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간 통섭을 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 바탕 새로운 예술의 등장과 다양한 시도

1) 'j-th time'
2), 3) 미디어 퍼포먼스 '봄의 제전 III'


지난 세기말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 이후, 현대예술은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제 미술은 더 이상 그림이나 조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이 매체가 되지 않는 춤도 있다.

무음으로만 이루어진 음악도 있다. 이들 '새로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개념을 필연적으로 확장시키고 때로는 무너뜨리는 과정이 요구된다.

특히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한 과학의 발달은 언뜻 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작품의 매체로 첨단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요즈음의 예술은, 그래서 때로는 '신기술의 전시'에 가까워보이기도 한다. 고전적인 재현 도구 대신 디지털 영상 장비로 무장한 새로운 예술의 범람은, 고전 걸작들에 익숙한 관객에게 아직까지는 낯선 풍경이다.

하지만 와이브로(Wi-bro), DMB와 같은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이나 로봇공학과 같은 첨단기술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면서 예술과 과학기술의 결합 양상에도 또 다른 변화가 나타나게 됐다.

예술가와 과학자들만의 '기분 내기'였던 '새로운 예술'이 대중적으로도 소통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그것'은 예술과 과학기술, 감성과 이성, 몸과 두뇌 등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제3의 공간에서 새로 태어난 무언가가 된다.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신종 예술'을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학계와 언론에서는 이럴 때 '통섭'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말은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과 그 제자인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의 번역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예술과 인문학, 과학기술과 예술 등 융합 담론이 있는 모든 곳에 통섭은 빠지지 않고 쓰인다. 학문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 구분도 무의미해진 지금, 통섭적 태도는 새로운 장르를 이해하는 데 효과적인 처방전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통섭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윌슨과 최 교수로 이어진 현재의 '통섭'은 사회과학과 인문학, 예술의 통섭이 결국 자연과학(사회생물학)적 원리 하나로 설명된다는 '수직적 통섭'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같은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 담론에 반기를 두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새로운 통섭을 주장하는 이들은 '통섭'이라는 단어는 그대로 사용하되, 그 내부에서 다른 맥락의 의미를 새로 부여하기도 한다. 인문학자인 박이문 연세대 교수는 현재의 통섭 담론의 환원주의적 한계를 지적한다.

모든 문화·사회현상에 내재된 인과관계를 발견하면 인간이나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결정론은 위험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여 그는 이와 반대로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의 흡수를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담론은 통섭이 아닌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흡수한 '메타 인문학'으로서의 또 다른 통섭이 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과 과학기술의 통섭 교육사업을 운영해온 심광현 영상원 교수도 이 같은 환원주의적 통섭을 경계한다. 다만 심 교수는 진정한 통섭이란 어느 일방향으로의 흡수가 아니라 예술·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이 '대등하게' 소통하는 수평적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용어의 의미를 '통섭(統攝)' 대신 '통섭(通攝)'이라고 바꿔 사용한다. 서로 끌어당겨 통하게 한다는 본래적 의미에 중점을 둔 것이다.

심 교수는 수평적 통섭을 위해서는 그 사이를 매끄럽게 연결해주는 촉매제가 필요한데, 그 역할에 가장 적격인 것으로 예술을 꼽는다. 아쉬운 것은 그 실험의 구체화된 형태가 현재 정부에 의해 중지된 한예종의 U-AT 통섭교육사업이라는 점이다.

'제3공간'이라는 첨단 이슈와 함께 더욱 중요한 것으로 대두된 통섭은, 사실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학문적 태도다. 통섭은 근대의 전문화된 분과학문 체제가 형성되기 전까지 행해졌던 방법론이자 통합적인 연구방법이었다. 그러나 세분화된 학문은 반쪽 자리 전문가들을 양성했고, 그에 따라 통섭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오히려 필연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국의 C. P. 스노우는 오늘날 인문-사회과학계와 자연과학-공학계 간의 상호무지와 반목을 경고하면서 '두 문화(The Two Cultures)'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두 문화 사이의 괴리와 의사소통의 단절이 현대문화의 중대한 장애물이자 심각한 위협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3공간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오늘날, 문화 간 통섭의 현주소는 여전히 구분되어 한 데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한 상태다. 하지만 이것은 제3공간에서의 문화 간 통섭에서 예술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본연의 장점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한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이제 예술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대신 중요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진 예술이냐의 문제다. 예술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주목할 만한 예술의 등장에는 대부분 이 같은 논쟁이 있어 왔다.

현대미술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세잔과 피카소의 시각이 그렇고, 현대성의 진정한 출발로 평가되는 뒤샹의 대형 사고, <샘>이 그렇다. 예술과 기술 사이에서 부유하는 일련의 '실험'들은 현대예술의 애매성이나 모호성을 더욱 극대화시켜 열린 담론으로서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예술이자 기술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Art'는 제3공간에서 과학기술과 인문학적 개념을 탑재하며 그 외연을 무한대로 넓혀가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