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문화에 눈을 떠라] 이상문 소설가 겸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문화예술 통한 성찰이 경영적 판단에 녹아들어야 진정한 문화 CEO

"문화예술 소양을 쌓았으면 인문학적 사고를 경영에 적용해야죠. 화장하듯 내세우는 게 문화 경영은 아닙니다."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베스트셀러 <황색인>(1987)에서부터 최근작 <이런 젠장맞을 일이>(2008)까지를 펴낸 소설가이자, 평사원으로 입사해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에까지 이른 이상문(63)씨의 말이다. 30여 년을 문화예술인이자 회사원으로 살아온 그에게 문화예술 안목과 경영의 상관관계에 대해 물었다.

이상문 이사장은 문화가 CEO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도구적 수단에 그치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문화 CEO라 선전해 놓고 경영적 판단은 철저하게 숫자를 기준으로 하고 인문(Humanism) 없는 경영을 하는 기업이 많은 탓이다.

21일 서울 여의도동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 이사장은 "기업 홍보실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화 CEO론이 물과 기름 같이 현실과 괴리돼 있다"며 "문화예술을 통한 성찰과 보충이 경영적 판단에 녹아들 때 진정한 문화 경영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 CEO라면 숫자로만 경영할 수 없다"

"중국 시장이 개방됐을 때를 예로 들어봅시다. 손익계산서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면 투자하지 않는 게 맞았습니다. 그러나 문화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중국의 저력과 가치에 주목했을 것이고, 그런 경영자들이 후에 뭔가를 얻어낸 것이죠."

이 이사장은 지금은 기술·경영 지식이 중요하던 과거와 같이 집합성의 가치가 기업에게 중요한 시기는 아니라고 여긴다. 가치경영이 CEO에 있어 더욱 더 중요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모으는 것보다는 흐트러뜨리는 능력이 중요하고 이를 가장 잘할 수 있는 경영 마인드는 문화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기술 평준화 이후에는 가치 창출이 기업의 생사를 가르고 있다. 기성품보다 수제품이 각광 받는 시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즉 영업 기술이나 이미지 등으로 승부해야 하며 그것을 모으면 '문화'라는 한가지 '키워드'만 남는다.

그는 CEO로서 이런 가치관을 실천에 옮겼다. 다소비 업종인 제지의 공급원은 석탄, 벙커C유, 가스 등이다. 그는 "인문학을 하지 않는 경영자였다면 주춤거리고 때를 놓치고 사멸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한국제지공업연합회는 중국 시장이 개방되자마자 자원 시장을 선점해 안정적인 공급원을 확보했다.

"문학하기와 경영하기는 다르지 않다"

이런 삶의 태도는 이 이사장에게 있어 일종의 습관이다. 그와 떼어놓을 수 없는 소설 <황색인>(1987)은 <한국문학>에 500매씩 3개월 동안 연재한 것이었다. 그는 일과 문학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숨은 노력을 철저히 반복해 왔다.

"집에 가자마자 밥 먹고 잠을 청해 새벽 3시만 되면 일어나 원고지를 집어 들었죠. 회사에 갈 때도 원고지를 들고 들어가는 생활의 반복이었어요."

이런 부지런함 덕에 이 이사장은 문학에서도 경영에서도 일가를 이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두 가지는 다르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찾고 취재를 합니다. 세심하게 낱말을 골라 이를 다시 정리하죠. 일도 마찬가지에요. 흐트러뜨리기와 정리하기를 잘하는 능력이 관건이죠."

73년 오일쇼크가 오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변변한 정부통계도 전문 기관도 없었다. 일을 할 때도 그는 통계자료를 구하러 한국은행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등을 찾아 '뻗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문학작품을 쓰려고 수교 이전에 베트남을 몇 달 동안 취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고 싶던 때는 없었나'라고 묻자 그는 "둘 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며 "문화의 정신은 기업의 생존과 발전에도 원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충전과 자극 없이 좋은 경영 할 수 있나"

"충전되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하다 보면 올바른 경영적 판단은 불가능해집니다. 비타민 같은 정신적 자양분을 문화가 CEO에게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이죠."

이 이사장은 '디테일'이 강할 수밖에 없는 문화에 대한 소양은 세밀한 경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인물을 다면 평가하는 버릇이 생긴다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CEO가 될 수 있다. 화가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머릿속에서 흐트러뜨림과 재구성을 반복하는 것처럼 경영한다면 장기 '비전'이 바로 선 기업이 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문화와 CEO의 관계를 보충할 수 있는 사례는 사실 드물지 않다. 한 국내 대기업은 창업주 시절 CEO 본인도 책을 많이 읽고 직원들에게도 많이 읽혔다. 그러나, 2세 경영에 접어들면서 문화 경영은 사라졌고 과욕을 부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 회사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이사장은 앞으로도 문학하듯 경영하고 경영하듯 문학하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는 "개인적 소망은 좋은 소설을 더 쓰는 것"이라며 "디지털 시대를 만난 아날로그 산업인 제지업계의 출구 전략도 문화에서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상문 이사장은…

소설가.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 한국펜클럽 부이사장. 동국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3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단편 <탄흔>으로 등단.

<황색인>, <방랑시인 김삿갓>, <이런 젠장맞을 일이> 외 소설 다수. 르포집 <베트남별곡>,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등 펴냄.

대한민국문학상(1988).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상. 한국펜문학상.



김청환기자 chk@hk.co.kr