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의 몰락, 무크지의 컴백] 경제 위기로 복간된 계간지 잇딴 정간…무크지 대안 매체로 부상시장 통제 받지 않는 소통 공간, 대중과 지식인 잇는 매체 항상 필요


복간으로 기대를 모았던 인문사회 계간지들이 잇따라 정간된 데 반해 무크지가 긴 호흡 매체의 대안으로 출현하고 있다. 계간지의 폐간은 인문지에 냉소적이라는 한국사회의 성격이 여전히 변치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에서 시장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긴 호흡의 담론과 소통 공간, 언로(言路)에 대한 욕구는 엄존한다. 무크지가 지적 대중과 문화사회 지식인을 잇는 대안 매체로서 기능할지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 재기전서 후퇴한 인문사회 계간, '컴백'하는 무크지

복간으로 기대를 모았던 인문사회 계간지가 시장 논리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2007년 가을호로 복간해 화제를 모았던 계간 <비평>이 올해 여름호를 끝으로 정간을 선언했다. 역시 2007년 가을호로 복간했던 <사회비평>도 2008년 봄호를 끝으로 휴간했다. 계간 <당대비평>은 이미 2005년 2월 휴간했으며, 2007년 6월부터 연 2회 가량 단행본 형태로 책을 내고 있다.

반면 게릴라 식의 비정기 발행을 하는 무크지 형태를 채택한 인문사회지나 마니아지가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한길사는 지난달 15일 인문사회 무크지 <담론과 성찰> 창간호를 발간했다. 동물보호시민단체 KARA도 지난 7월초 반려동물을 주제로 한 무크지 <숨> 2호를 펴냈다. SF&판타지 도서관은 지난달 15일 SF무크지 <미래경>을 펴냈다.

상업적 의도를 전면에 노출하는 멤버십 매거진도 약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노블레스(Noblesse)>, <오뜨(Haute)>, <네이버(Neighbor)> 등은 대부분의 지면을 명품 소개글과 광고 등으로 채우고 있다.

◇ 계간지 왜 못 버티나

출판사 입장에서 계간지 정간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부담이다. 경제위기를 맞으며 한층 강화된 시장 논리는 상업성이 떨어지더라도 사회에 필요한 인문학적 성찰과 담론의 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들 매체는 대부분 인문사회학자에 의한 대중적 글쓰기로 채워져 수익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일부 출판사는 흑자를 내면서도 소유한 계간을 폐간하고 다른 출판사에 넘겨 수익을 챙기거나, M&A를 목적으로 정기 독자를 외면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잡지를 없애기도 한다.

이들 인문사회 계간은 주류매체를 뛰어넘는 깊이 있는 평론으로 독서교양층의 사랑을 받아와 아쉬움을 사고 있다. 특히 <비평>은 김우창(편집인), 장회익, 도정일, 최장집 등 내로라하는 인문사회학자들이 편집자문위원으로 참여해 관심을 모았다.

이번에 정간된 인문사회 계간은 대부분 매호 들어가는 2000만~3000만여 원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만성적 적자 구조에 허덕였으며, 정기 구독자 역시 3000여 명에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의 매체가 원고료를 지급하지 못할 정도의 경제난에 직면하자 정기 발행을 포기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근본적 원인은 진지한 독서 인구, 혹은 지적 대중의 빈약함에 있다. 한국출판연구소가 펴낸 <2008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월평균 잡지 열독량은 성인기준 0.4권으로 2.1권인 일본에 비해 5배 이상 떨어져 충격을 준다. 초등학생은 약 12배, 중학생 약 11배, 고등학생은 9배 가량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 전체 도서 중 잡지의 비중은 일본의 10분의 1 수준이다.

인문지에서 학자들이 대중적 글쓰기를 시도하기는 하지만 논문투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상적 기반이 부박한 대중이 잘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도 높다. 디자인을 비롯한 시각 요소를 좀더 고려해야 '비주얼' 세대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자명하다. 대부분의 계간지가 인터넷 사이트를 갖춰 접근성과 쌍방향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한 경우가 드물었던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부터 시계방향 김우창, 장회익, 도정일, 최장집 교수

◇ 인문지, 과연 없어도 좋을까

인문지는 없어져도 괜찮은 걸까. 인문지는 자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긴 호흡으로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고 소통하는 '청정공간'이다. 당연히 사회와 문화의 성숙에 올곧은 '언로'로서 인문지의 공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높다.

문화 수준이 높은 프랑스나 일본에서는 인문지가 철학적 수준의 문화사회 이슈 토론장으로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다. 영국에는 2000여 부만 찍으면서도 유지되는 과학 계간이 있을 정도다.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은 학문과 대중 사이의 '소통'이다. 일반인이 학자의 논문을 읽고 내용을 잘 이해하기는 힘들다. 인문지 편집주체와 필자는 대부분 순수 학자들이다.

이들은 인문지에서 논문과 비슷한 분량으로 대중적 글쓰기를 한다. 인문지는 학자들이 '그들만의 잔치'에서 벗어나 학술적 담론과 대중적 비평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며 사회적 의제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기능을 하는 셈이다. 학술 논문이나 저널과의 차이다.

'통섭'의 측면에서도 인문지의 역할은 크다. 인문지에서는 학제 간의 벽이 높은 대학 교수들이 동일한 주제를 놓고 함께 모여 토론하며 기획회의를 하고 다양한 시각의 의견을 제시한다. 계간 <비평>의 경우 정치학자, 영문학자, 사회학자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기획회의와 집필, 토론에 참여했다. 학문 그 자체의 진흥에도 인문지는 기여하는 것이다.

사회∙문화가 성숙할수록 다양성이 높아진다는 면에서, 자기표현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인 동인지 성격의 마니아 무크지 출현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번에 발간된 무크지 일부는 주류언론이 제공하는 담론의 장에서 자주 배제돼왔던 마니아들이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토론과 논의의 통로를 마련한 것이어서 이채롭다.

무크지 <숨>은 상업적 내용 일색인 애견잡지들과 달리 유기견 문제, 동물보호법의 정책 집행을 비롯한 저널리즘의 내용을 담고 있다. SF 장르 문학 마니아를 주축으로 발간한 <미래경>은 SF장르인 스타트렉에 대한 문화적 영향에 대한 글에서부터 SF 초청·응모작 6편까지 담고 있다.

'오타쿠(마니아)'문화가 발달한 일본 각지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연구하고 기록한 무크지를 소규모로 발행해 길거리에서 판다. 이들은 수익을 자신들의 마니아 활동에 재투자한다. 작은 것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무크지는 문화사회적 자산이 될 여지가 크다.

콘텐츠가 힘이 되는 시대에 기록성과 보존성이 높은 오프라인 매체의 특성 역시 계간지∙무크지의 문화저력이다.

◇ '계간지 → 무크지' 시대의 공통점

계간지의 폐간, 무크지의 '컴백'은 비슷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나타났다. 한번은 정치의 힘에 의해서, 한번은 자본의 힘에 의해서다. 주류언론에 강제적 힘을 넣을 때, 열린공간에서 사회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 마치 '풍선효과'와 같이 '계간지?무크지'로 담론 형성 공간이 옮겨간 것이다. 풍선에 힘을 넣은 장본인은 둘 다 사회적 패권(헤게모니)의 주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기간행물을 통한 자유로운 사회적 소통의 기회가 무너질 때, 말하고자 하는 소수가 게릴라성의 무크지로 다수의 대중과 소통을 시도했다.

군부독재 시절의 정치적 탄압에 의해 인문지는 '인문사회 월간?문학 계간?무크지'로 형식을 바꿔왔다. 1960~70년대 장준하, 함석헌 등의 재야학자를 중심으로 한 <사상계>나 <기독교 사상> 등 인문사회지 월간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를 뛰어넘어 소장 학자의 식견을 펴내며 정치사회 담론을 주도했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로 인문사회지가 폐간되자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등의 문학 계간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1980년 등장한 신군부에 의해 언론통폐합이 행해지면서 <인물과 사상>을 비롯한 무크지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최근 무크지의 출현은 출판물에 대한 정치적 탄압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의 힘에 의해 '계간지?무크지'로 긴 호흡의 사회적 담론의 장이 옮겨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치로부터 사회적 패권을 넘겨받은 시장의 힘에 의해 지적 토론장이 후퇴한 셈이다.

윤평중 한신대 사회철학과 교수(전 <비평> 편집위원)는 "<비평> 정간은 우리 사회가 선택한 것이므로 나쁘게만 볼 수는 없다"면서도 "우리의 독서교양층이 그만큼 얕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이어 "일간·주간·월간지는 한 이슈에 대해 심리적 안정감을 갖고 논의하고 중장기 전망을 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긴 호흡의 담론을 펼치는 매체의 필요성은 항상 있다"며 "특히 굉장히 다이나믹하고 빠른 한국사회에서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깊이 있는 담론의 소통에 대한 욕구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