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폭력을 성찰하다] 개인·공권력 등에 의한 폭력 법과 제도 한계 메울 토론의 장으로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 마을 르망은 생각보다 끔찍한 잔혹사를 안고 있다. 1933년 2월 파팽 자매가 저지른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그것이다. 크리스틴과 레아, 두 파팽 자매는 변호사인 르네 랑슬랭의 충실한 하녀였다. 이들은 주인이 출타한 사이 주인 모녀의 눈알을 뽑은 뒤 망치와 부엌칼, 양철물병으로 살해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건이 발각된 후 이 두 자매의 행동이었다. 그들은 몸을 씻고 나이트 가운을 입은 채 침실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이들은 사건을 은폐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살인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고, 정당방위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뭇 사람을 놀라게 한 충격적인 말을 했다. "나는 여주인들의 피부를 갖고 싶었어요. 대신 그들이 우리의 피부를 갖고요." 두 자매는 동성애 관계로 밝혀져 충격을 더했다.

프랑스 사회의 파장은 엄청났다. 허나 그 대응은 프랑스답게 독특했다. <잔혹과 매혹>이란 책에서 이 사건을 다룬 레이첼 에드워즈는 "많은 프랑스 지성들이 이 사건에 매혹됐다"고 표현했다.

정신분석학과 막시즘적 재해석이 이뤄졌다. 문학과 영화에서는 주종관계, 인종문제, 이에 따르는 사회적 증오를 다루는 담론의 소재로 활용했다. 당대의 지성이 이 사건을 분석하고 변주했으며 예술을 통한 사회적 성찰을 거듭했다. 라캉, 사르트르, 보봐르 등 시대의 지성이 이 사건을 다뤘다.

그들은 파팽 자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영화, 소설, 희곡, 그림 등으로 만들었다.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에로스트라트>, 시몬 드 보봐르의 자서전 <연륜의 힘> 등이 그것이다. <심연>, <의식>, <자매여 내 자매여>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치마를 걷어 올리는 성모> 역시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선정적 소재지만 지성들이 중심이 돼 문화를 도구로 오랜 시간 연구하고 토론했다.

조두순 사건, 강호순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용산 참사, 촛불정국을 비롯해 연이은 우리 사회 이슈의 핵심은 '폭력'이라는 단어 하나로 응축할 수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개인의 폭력, 공권력에 의한 폭력, 이에 저항하는 약자의 폭력 등이다. 폭력은 한국사회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많은 법과 제도적 보완책이 나왔다. 그러나 법과 제도적 보완, 행정부의 약속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 조두순에게 전자팔찌를 채우고 화학적 거세를 한다 해도, 강호순에게 무기징역을 내리고, 경찰청장을 추궁해도 뻥 뚫린 가슴을 채우지는 못한다. 성폭력 사건을 내 일같이 느끼는 여성들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씻지는 못한다.

이 간극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이 절망을 어떻게 감싸야 할까. 거기에 예술이 있다. 일단의 작가들은 아직도 용산을 떠나지 않고 사고 현장이자 분향소가 있는 남일당에 있다. 그들은 망자를 그리고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기록한 사진을 전시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약자의 유일한 무기'라는 '기억'일 게다.

폭력을 다루는 예술이 저항의 방법으로서 사회적 약자가 쓰는 저항 폭력의 정당성 문제를 토론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기득권이 장악한 이성 담론의 장에서 이런 소수의견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똑같은 폭력을 사용하지만 공권력은 쉽게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약자의 저항폭력은 왜 정당성을 인정 받지 못하느냐는 철학적 논박이 예술이라는 감성의 장에서 보다 자유롭게 개진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평화를 희구하는 메시지만 담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개인의 폭력이지만 사회구조의 문제를 담고 있는 폭력 사건을 재구성하며 문화는 폭력을 선동(?)하는 딜레마를 낳는다. 영화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공공의 적>에서는 주인공이 폭력적 상대를 절대적 악으로 상정하고 약자의 폭력으로 이를 응징하고 심판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이는 폭력을 이용해 예술을 상업화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용산 참사사건 직후 나온 즉시적 참여예술은 이후에 나오는 작품들에 비해 단순한 형식을 띤 것이 사실이다. 완성도 문제도 주류예술 시장에서 폭력을 다룬 예술을 평가절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더 있다. 폭력이라는 주제가 일정한 시장을 노리고 거의 전면적으로 상업 목적에 이용되는 경우다. 실제 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 대부분이 개인의 폭력을 자아내는 사회구조적 모순에 천착하기보다는 피를 뿜는 장면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는 데 집중한다. 오락적 시선으로 폭력을 다뤘으되 그 본질에 접근하지 못한 예술은 허다하다.

분명한 것은 문화예술이 폭력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토론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장이라는 점이다. 문화예술은 개인의 폭력을 단지 개인을 처벌하고 비난하고 단죄하는 데서 그치는 법과 제도 이상의 사회적 기능을 한다. 사회구조에 대한 성찰을 통해 결과를 다시 사회에 돌려줄 수 있다. 조두순이라는 한 인간보다 무서운 것은 왜곡된 성인식과 문화인데 그것에 대한 지속적 성찰 없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법과 제도는 꼬리는 자를 수 있을지 몰라도 몸통을 자를 수는 없다. 망자와 남은자의 한을 위로하는 것은 사망신고가 아니라 한판 굿인 것과 같은 이치다. 계급의 불평등과 비교하는 욕망에 의한 구조적 폭력을 바로 보는 것이 옳다. 행위자의 폭력에만 집중하는 굿으로는 이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이란 단행본을 펴낸 공진성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우리는 폭력에 대해 행위자에만 포커스를 둬 그를 죽여버리고 왕따시키는 방식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행동하지만, 한바탕의 오락으로 소화해버린 뒤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한 사회의 폭력의 총량이 일정하다면, 견디지 못하고 터졌을 때 곪은 부분만 치유하는 것으로 폭력적 에너지를 다스릴 수는 없으며 이를 다루는 사유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