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속으로 들어간 패션 잡지] 패션·명품·신데렐라 스토리 등 화려함으로 대중의 판타지 자극

(위) 드라마 '스타일' (아래) 다큐멘터리 영화 < September issue>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이기심은 판타지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비록 처한 현실은 시궁창이라도 ‘저 너머 저 곳은 멋질 거야’ 라는 상상은 지금을 잊는 짜릿한 힘이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은 사명감을 가지고 번갈아 이런 세계들을 조명해 왔다. 병원, 법원, 강력반, 조폭…. 빙글빙글 돌던 카메라는 지금 패션 잡지 사무실 앞에서 멈췄다.

패션 잡지라는 ‘엣지’있는 화두

얼마 전 엣지라는 단어가 검색어 상위에 오르면서 ‘엣지녀가 뜬다’, ‘엣지 있게 휴가 보내기’ 등의 기사들이 덩달아 쏟아졌다. 엣지는 패션 잡지를 소재로 한 드라마 <스타일>에서 패션 기자 역을 맡은 김혜수가 버릇처럼 읊는 표현이다. <스타일>이 가상의 패션 잡지사를 배경으로 했다면 이제 곧 진짜 패션 잡지 사무실도 공개될 예정이다.

패션 잡지 W코리아는 케이블 방송사 온 스타일과 손잡고 자사의 에디터 채용 과정을 리얼리티 형식으로 방송에 내보내기로 했다. 패션지의 백미인 화보 촬영 현장은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다. <정사>, <스캔들>의 이재용 감독은 윤여정, 이미숙 등 6인의 여배우의 화보 촬영 현장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낸 영화 <액트리스>를 연말 경 개봉한다.

이들이 화보를 촬영한 잡지사는 보그다. 국내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미국 보그 역시 9월에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 September issue>를 통해 잡지 제작 과정을 공개한다.

왜 지금 패션 잡지일까?

“지금이라뇨. 패션은 항상 최고의 소재였어요.”

보그 김지수 부장의 말에 따르면 건축, 미술, 음악 등 당대의 문화 중 패션을 제쳐 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패션은 가장 빠르게 트렌드를 감지하고 다른 장르에 섞여 들어가 감도를 높이는 주역이다.

패션에 대한 대중의 판타지는 이전에도 종종 감지되어 왔다. 시트콤의 예쁜 주인집 딸은 의류학과 학생이었고, 잘나가는 남편의 불륜 상대는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러던 것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폭발적인 촉매제를 거치면서 패션 잡지사와 패션 잡지의 에디터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전화 한 통화면 수십 개의 뷰티 브랜드에서 화장품을 보내 오고, 샤넬, 에르메스, 루이비통의 새로 나온 가방을 제일 먼저 매보며, 당대의 톱 스타들과 ‘힙하고 핫한’ 청담동 카페에서 만남을 갖는 그들의 생활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what women want’다. 중요한 건 이들의 화려한 생활이 머리 텅텅 빈 부자의 그것이 아니라 일하는 여성의 삶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게도 애환이 있고 고충이 있다.

여초 현상이 극심한 패션지의 특성상 질투를 유발하지 않으면서 잘 나가기라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감각은 뛰어나되 인격수양할 시간은 부족했던 상사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한다. 판타지와 공감대가 공존하는 그 곳. 우리가 늘 열광해마지 않던 신데렐라 스토리와 성장 드라마 뒤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병풍을 펼쳐 놓은 셈이다.

미디어 + 미디어, 복합 미디어 시대의 개막

‘패션지를 소재로 한 영상물이 판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훨씬 더 재미있는 일이다. 병원이나 경찰서 같은 소재는 영상 매체 쪽에서 일방적으로 비추고 해석하면 끝이지만 패션지는 그 자신도 역시 미디어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상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미디어가 만나 서로를 비추는 과정에서 각자 지금까지 구축한 인지도와 감각, 인프라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한국의 잡지는 제작 비용 대비 최고의 감도를 지닌 것으로 유명합니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전체에서는 물론이고 호주보다도 훨씬 퀄리티가 뛰어나요. 패션지가 가진 인맥과 표현 방식, 독보적인 감각 같은 것들은 돈 주고도 살 수 없어요. 이것이 영상 매체와 결합할 때 기존의 것들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은 물론입니다. 패션지는 영상 매체의 파급력과 폭넓은 시청자 층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고요.”

W코리아 이혜주 편집장의 말이다. W코리아는 지난 3월 김지운 감독과 패션 무비를 찍었다. 김지운 특유의 감각으로 재해석된 스크린 속 정우성, 김아중의 모습은 그대로 W코리아의 화보가 되었다. 당연히 그 달 잡지 판매 부수는 껑충 뛰었다. 10월경 방영될 에디터 선발 프로그램에서는 단순히 화보와 영상을 주고 받는 수준을 넘어서서 선발된 에디터를 정직원으로 채용할 예정이다.

보그 역시 영화 <액트리스> 개봉에 앞서 8월호에 화보를 미리 공개했다. 당대 가장 잘 나간다는 6인의 여배우가 동시에 등장한 화보는 합성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막대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최고라고 자부하는 잡지에서도 진땀을 빼야 하는 작업이 영화라는 장르와 결합하면서 손을 덜은 셈이다.

패션 잡지가 케이블, 공중파, 스크린의 총아로 떠올랐다는 것은 패션계에는 좋은 징조다. 패션지에디터뿐 아니라 모델, 메이크업 아티스트, 포토그래퍼, 스타일리스트 등 관련 직종들도 함께 조명을 받게 된 셈이다. 곧 방영 예정인 드라마 <아가씨를 부탁해>에 모델 출신 김영광의 출연이 확정됐다.

김영광은 동양인 최초로 디올 옴므 쇼에 선 모델로, 업계에서는 최고의 위치지만 공중파에서는 형편 없이 줄어든 입지를 감수해야 한다. 주목받지 못해 상대적으로 발전이 미미한 패션계 인력에 관심을 기대해 볼 수도 있겠다.

잦은 노출에는 왜곡이라는 그늘이 따라 다닌다. 평면적인 앵글로는 사치 조장, 된장녀, 명품 중독이라는 인식을 피할 수 없다. 텐 아시아 강명석 기자는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를 촉구한다.

“패션지를 통해 고가의 소비 문화가 노출되면서 소수 계층에 머무르던 관심사가 대중으로 퍼지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패션에 대해 조언하고 상품을 소개하는 것이 술 광고보다 당당하지 못할 건 뭐죠? 모든 문화에는 가이드라는 것이 필요하고 그를 통해서 더 풍성하게 발전하게 됩니다. 무분별한 소비를 자제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죠.”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