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문화에 눈을 떠라] 박영주·조양호 회장 등 음악·미술·사진에 깊은 조예 경영과 접목 시도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이 사진 찍는 모습
예술적 소양은 단기간에 쌓이지 않는다. 각종 공연과 전시회, 음악회를 자주 접하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넉넉한 형편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재벌가 2세들은 상대적으로 예술적 소양이 뛰어날 것이란 게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바로 이 분야다. 전문가 수준에 도달한 경영자들도 드물지만 이러한 것들을 경영에 접목시켜 성공한 경우를 찾기는 더욱 힘들다. 하지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알짜 예술 경영자들은 분명 존재한다.

"저는 예술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어려서부터 음악과 미술을 하던 집안 어른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흥미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딸과 며느리, 조카도 모두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딸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고 있고, 조카도 독일 퀄른 지역의 방송교향악단에서 퍼스트 첼리스트로 활약하고 있어요. 큰누나의 큰아들이 바로 음악인 한대수입니다."

몇 년 전 사석에서 만난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은 처음으로 자기 집안의 예술적 취향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특히 기자의 관심을 끈 것은 자녀나 친인척들에 대한 이야기, '예술적 가풍'이 아니라 음악인 한대수 씨와의 인연이었다.

"대수를 공부시키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보냈어요. 농업과 관련된 공부를 시키려던 참이었죠. 그런데 미국에 공부를 하러 간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요. 대수를 찾으려고 제가 직접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찾긴 찾았는데 농업과 전혀 상관없는 뮤지션이 되어 있더라고요. 말이 뮤지션이지 완전히 음악 중독자였어요. 한국으로 데려와 정상인으로 만드는 데 무려 6개월이나 걸렸어요. 그런데 결국 다시 음악 쪽으로 가더군요. 타고난 취향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1-故 박성용 회장, 음악 영재들과 함께 2-故 박성용 회장 사택 내의 문화홀 연주 3-강석진 GE코리아 전 회장 4-오스템임플란트 최규옥 사장 5-이건산업 박영주 회장
이처럼 예술적 취향이 강한 집안에서 자란 박 회장은 자신의 문화적 감각을 경영에도 접목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건음악회다. 지난 90년 체코의 아카데미 목관 5중주 초청 공연을 시작으로 매년 개최하고 있는 이건음악회는 올해 20회째를 맞았다. 공연장을 찾은 인원만 해도 20만 명 가까이 될 정도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경영과 생활에 예술을 조용히 접목, 실천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영자인 셈이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역시 선대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한 예술적 소양이 있다. 바로 사진이다. 고 조중훈 회장부터 조양호 회장, 아들인 조원태 상무까지 3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조양호 회장은 매년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양호 회장이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중학교 시절 부친인 고 조중훈 회장으로부터 카메라를 선물받은 이후부터다.

조 회장은 지금도 멋진 풍광이 눈에 들어오면 바로 지나치지 않고 사진을 찍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해외 출장 때면 디지털카메라는 필수품 가운데 하나다. 실력 또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프로에 이르렀다는 게 사진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처럼 조양호 회장이 사진에 심취하게 된 이유는 선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친인 고 조중훈 회장은 사진 작품이 수만 점에 달해, 한 때는 개인 사진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조양호 회장의 외아들인 조원태 상무도 대를 이어 사진에 심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3대가 사진을 하는 집안으로 유명하다.

단순 취미가 아니라 예술 활동 전반을 지원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맏형인 고 박성용 회장은 우리나라 재계에서 '문화 전도사'로 통한다. 사후에도 박성용 회장의 이름 앞에는 항상 '예술을 사랑한 경영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다. 박성용 회장이 타계하기 1년 전인 지난 2004년에 그와 나눈 대화는 약간 충격적이었다. 타이밍을 놓치면 평생 예술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맥락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택시 2대로 운수업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아껴 두었던 용돈으로 베토벤 교향곡인 '전원'을 샀습니다. 너무 좋아 수백 번을 들었을 정도입니다. 서울대학교에 다닐 때도 학교 옆 돌체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닥치는대로 들었어요. 아마 그때부터 클래식에 심취하게 된 것 같아요. 아직도 일주일에 3번은 음악회에 갑니다. 연주회장에 있을 때면 세상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는 특히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예술적 소양은 나이를 먹은 후에 가르쳐 봤자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에게 문화적 소양을 길러주는 것은 고 박성용 회장이 생전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이다.

전직 GE코리아 회장이자 현재 CEO컨설팅그룹을 이끌고 있는 강석진 회장이 화가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가 그림에 입문한 것은 70년대 후반으로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뒤늦게 그림에 입문한 것이다. 꼬박 10년이 넘게 경영자와 화가로 활동한 다음에야 정식으로 한국미술협회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전시회도 이미 여러 차례 열었고, 지금은 경영자라는 직함보다 화가로 더 유명하다. 강석진 회장의 작품은 대부분 아름다운 자연과 그 안에 감춰진 생동감 있는 미(美)를 화폭에 담고 있다.

강 회장은 GE코리아 성장에 열정적인 경영이 바탕이 됐고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면서 늘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강 회장은 "경영이나 예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창조성(creativity), 열정(passion). , 프로정신(professional spirit)이 필요하므로 기본 정신은 같다"고 강조한다.

경영에 문화예술을 접목, 좋은 실적을 올린 기업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 형인 최신원 SKC 회장의 집무실에 들어서면 마치 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고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비롯해 각종 고가구와 장식품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최신원 회장은 80년대 말 해외지사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서 근무하게 됐을 때 지인에게 선물받은 그림 한 점을 시작으로 미술계에 발을 디뎠다.

그렇게 시작한 미술품에 대한 관심, 즉 미술품을 통해 얻은 부드러운 영감은 경영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사실 SKC의 경우, 업종 특성상 다른 기업보다 노조가 강성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좋은 미술품을 감상하듯 노조를 대했고, 과거 강경 일변도의 형식적인 협상이 아닌 부드러운 손짓을 먼저 보냈다. 노조 역시 이러한 최 회장의 마음을 받아 들였고, 이때부터 노사가 상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는 곧바로 SKC의 실적 향상으로 이어졌고, 최 회장을 단숨에 성공한 경영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우림건설 심영섭 회장 역시 재계에서 알아주는 예술 경영자다. 매달 직원들에게 책을 나눠주고 독서를 통해 기업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심 회장이 지원하는 수많은 문화예술 활동 가운데 백미는 공사현장에서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이다.

흙먼지가 날리는 공사장에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 책을 읽는 포클레인 아저씨, 공사장 마을 주변 아이들이 포근하게 책을 읽는 모습 등은 우림건설 공사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러한 지역 주민에 대한 심 회장의 배려는 우림건설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술 잘 먹는 CEO로 소문난 심재혁 레드캡투어(전 인터콘티넨탈호텔 사장) 대표는 사실 미술품 컬렉터로 명성이 높다. 그가 미술품에 대해 전문가 이상의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좋은 미술품을 선택하는 것'이 호텔의 수익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통상 5성급 이상의 호텔의 경우, 내부에 걸려 있는 미술품 가격만 수백억 원에 달한다.

이러한 미술품은 2~3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교체해야 하는데 구매할 당시보다 가격이 하락하면 호텔의 수익도 그만큼 줄어든다. 때문에 호텔업계에서는 미술품 관리만 잘해도 수익은 보장된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릴 정도다. 실제로 심 사장의 경우, 호텔 CEO를 하는 동안 미술품을 통한 적자는 단 한 번도 기록하지 않았다.

"최고경영자, 특히 건설업체의 CEO들이 스트레스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게 정답이에요. 항상 즐겁게 지내자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어요. 무언가를 결정한 후 추진하고, 책임진다는 게 기업의 CEO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큰 결정을 하기 전에는 항상 클래식으로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금호건설 이연구 사장은 클래식 마니아다. 그가 클래식을 즐기는 이유는 CEO로서의 업무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러한 클래식을 통한 업무역량 강화는 회사 전체에도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실제로 이 사장은 자신이 클래식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고, 임직원들에게도 항상 문화예술 활동을 즐기라고 권하고 있을 정도다. 부족하다 싶은 직원이 있으면 직접 티켓을 구매해 함께 관람할 정도다. 투박한 건설회사지만 문화예술을 통한 감성경영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사업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경영자도 있다. 아셈타워 5개 층에서 비즈니스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피벗포인트 윤명운 회장이다. 그는 현재 동원특수강이라는 회사도 운영할 정도로 재계의 숨은 실력자다. 윤 회장의 경우,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사업에 있어서도 한 획을 그었지만 그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은 문화예술과 관련한 신규 사업으로까지 확대됐다.

윤 회장은 현재 용평 인근에 대규모 허브 도시를 건설하고 있다. 농장 수준이 아니라 한 도시를 아예 허브향이 가득한 도심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다. 단순히 취미나 자선사업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닌 수익이 발생하는 비즈니스다. 허브를 형상화하여 다양한 건물을 짓고, 허브를 테마로 한 골프장과 미술관 등을 만들어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과 문화를 접목해 새로운 고부가가치 비즈니스를 창출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국제분과 동아제분을 계열사로 두고 있는 운산그룹 안종원 상근부회장은 사진을 찍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경영에 접목시키고 있는 경영자 가운데 하나다. 실제로 안 부회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사진을 찍고 난 후부터 인생을 바라보는 뷰(view)가 달라졌다"며 "그룹을 경영함에 있어 좀 더 세밀하면서도 큰 구도를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 벤처기업의 신화로 통하는 오스템임플란트 최규옥 사장 역시 조금은 투박하지만 예술을 통한 조직문화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치과 의사 출신인 최 사장은 매주 개사곡 경연대회를 연다.

"초창기 3~4명으로 시작했던 구성원이 10명, 100명, 500명으로 증가하면서 사내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더군요. 구성원들을 결속할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회사의 비전과 가치, 철학이 담긴 가사를 만들어 대중가요의 멜로디에 접목, 겨루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문화활동은 부서간의 장벽을 없애고, 오스템임플란트 만의 문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기업의 조직문화는 딱딱해서는 안 되고, 즐겁게 공유되어야 하는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도구는 문화예술밖에 없다고 말하는 최 사장은 "경영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CEO로 칭송받던 시기는 지났다"고 강조할 정도다.

재벌기업 오너 경영자들의 예술적 취향

사실 국내를 대표하는 재벌가 자녀들의 경우, 예술적․문화적 특기 하나 정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간에 어려서부터 지근거리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소양이 쌓이는 것이다. 그런 중에 미술이나 음악 같은 일반적인 예술보다 좀 더 독특한 분야에 관심을 둔 경영자도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고 정 회장은 평소 술을 한잔 마시면 가까운 친구들에게 "돈을 많이 벌어서 하고 싶은 문화 사업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즉 회사가 이익을 많이 내면 자신은 경영보다는 '한글 보급'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자주 언급했다는 것이다. 대학 동창들 역시 한글이 가진 아름다움과 예술성에 대해 고 정 회장이 매우 심취해 있었다고 전했다. 그래서 정 회장 생전에 현대그룹에서는 한글을 세계적으로 보급하는 연구소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최근 많은 국내 경영자들은 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트렌드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도 많다. 말 그대로 잠시 왔다가 가버리는 트렌드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풍이 갑자기 불어 닥친 이유는 한때 '창조'라는 테마가 유행했기 때문이고, 이런 창조력을 발달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우뇌, 즉 예술을 공부하는 뇌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창조력을 높이려면 문화·예술적 소양을 기르는 것이 관건이고, 이를 위해서는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많이 경험해야 한다며, 광풍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말처럼 예술적, 문화적 소양은 1~2년 동안 단기간의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영자의 경우, 자칫 본업에 소홀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문화적 소양을 차곡차곡 쌓아온 전문가 수준의 경영자들은 '일과 문화 활동'의 정확한 분배를 강조한다. 아울러 경영과 시너지가 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연구를 통해 접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과 예술의 섣부른 접목은 '하지 않음보다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게 이들의 충고다.

임재천 월간GL(글로벌 리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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