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의 몰락, 무크지의 컴백]학문과 사회 연결해 참여·연대 소통 가능한 열린 사회 만들기

계절의 문을 열 때면 어김없이 도착하던 계간지들이 언젠가부터 종적을 감췄다. 정기 구독을 하던 열혈 독자는 아니었으나, 그간 다닌 회사의 명성 덕에 돈 들이지 않고 볼 수 있었던 계간지들의 빈자리가 새삼 허전하다.

2005년 언젠가부터 <당대비평>이 보이지 않았고, 2008년에는 <사회비평>이 책상에서 사라졌다. 2006년 가을 복간 이후 화가 황주리의 의미심장한 그림들로 표지를 단장했던 <비평>은 2009년 여름호를 끝으로 무기한 정간에 들어갔다. 연간 누적 적자가 1억 원 이상이라고 하니 사실상 폐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계간지, 지성인 사회의 방향타 역할을 하다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선보인 잡지는 한반도 근현대사의 격한 부침과 궤를 같이 하며 성장했고, 세태의 변화에 따라 다양화의 길을 걷고 있다.

1953년 4월 창간된 월간 <사상계>와 1957년 8월 창간된 <기독교사상>은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며 한국 사회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들 월간지는 한국사회의 모순에 맞섰을 뿐 아니라 사상과 이론이 관념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하는, '행동하는 양심'의 전형을 보여줬다.

한편 1950~60년대가 두 월간지의 전성시대였다면 1960년대 후반과 1970~80년대를 관통하는 지성사의 흐름은 역시 계간지다. 이 당시 선보인 계간지들은 한국 문학과 사상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한국 사회의 사상적·철학적 기반을 다지는 밑바탕이 됐다.

한국 최초의 계간지인 <창작과비평>은 1966년 1월 창간되었는데, 이후 숱한 문예 계간지의 창간 작업의 모태이자 작가들의 등용문이 됐다. <창작과 비평>은 종종 '백낙청'과 이음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만큼 사회성 짙은 글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을 올곧게 지적하고 있다. '창비주간논평'이 아직도 지성인 사회의 방향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1970년 창간된 <문학과 지성>은 '국수주의에 반대하는 보편적 인식의 가능성'과 '한국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목표로 <창작과 비평>과 함께 문학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했다. <창작과 비평>이 사회의 현실 문제에 집중했다면 <문학과 지성>은 문학의 순수성과 자유를 옹호하면서 역사와 철학적 문제에 천착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당시 짙은 사회성을 이유로 등록이 취소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당시 신군부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은 물론 월간 종합잡지 중 한국 최초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했고, 전문 미술인이 편집에 참여했던 <뿌리 깊은 나무>와 <씨의 소리> 등 총 172개 정기간행물을 폐간했다.

두 계간지를 포함한 잡지들이 신군부의 눈에는 '각종 사회적 부패 요인, 음란 저속 외설적 내용으로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에 유해, 계급의식의 격화·조장, 사회불안을 조성'한 간행물이었지만, 수많은 지성인과 청년에게는 시대를 밝히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상계 필진(왼쪽), 창작과 비평

◇ 계간지와 무크지의 엇갈린 행보

1970~80년대를 풍미한 계간지의 쇠퇴는 사실 급격한 사회변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급변하는 사회변동은 시대적 고찰과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철학, 사회를 읽는 밝은 눈을 가진 계간지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시대의 변화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전광석화와 같은 변화였다. 이같은 변화는 담론의 산실이자 지성인들에게 공론장을 제공했던 계간지 몰락을 주요 원인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계간지들이 나오면서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를 열었다"는 한 언론매체의 기사가 무색할 정도로 사회성 짙은 계간지는 이제 그 기세가 저물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모태가 되는 출판사들의 명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사 이래 최악의 불황"이라는 꼬리표를 해마다 달고 사는 출판계에서, 계간지의 장기적 발행은 곧 적자의 누적을 의미한다.

<비평>이 계간지의 손익분기점인 3000부에 턱없이 모자란 정기구독자로 인해 연간 1억 원 이상의 적자를 안고 살았다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분초를 다투며 변하는 사회변화를 따라잡기에는 3개월이라는 시간은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다.

사회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글쓰기에 사로잡힌 이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 더 관심이 많은 인터넷 공간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 '먹히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반면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제위기 당시 출판시장의 위기 돌파구로 등장한 무크지가 최근 다시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계간지와 단행본 도서가 가진 정형성을 탈피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변화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한길사가 창간한 <담론과성찰>의 편집주간을 맡은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읽을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라며 외면하고, 대중들은 '너무 어렵다'며 외면하는 이제까지의 담론 작업들이 안고 있던 한계를 극복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계간지가 그간 보여준 정형성을 탈피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고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인 셈이다.

◇ 지금 지식인들의 의제 설정 능력에 문제가 있다

세칭 시사종합 계간지는 학문의 사회적 의미를 찾아가는 교두보와 같다. 문학 관련 계간지는 현재 150여 종이 넘게 발간되고 있지만 시사종합 계간지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 힘든 것이 오늘 학문과 지성계의 현실이다.

매체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해마다 100여 종의 잡지 등 매체가 탄생하고 그 숫자만큼의 매체들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정보는 인터넷 공간을 무대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제 기하급수적이라는 말도 바른 표현은 아니다.

이처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무한대로 확대된 것이 계간지의 몰락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지만 한국 지성계가 정리된 의제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몇 해 전 <교수신문>은 '21C 한국 지식인들의 자화상'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계간지의 몰락을 다루었는데, "이런 현상(계간지의 몰락)을 문제시하고 설명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질타한 바 있다. 출판사의 경영상의 어려움이 진정한 이유가 아니라 한국 지식인들의 의제 설정 능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먼슬리 리뷰>, 영국의 <뉴 레프트 리뷰>와 함께 세계 3대 진보저널로 꼽히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지인 <마니에르 드 부아>(Maniere de voir)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잡지다.

그러나 에릭 홉스봄, 이냐시오 라모네, 노엄 촘스키 등이 필진으로 참여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글들 중에 원문과 참고문헌을 선택적으로 제공하면서 프랑스 지성인들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잡지는 현재 격월간으로 발행되고 있지만 1988년부터 1997년까지 계간지로 발행된 바 있다.

한편 세계적 권위의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는 계간지 <막스플랑크포슝>를 발간하고 있다. 막스플랑크연구소는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 32명을 배출한 걸출한 연구소로, 이 계간지를 통해 학술적 성과를 사회적 대안으로 창출하는 데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의 무한대 팽창 속에서 계간지가 쇠퇴하고 무크지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적인 상황일 수 있다. 계간지가 쇠퇴한다고 해서 인문학의 전격적인 쇠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무크지가 득세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향하는 깊이가 갑작스레 깊어지지 않는다.

계간지든 무크지든 그것이 가져야 할 궁극의 가치, 즉 학문과 사회를 연결해 참여와 연대, 소통을 가능케 하는 열린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두 번 강조할 필요도 없다. 계간지와 무크지의 새로운 부활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장동석 출판칼럼니스트 97449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