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제영화제를 가다] 최근 개장한 백화점 후원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대 개막 알리는 제스처역대 최대 규모보다 '아시아 영화의 중심지' 정체성 잃어버릴라 우려도

1-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주 상영관 중 하나인 센텀시티 신세계백화점 2-부산국제영화제가 제작하는 부산 프로젝트 기자회견 3-개막식을 찾은 조시 하트넷과 이병헌 4-1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기 전 상영작 중 일부를 DVD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캐나다 다큐멘터리영화 감독 피터 윈토닉의 <시네마순례pilgIMAGE>를 골랐다. 감독이 역시 영화를 전공하는 딸과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영화사의 중요한 지점들을 다니며 찍은 영화다.

감독 스스로 '디지털 일기'라고 밝혔듯, 영화를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내 친구의 여행기 같다. 경전화된 영화사에서처럼 경직된 태도로 '영화'를 정의하지도 않는다.

출발 전 감독은 태어난 병원에서 찍힌 생애 첫 사진에서 출발해 어린 시절 8mm 카메라를 손에 넣은 경위까지 훑으며 자신에게 영화란 이처럼 삶과의 접점에서 체험해온 것이었음을 밝힌다.

친근하고 유쾌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뤼미에르 형제와 함께 서구 영화사의 개척자로 꼽히는 멜리에스의 무덤에 찾아가 그의 죽음이 근처 짐 모리슨 무덤의 북적거림에 가려졌다는 데 한탄하거나, 프랑스 영화감독 고다르가 사는 스위스의 한 동네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며 딸과 "그가 올까?", "아마도", "저 사람인가?", "그럴 수도" 따위의 '부조리'한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그래서 이 챕터의 제목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패러디한 '고다르를 기다리며'다. 베케트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이는 모든 영화팬들의 꿈이다. 먼 거리도 마다 않고 종종 며칠 분량의 짐까지 기꺼이 짊어진 채 영화제를 찾는 이들의 꿈이기도 하다. 영화제에서 영화는 단지 보는 것이 아니다. 지역의 풍광, 만난 사람과 말들, 상영관 사이 동선, 일정을 짜는 고뇌와 먹고 마신 기억까지 어울려 체험되는 것이다.

1-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 2-영화 '도시/마케팅'이라는 주제로 열린 컨퍼런스 3-조시 하트넷, 이병헌, 기무라 타쿠야가 출연하는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오픈 토크 현장 4-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핸드 프린팅 행사
부산국제영화제를 앞두고 들뜨지 않을 수 있는 영화팬이 어디 있을까. 해운대 상영관에서 영화를 본 후 걸어서 바다에 갈 수 있다. 애피타이저로 <시네마순례>를 보는 동안은 기자라기보다 '순례자'의 심정이 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센텀시티 시대 개막

그러나 부산에 체류한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영화를 보는 틈틈이 바다의 정취를 만끽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 상영관이 센텀시티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남포동과 해운대의 상영관에서도 영화가 상영되기는 했지만 이미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둔 작품을 포함한 한국영화 중심이었고, 영화제 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두는 최신 해외 영화는 센텀시티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 내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모여 있었다.

결국 대부분의 관객들에겐 이들 백화점을 오르내리는 동선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컨벤션 센터인 BEXCO와 대형 마트,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센텀시티를 중심으로 상영관을 재편한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최근 개장한 백화점들이 홍보 효과를 노려 제안한 후원을 받아들인 것이고 나아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제스처다. 영화제 전용관인 두레라움이 2012년 센텀시티에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두레라움이 완공되면 부산요트경기장에서 열리는 야외상영은 사라진다. 개막식도 3천 명 이상 수용 가능한 두레라움 안으로 흡수된다. 올해 센텀시티에서의 영화 관람은 거의 모든 작품을 한 공간에서 상영할 미래 부산국제영화제의 맛보기 경험인 셈이다.

그 '밝은' 미래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쾌적한 환경에서 편리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영관을 찾아 우왕좌왕하거나 다음 상영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길거리를 질주하는 곤경에 처하지 않을 것이고 노후된 시설로 인한 영사 사고는 전설이 될 것이며, 감독이 의도한 화면과 사운드는 정확히 구현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얻는 것만 있을까. 센텀시티 신세계백화점 내 CGV와 롯데백화점 내 롯데시네마를 오가며 영화 보기란 생각만큼 쾌적하지 않았다. 우선 거리의 문제. 지도상에야 두 건물이 붙은 공간이지만 상영관이 모두 7층 이상에 위치한 만큼 오르내리는 거리가 만만치 않다.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에도 한계가 있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는 고객을 조금이라도 더 둘러보게 만들려는 목적 때문에 연이어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아랫층에서 올라온 에스컬레이터의 반대편에 있다. 매번 한 바퀴씩 돌아야 하는 셈이다. 엘리베이터는 주차장 때문에 지하 4~5층까지 내려갔다 오고, 거의 층마다 멈춘다. 오가는 데 족히 20~30분이 걸리는 바람에 다음 상영시간에 늦을까 초조한 심정은 여전했다.

응당 느긋한 쇼핑객들과 즐비하게 늘어선 각양각색의 상품들 사이로 잃어버린 것은 시간만이 아니었다. 영화 관람은 소비 행위의 연장선에 있었고, 서울을 포함해 어느 대도시에나 있는 첨단 쇼핑몰의 기시감이 부산에 있다는 장소적 감각을 밀어냈다. 해운대는 멀었고, 자갈치 시장은 아득했다.

초창기 부산국제영화제의 주 상영관들은 남포동 영화의 거리에 있었다. 6.25 전쟁통에 형성된 국제시장과 자갈치 시장이 가까운 곳이다.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근처 골목을 기웃대고 길거리 음식을 먹으면 겉핥기로나마 부산의 연원을 맛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 상영관이 해운대 근처로 옮겨 갔을 때에는 바다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온갖 상품 브랜드가 눈을 현혹하고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센텀시티 시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산'은 어디에 있을까.

역대 최대 규모의 속내는 무엇일까

이는 그저 촌스러운 영화 관객의 푸념에 불과할지 모른다. 알다시피 부산국제영화제는 관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영화문화는 물론 영화산업의 중흥에 기여하는 행사이고, '아시아 영상 도시'로서의 미래를 구상하는 부산시의 행정적 전시장이거나 지역 경제의 동력이며 부산시민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규모가 커질수록 이해관계는 다양해지고 서로 경합하는 법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규모는 역대 최대다. 예산 측면에서도, 상영작 편수와 내용, 초청 인사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약 100억 원의 예산은 작년보다 10억 원 가량 늘어난 것이며 상영작은 70개국 355편에 달했다.

홍콩 액션영화의 대부격인 조니 토 감독, 정치적 영화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리스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 이탈리아 호러 영화의 살아있는 기념비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 등이 왔고 브라이언 싱어 감독과 배우 조시 하트넷 등 할리우드 유명인사들까지 볼 수 있었다.

'플래시 포워드'라는 새로운 부문을 마련해 아시아 밖 신인 감독들의 작품을 아울렀다.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위용을 세계로 확장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작년 "315편이라는 상영작 수는 너무 많다"며 영화제 규모를 축소할 뜻을 밝힌 김동호 조직위원장의 발언이 무색하게 올해 오히려 판이 커진 데에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도시 브랜드 작업의 중추로 삼으려는 부산시의 행정적 판단도 한몫 했다. 경기 침체로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부산국제영화제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것이 바로 정부와 부산시였다.

하지만 규모가 클수록 영화제 자체의 지향성을 뚜렷이 지키기는 어려워진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그 존재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온 '아시아 영화의 중심지'라는 태생적 기치보다도 '역대 최대'라는 규모의 논리가 앞선 인상이다. 규모 확장이 다른 아시아 영화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후자가 전자를 잠식하는 것은 아무래도 주객전도다.

아시아영화연구소장인 김진해 경성대 연극영화학부 교수는 "개막작이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점에서부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 영화가 과연 아시아영화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인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아시아영화의 미학을 탐구하려는 의지가 있을까? 영화제 정체성의 중심에는 영화 그 자체가 있어야 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적 영화제가 되려면 규모를 확장하기보다 정체성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산'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떻게 도시 브랜드화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까. 아시아영화연구소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써 12일 경성대학교에서 부산 지역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영화/도시/마케팅'이라는 주제의 컨퍼런스를 열었다.

발제를 맡은 남인용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부산국제영화제 개최가 '영화 도시'로서의 부산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며 자체적인 영화 산업 인프라 구축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홍보'는 홍보 활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생력이 드러난 결과라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시 지역적 맥락을 고려하고 독자적인 컨셉트를 추구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튼튼히 할 수 있다.

김천길 경성대 경영학과 교수 역시 지역 문화행사로서의 부산국제영화제의 의미에 주목했다. 영화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밑바탕에는 부산 시민들의 세금과 동의, 전방위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인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어떤 조직도 잘 되기 어렵다"는 경영학적 원칙을 예로 들며 소외되어 가는 부산 시민과의 관련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깥에 보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라고 주장했다.

한편 아시아영화연구소의 권수미 연구원은 아시아 지역 예비영화인을 발굴해 교육하는 프로그램인 아시아영화아카데미(Asian Film Academy), 아시아 감독 제작자와 투자자의 만남을 주선하는 아시아 최대 프로젝트 마켓인 부산프로모션플랜(Pusan Promotion Plan)과 이를 확대개편한 배급 중심 마켓 아시안필름마켓(Asian Film Market), 아시아 영상산업 관련 지원기구들의 도시네트워크인 아시아영상위원회네트워크(Asian Film Commission Network) 등을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제도들로 평가하며 이를 통해 구축한 '아시아 영화의 중심지'로서의 문화 산업적 역량을 도시마케팅에 활용할 것을 제언했다. 지금 부산국제영화제가 부각해야 할 부분은 규모 등의 외형이 아닌, 지난 14년간 다져온 내실이라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직접 제작하는 영화 <부산 프로젝트(가제)>의 행보도 주목할만 하다. 3명의 아시아 감독이 부산을 배경으로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어 내년 칸영화제에 출품하는 것이 목표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를 만든 일본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 <검은 호랑이의 눈물>과 <시티즌 독>을 만든 태국의 위시트 사사타니엥 감독,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뉴욕이나 파리 등 세계 대도시들이 영화를 통해 그 트렌디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만들어간 전례를 생각해볼 때, 부산의 도시 이미지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관건은 부산의 장소성을 얼마나 적절하고도 인상 깊게 구현해내느냐다.

삶의 주요 공간이자 역사와 미래가 충돌하고 다양한 욕망이 들끓는 도시 경관과 내러티브는 현재 아시아영화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테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청두, 사랑해>, <사왓디 방콕>, <타이페이 24시> 등 아시아 도시들이 배경이자 주인공인 영화들이 여러 편 선보였다.

센텀시티 시대 부산국제영화제의 과제

한국영화계는 물론 아시아영화계에서의 부산국제영화제의 입지가 강화된 만큼, 영화제에 얽힌 이해관계와 기대되는 역할도 다양해졌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더이상 관객을 위한 서비스만도, 한국영화인들의 축제만도, 지자체의 정책적 행사만도, 지역 문화 산업의 중추만도 아니다. 이 다양한 역할들을 아우르고, 특정 권력의 논리에 복속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 부산국제영화제의 과제일 것이다.

바야흐로 본격화할 센텀시티 시대의 부산국제영화제는 그 장소적 특성상 더더욱 그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센텀시티는 부산의 역사문화적 지역성과는 동떨어진 반면 자본의 논리와 지자체 도시계획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인용 교수의 지적처럼 이 부근에는 "부산 출신보다 타지역 사람들, 그중에서도 전문직 종사자 등 한정된 계층이 많이 사는 곳이므로 부산이라는 장소성이 해체되는 데 문제 의식이 없다." 그렇다면 관객과 시민의 입장에서 체감하는 영화제 접근성과 내용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앞날은 이런 환경 변화와의 줄다리기 속에서 과연 누구를 위한 영화제인지를 묻고 답하는 가운데 결정될 것이다.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올해 의도와는 상관 없이 매머드급 백화점을 순례하는 바람에 정말 부산에 다녀온 것인지 헷갈리고 있는 촌스러운 관객의 심정에서, 또 규모에 대한 집착이 '아시아 영화의 중심지'라는 정체성의 고갱이를 흐뜨려 놓지 않을까 우려하는 부산국제영화제 팬의 시선에서는 무엇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영화가 영화제의 기본 요소라는 점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