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인문학계 변화의 바람] '다지원' '지행' '문지문화원 사이' 등 또 다른 형태의 비제도 문화 연구

1-연구공간 수유 + 너머
2-<다중지성의 정원> 강의 모습 (사진제공 : 다지원)
3-<문지문지원 사이> 전시회 (사진제공 : 사이)
4-<문지문화원 사이> 공연모습 (사진제공 : 사이)
5-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들

<다중지성의 정원>, <지행네트워크>, <문지문화원 사이>. 이 이름을 듣고 ‘암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문화에 좀 더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이 이름들로 홈페이지를 검색해 봤다면, 어느 노래 가사처럼 ‘보이는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는 걸 알았을 터다. 나아가 이곳을 찾아 기웃거려 보았다면, 혹은 이 조직(?)들과 연대를 맺고 있다면, 당신은 문화계의 얼리어댑터다.

앞의 세 조직은 <철학아카데미>, <수유+너머>로 대표되는 대안지식공동체의 또 다른 그룹들이다. 대안지식공동체란 대학을 비롯한 제도권 교육기관을 벗어나 연구, 토론, 강연을 진행하는 지적담론의 생산 장소다. 이를테면, 비제도권연구소쯤 된다. 일반에 가장 알려진 대안지식공동체는 <철학아카데미>가 있다. 이정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운영하는 철학아카데미는 10년이 지나면서 대중에게도 친숙한 이름이 됐다.

2000년대 중후반 마포를 중심으로 대안지식공동체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간을 중심으로 인문학 강연을 주로 하던 기존의 대안지식공동체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의 비제도 문화를 연구한다. 변하는 서울의 ‘인디인문학’계를 소개한다.

네트워크화로 뻗어가다

2007년에 문을 연 <다중지성의 정원>(이하 다지원)은 <다중넷>(http://waam.net)에서 운영하는 인문학연구공동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공저 <다중>과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의 정원’에서 이름을 따왔다.

<다중넷>의 조정환 대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 정원에는 계층을 떠나 온갖 사람들의 지적 차원의 교류가 이뤄졌던 곳이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해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다중네트워크>에서 운영하는 이곳은 문학·철학·언어·과학 등에 대한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강좌를 진행한다. <다중네트워크>는 <다지원> 이외에도 출판사 <갈무리>, 웹저널 <자율평론>, 철학과 미학 연구모임인 <센터>, 에스페란토어 모임인 <레토> 등 5개 영역의 인문 연구, 강좌 단체로 구성돼 있다.

조정환 대표의 말처럼 “호박 넝쿨처럼 엮인” 이 모임을 알기 위해서는 이들의 연혁을 알아야 한다. 출판사 갈무리가 1994년 문을 연 후, 웹저널 자율평론이 2002년에 탄생했고 이어 2007년에 다지원과 레토가 만들어졌다.

출판사와 웹저널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자연스럽게 연구와 세미나, 강좌가 필요했다. 다중넷 회원인 ‘만사’(다중넷을 만드는 사람들의 약자)들은 3개월에 한 번 자율광장을 열어 2박 3일간 연구 성과를 발표한다. 철학서나 인문서를 읽고 세미나를 하거나, 번역, 집필한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웹저널 자율광장을 만들기 위해 매주 갖는 기획회의에서도 지적 담론이 형성된다.

갈무리 출판사에서 나온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존 홀러웨이 저, 조정환 옮김)와 <비물질 노동과 다중>(마이클 하트 지음, 김상운 옮김) 등은 이런 활동의 성과들이다.

<다중넷> 신은주 상임대표는 “5개의 연구 마디들이 외부 인문 사회과학 연구, 활동단체와 연대해 활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연자 모임인 ‘마포실천인문네트워크’를 통해 찾아가는 인문학 강연을 한다든지, 다른 대안지식공동체에 우리가 인문학 강연을 가거나 그 쪽 연구자들께 강연을 의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행네트워크는 문학평론가 오창은, 이명원 씨와 한양대 하승우 연구교수가 2007년 만든 인문사회 공동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 사회, 정치 강연인 <콜로키움>과 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연인 <찾아가는 인문학> 등을 진행했다. 대안지식공동체 내에서 지적 담론이 형성되기보다는 다른 모임들과 꾸준히 교류하면서 저변을 넓혔다.

연구단체 ‘대안지식연구소’와 문학 모임 ‘소설아 놀자’ 등도 세미나 등 행사를 할 때 지행네트워크의 공간을 사용한다. <콜로키움>을 진행할 때는 이 3명의 연구원 이외에도 정치, 사회학 전문가와 시민운동가 등도 강연자로 출연한다. 이곳의 연구원인 오창은 문학평론가는 “지행네트워크란 홈페이지에 다른 지적 연구, 활동단체들의 배너가 굴비처럼 엮인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하나의 지적 구심점을 만들고, 지식인들 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최근 지행네트워크 연구원들은 이들의 활동과 국내대안지식공동체에 관한 글을 모은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를 펴냈다.

문학과 미디어의 접속

대다수 대안지식공동체가 인문, 사회학 연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문지문화원 사이>는 문학과 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하는 대안문화공간이다.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의 자매회사인 이곳은 2007년 2월 문을 열었다.

철학, 문학, 미디어아트와 글쓰기 강연을 중심으로 하는 아카데미와 기획공연을 펼치는 문화사업으로 구성된다. 문단 작가들이 강사로 참여하는 강연 <이야기 창작 학교>에서는 시, 소설, 동화 창작과 같은 전문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한다.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주목할 점은 문학과 미디어아트의 접목과 같은 각종 문화 영역의 경계를 넘어선 교류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주일우 기획실장은 “학문과 문화예술의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고 경계가 흐려지고 있지만, 당장 상업적 요구가 없어 소외되고 있다.

때문에 고전 교육을 통해 문화예술 토양이 튼튼해지는 것과 문화 장르 간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고 소개했다. 대안지식공동체로 지적 담론을 형성하기보다는 문화 장르 간 경계를 넓히는 중간 센터(Center)의 역할을 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설명이다.

일례로 올해 6월부터 12월까지 ‘텍스트, 미디어와 날다’란 주제로 문인과 미디어아티스트들의 합동 공연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성기완 시인, 김경주 시인, 구동희 미술작가, 신재호 미디어아티스트 등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 있다. 주일우 실장은 “아카데미에서 꾸준히 전문 과학강좌를 개설한다. 예술가나 일반인들이 인문학적 사고를 할 때 과학적 상상력을 섞어 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연을 기획한 김지연 문화사업팀 컨설턴트는 “20세기부터 형성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래파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사조는 실은 문학으로 시작된 운동이다. 미디어와 텍스트는 유기적이면서 다이나믹한 관계가 있다. 예술은 흐름은 함께 가지만, 국내 예술계는 장르간 교류가 거의 없다. 텍스트와 미디어가 만나는 시점에서 새로운 문학이 탄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획했다”고 말했다.

공간을 넘어선 코뮌주의

기존의 대안지식공동체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모색 중이다. 국내 가장 활동적인 대안지식공동체 중 하나인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네트워크 형식으로 조직을 바꾸기로 한 것.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2000년 고전평론가 고미숙 씨가 운영한 ‘수유 연구실’과 이진경, 고병권 박사의 공부모임인 ‘너머’가 통합돼 문을 열었다. 용산에 400평 규모의 건물에는 철학과 미학, 문학, 고전 강좌를 비롯해 독립영화 작업실, 웹진과 잡지 편집실, 요가 실, 식당과 카페 등 공부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마련돼 있다.

공간 운영은 회원이 한다. 카페나 식당에서 차를 만들고 밥을 하는 것도 연구원들이 한 달에 3~4번 당번을 정해서 해결하고, 음식 재료는 외부 인사들의 선물과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한다. 말 그대로 공부와 밥, 삶이 함께하는 ‘지식 생활 공동체’ 인 셈. 밥과 공부를 함께하는 회원은 70여 명, 일주일에 한두 번 세미나를 하거나 강좌를 듣는 세미나 회원과 수강생을 합하면 수백 명에 달한다.

90년대 ‘수유 연구실’ 시절부터 이곳에서 활동한 권용선 연구원은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이곳에서 철학과 문화예술까지 공부의 범위를 넓혔다. 최근에 그가 천착하는 건 철학자 벤야민이다. 권용선 연구원은 “대안지식공동체의 롤모델이 있는 게 아니라, 연구실을 운영하면서 필요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실행하고, 결과는 회원들이 공유한다. 돈이든, 지식이든 순환시키는 걸 기본으로 한다”고 말했다.

고전과 철학, 미학, 사회학 등 각종 학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공부 성과를 책으로 내놓기도 한다. <신여성>(연구공간 수유+너머 근대매체연구팀),<일본 근대의 풍경>(연구공간 수유 + 너머'동아시아 근대 세미나팀) 이외에도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 등이 <수유+너머>의 이름으로 발간됐다.

최근에 <수유+너머>는 지역간 네트워크 형태로 조직을 개편하고 있다. ‘코뮤넷(CommuNet) 수유너머’란 이름도 마련했다. 기존 용산 연구실을 거점으로 서울 구로와 신길동, 강원 춘천 지역 등에 독립 연구공동체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지난 6월부터 수유너머가 진행해 온 ‘청소년 인문학 공부방’을 거점으로 ‘수유 너머 구로’가 설립돼 활동을 시작했다. 신길동에는 탈성매매 여성, 춘천에서는 인문학에 관심을 둔 주민들과 밀착도를 높일 계획이다.

권용선 연구원은 “수유+너머 규모가 커지면서 세포분열처럼 네트워크 형식으로 공간을 나눠서 활동하면서 전체가 연결되는 방식으로 운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도하는 것이다. <수유+너머>가 필요에 따라 아이디어가 나오고 변해온 만큼, 1년 후에는 또 다른 모습이 돼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