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주의 그리고 대중문화] 2002 월드컵서 시작… 스포츠·예능 프로 등 통해 재생산

미녀들의 수다(아래)
아이돌그룹 2PM의 일원인 박재범이 데뷔 이전에 작성한 마이스페이스 게시물 때문에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박재범이 미국 친구들에게 사적으로 던진 말들이 한국 비하 발언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한국 특유의 '민족정서'를 건드린 것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박재범 사건은 단순한 민족주의적 반감이라고 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미국시민권을 가졌지만, 엄연히 '재미교포'라는 테두리 내에서 그를 '같은 민족'으로 볼 근거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박재범 사건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민족주의가 애국주의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한 측면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소비되는' 애국주의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애국주의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양상은 세계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집단을 구체적 현실로 현시시키는 것이 국가라고 한다면,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보다도 국가라는 측면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 애국주의라고 할 수가 있는데, 애국주의가 국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민족주의는 특정한 민족의 집단성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정서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근대국가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정립되었다기보다, 미완의 근대국가를 완성시키기 위한 '사회운동'으로서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최근 들어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애국주의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렇게 운동으로 지속하던 민족주의가 국가라는 현실적 재현으로 고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고정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를 통해 소비되고 있는 애국주의이다.

애국주의는 선별적인 이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애국을 하는 사람과 애국을 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해서 전자에게 이타심을 발휘하고 후자에게 배타심을 보여주는 것이 애국주의의 특징이다. 이번 박재범 사건에서도 이런 특징은 두드러진다.

과거 유승준의 경우는 병역과 관련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있었지만, 박재범의 경우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혐의'가 없었다. 박재범의 발언은 '한국인은 정상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한국을 가리켜서 '즐거운 지옥'이라고 말하는 광경은 일상적으로 목격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애국주의적인 이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한국인'은 한국을 이상하다고 말해도 괜찮고, 그 대상에서 제외된 '비한국인'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박재범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한국 사회의 애국주의라는 것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명확하게 폭로하고 있다.

애국주의는 국가에 충성하는 구성원의 평등은 인정하지만, 거기에 충성하지 않는 구성원의 평등권을 제한하는 것에 동의한다. 얼핏 보면 이런 애국주의의 논리는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국가가 구성원의 요구를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충성을 맹세해야 할 일률적인 국가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박재범 사건은 이런 애국주의의 구조적인 문제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의 애국주의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재한 불구의 '사랑'일 수밖에 없다. 계급적 박탈감까지 겹쳐져서 이타성보다 배타성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재범 사건은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비정상성을 역겹다고 한 박재범의 발언은 본의 아니게 애국주의의 판타지를 위협하는 '실재의 귀환'을 초래한 것이다.

대중문화가 만드는 판타지

대체로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런 애국주의 판타지를 재생산하고 유지하는 것에 몰두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이다. 김연아와 박태환은 애국주의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상징적 기표였다. 개인의 발전을 위한 김연아와 박태환의 노력은 곧 애국의 행위와 동일시되곤 하는데, 그 이유는 '국위선양'이라는 고전적인 애국주의의 코드 때문이다.

배타적인 애국주의는 포섭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미녀들의 수다>는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보여준다. 박재범과 유사한 발언들이 쏟아지는 곳이 <미녀들의 수다>이지만, 별 소동이 없는 까닭은 이들이 '미녀들'이고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의 재현을 가능하게 만드는 주인기표는 언제나 남성적이라는 사실을 <미녀들의 수다>는 잘 보여준다.

박재범의 경우는 '재미교포'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배신감이 더 크게 작동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한국의 애국주의가 뿌리 깊은 인종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가 있다. 박재범의 '한국 비하'는 이런 인종주의에 근거한 포섭의 논리를 거부하는 모양새로 비쳤다고 할 수 있다. 인종은 같은데,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인종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파열이 발생한 것이다.

대중문화는 사실 해당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판타지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생산되는 현대의 대중문화는 애국주의도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하게 만든다. 대중문화가 애국주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은 이윤의 법칙에 들어맞기 때문이지만, 그 효과는 자본주의의 시장논리를 넘어간다. 박재범으로 인해 소속사는 손해를 불가피하게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박재범의 축출을 소비자의 권리 주장이라고 강변하는 논리는 애국주의에 내포해 있는 과잉을 무마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이런 변명은 수미일관한 논리로 무장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숱한 균열들이 있다. 이런 균열이 발생하는 까닭은 '애국'이라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논리와 '능력'이라는 신자유주의적인 논리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이데올로기는 특유의 방식으로 '국민'을 만들어낸다. 자유주의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이 국가와 공동체에 쓸모 있는 애국적 인재라면, 신자유주의가 설정하는 인간형은 국경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글로벌 인재이다. 박재범 사건은 두 인재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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