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한국사회에 어퍼컷을 날리다] '100℃' '태일이' '푸른 끝에 서다' 등새로운 경향 담은 작품들 가능성 보여줘

“만화가 비판적 역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아닌가요?”

최근 활발히 출간되는 ‘시사적 만화책’에 대한 질문에 박석환 만화평론가가 되물었다. 풍자와 해학을 근간으로 하는 만화 언어에는 분명 비판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우리만화연대의 설인호 편집장의 말처럼 “권력은 풍자를 싫어한다.” 풍자에는 권력과 관행, 사회구조 등 모든 공고한 척하는 것들을 녹여 버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의 생을 재구성한 최호철의 <태일이>, 6월 민주항쟁을 조명한 최규석의 <100°c>, 1996년 일어난 ‘연대 사태’가 중요한 배경인 고영일의 <푸른 끝에 서다>, 주호민의 ‘88만원 세대’의 취업기 <무한동력> 등 최근 출간된 만화책들은 만화 언어가 가진 진지한 가능성을 실현한 예라 할 수 있다.

한국만화, 열악한 시대상황에 반응하다

정치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만화가 혜성처럼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일간지의 시사만화와 박재동, 오세영 화백을 필두로 한 80~90년대 리얼리즘 만화는 꾸준히 현실을 비틀고, 답답해하거나 슬퍼해 왔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맥이 이어졌다. 시사만화가들은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얼굴>, <만화 박정희>, <만화 전두환> 등을 펴냈다.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체결 등의 이슈가 불거졌을 때는 웹툰이 온라인에서의 여론을 이끄는 데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시사적 의미를 담은 만화책들은 “현재의 시대상황이 워낙 열악하기 때문에”(설인호 편집장) 그 의의나 영향력이 더욱 크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에 기고한 칼럼에서 “<태일이>와 <100°c>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귀환을 알리는 것 같다”고 말했고 <100°c>의 최규석 작가는 “내 책이 잘 팔리는 건 이명박 정권 덕인 것 같기도 하다”(<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는 농담을 할 정도다.

현실에 대응하는 만화계의 ‘행동’들은 이들 만화책이 해석되는 한 맥락이 되기도 한다. 지난 3월에는 여러 만화작가들이 참여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법 조항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옴니버스 형식의 만화책 <악!법이라고?>를 출간했으며, 故 노무현 대통령의 분향소에 ‘새만화책’ 소속 작가들이 그린 걸개그림이 걸렸다.

지난달에는 만화작가를 포함한 만화인들의 시국선언이 있었고, 조만간 제2차 시국선언이 있을 예정이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는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취지의 웹툰이 연재되는 중이다. 그만큼 만화작가들 스스로도 “박재동 화백이 활동했던 80년대의 정치적 환경이 다시 조성되었음”(박석환 만화평론가)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시사적 만화책들은 일간지 시사만화가 담당해 온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물려받은 측면도 있다. 박석환 만화평론가는 “일간지에서 시사만화 지면이 사라지면서 정치를 비평하려는 의지를 지닌 작가들이 활동 영역을 서사만화로 옮겼다”고 말했다. 이는 또한 진지한 만화를 요구하는 독자층이 형성된 기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는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이 강했던 한국에서는 역사, 사회적 소재의 만화가 뒤늦게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 이런 만화가 만들어지고 읽힐 수 있을 정도로 한국만화에 대한 소비가 다양해졌다”고 말했다.

한국만화의 진화된 언어

그러나 리얼리즘 만화의 새 경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들 만화책이 중요하거나 흥미로운 이유는 단지 ‘지형’ 때문만은 아니다. 그와 동시에 한국만화가 자신만의 ‘언어’를 갖추고 ‘작품’이 되는 지점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태일이 일하던 평화시장을 부감의 ‘투시도’로 표현한 <태일이>의 한 장면은 만화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당시 노동조건의 열악함을 생생히 전달한다. <100°c>는 문학적인 표현력으로 호소한다. 제목인 ‘100°c’는 사람들이 사회의 억압과 부조리에 대해 ‘끓어오른’ 민주화 항쟁의 ‘온도’를 나타낸다.

<푸른 끝에 서다>는 한 발 더 나아갔다. 1975년생인 작가 고영일이 군 복무 중 일어난 ‘연대 사태’ 때문에 영창에 갔던 경험을 풀어냈다. 입대 전 학생 운동에 몸 담았다는 이유로 철창 너머에 갇히고 진술을 강요받고, 이유 없는 모욕에 시달린 기억이다.

“아주 사소한 곳에서 그 일을 기억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그곳에 갔던 것이 구속이 아니라, 이렇게 그 기억을 매번 떠올려야 하는 것이 구속일 수도 있겠다”고 적거나 인간적인 모욕을 당한 후 자신을 거대한 벌레처럼 그리는 등 텍스트와 이미지가 현실과 만화적 상상력 사이에서 밀고 당겨지며 새로운 어법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본격적으로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또 개인의 체험을 상세히 진술하는 데 집중했다는 점에서도 새롭다. 그런데 그 결과가 정확하게 역사, 사회적 의미로 확장된다는 점 역시 괄목할 만 하다.

반이정 미술평론가는 이 책에 실린 비평에서 “군 문화가 곧 대한민국의 사회 병리현상으로 이어지는 이 사회에서, 고영일의 ‘학교-군대’ 사이를 오고 가는 체험담은 그곳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삶을 포괄함과 동시에 조망한다.(중략) 따라서 군 문화의 실상과 사회와의 유기적 관계를 투시한 거의 국내 최초의 장편 군대 만화가 아닐까 사료된다”고 말했다.

개인에게서 자연스럽게 불려나와 역사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모양을 갖춘 이 “소스라칠 리얼리즘”이야말로 한국만화가 외부에 저항하면서 진화된 한 단계가 아닐까.

"내 만화는 한국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푸른 끝에 서다' 고영일 작가


기획된 지 6년만에 단행본이 출간됐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누가 책에 대해 물어보면 내가 자꾸 '시간'에 대해 대답하더라. 그간 우여곡절이 많아서일 것이다. 그 일을 경험한지는 벌써 12년이 됐다. 경험했던 것을 다 옮겨 놓으니 남 이야기 보는 기분도 든다.

책 서문에 "내 삶의 한 지점을 정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마음을 정리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기회였다. 이 책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아직까지 그때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예 이 일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거나, 격분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상처를 헤집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힘들었을 것 같다.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책을 쓰면서 주변 사람들 모두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인터뷰를 청해도 대답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내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작업할 때 멈칫거리게 되었다. 나처럼 꼭 영창에 가지 않았어도, 그때 정치권력이 행했던 '이간질' 때문에 모두가 관련되고 모두가 상처 받았다. 서로 '프락치'가 아닐까 의심했다. 20대 초반 청년들이 그렇게 된 것, 영영 흠집 나고 움츠러든 것, 그 자체가 비인간적이지 않나.

책의 내용은 당시의 역사이기도 하고, 군대라는 제도 이야기이기도, 한국사회 전체 시스템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작업 때는 내가 믿었던 내 모습이 무참히 '박살난'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또 그 이후 어떻게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려 했다. 그런데 완성한 후 다시 보니 그 이야기가 곧 한 명의 인간이 사회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져' 가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더라.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