한 잔에 담긴 유럽의 정신


마카로니 마켓은 지난해 12월 이태원에 문을 열었다. 280평의 넓은 공간에 음료와 간단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카페, 식재료를 파는 델리, 부티크 클럽, 포멀한 레스토랑이 모두 모여 있다. 완벽하게 다른 콘셉트를 지향하는 이 공간들을 한 곳에 모은 이유는 한 가지, 욕심이 많아서다.

마카로니 마켓은 나를 포함해 음식과 와인에 미친 5명의 파트너들이 모여 시작된 곳이다. 각자 유럽과 캐나다 등지를 돌아다니며 레스토랑, 호텔에서 쌓은 10여 년의 경험을 응축시킨 곳이기도 하다.

욕심은 많지만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다. 바로 유럽 식문화의 여과 없는 전파다. 파스타를 예로 들면 우리나라에서는 소스가 그릇에 흥건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원래는 소스가 면 외에는 거의 묻어 있지 않는 것이 정식이다. 이럴 경우 소스를 추가해달라고 요청하는 손님들이 있지만 우리는 정중하게 정통 방식대로 드셔 보시기를 권한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에스프레소는 쓴 맛 때문에 한국에서는 카페 라테에 밀렸지만 본토의 관습을 따라 식후에는 에스프레소를 권한다. 당연히 불만을 품는 고객들이 있다. 서구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받드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외래 문화의 맹목적인 전파자가 아니다.

유럽인들은 타국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눈꼴이 시릴 정도로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다. 자기네들이 정한 비율이 아니면 에스프레소로 쳐주지도 않을 정도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아집은 타 민족에 대한 멸시의 이유인 동시에 모순되게도 그들의 단단한 정신의 원동력이다. 한국의 식문화는 이들과는 별개로 아주 우수하다. 나는 이북 음식을 하는 식당을 운영하며 손주까지 키워낸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지금도 하루에 한번씩은 된장찌개를 꼭 먹는다.

말하고 싶은 것은 문화의 우열이 아닌 그들이 문화를 대하는 태도다. 그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만큼 고스란히 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카로니 마켓은 본질적으로 ‘안티 퓨전(anti-fusion)’을 지향한다. 커피 한 잔을 팔아도 커피의 온도와 비율과 서빙하는 속도에 그들의 문화를 담아 판다.

델리에서는 하몽(소금에 절린 돼지의 다리로 만든 햄), 화학 첨가물이 전혀 안 들어간 프레시 초콜릿 같은 고급 식재료를 판매하는데, 모두 주방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것들이다. 델리와 카페가 개방된 형태로 서로 이어져 있다면 레스토랑과 클럽은 언뜻 봐서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이 숨겨 놓았다.

아예 들어가는 통로부터 카페와 구분시킨 레스토랑은 인테리어, 테이블 세팅, 메뉴, 서비스까지 철저히 파인 다이닝을 추구한다. 카페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좀 더 격식 있는 식사나 모임을 즐기고자 하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다.

부티크 클럽 ‘펑션(function)’은 평소에는 일반 손님들도 들어와 즐길 수 있지만, 파티가 열릴 때는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 중심의 프라이빗한 장소로 변신한다. 여기서는 이른바 소셜 핌프(social pimp: 사회적 뚜쟁이)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호스트(주로 나와 파트너들이 맡는다)가 방문객들의 프로필에 따라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소개시키는 가운데 아주 자연스럽게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인맥이 형성되며 남녀 간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한 유명 운동 선수와 팀 간의 계약 이야기가 오고 간 적도 있다. 이전에는 룸살롱 등 음지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모임들이 점차 양지로 올라오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파티는 아주 효과적인 자선 활동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남을 돕는 일에 꼭 처절한 영상과 눈물, 죄책감이 함께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티켓에 자선 금액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공지하고 맛있게 먹고 즐기는 가운데에서도 남을 도울 수 있다. 최근에 열린 자선 파티에서는 모금액만 400만원이 넘어 우리와 연계된 한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마카로니 마켓의 빠른 정착에는 손님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오너의 문화 취향을 확실하게 고수한다는 배경이 숨어 있다. 단순히 이익을 좇지 않는, 고집 있는 이들이 만들어 낸 다양한 문화 공간은 색다른 향유 거리를 찾는 이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줄 것이다.

마카로니 마켓 : 이태원 해밀턴 호텔 앞에서 제일기획 방향으로 100m 2cmd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